[관객 노트 Sigak] 1. 나는 왜 미술을 좋아할까?

"아, 나 정말 미술을 좋아했구나!"
글 입력 2020.08.31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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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지난 글을 마무리할 때까지만 해도 정말 쉬운 질문이라 생각했다. “나는 왜 미술을 좋아할까”라는 질문 말이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써보려 고민을 거듭할수록 질문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미술을 좋아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미술이라는 어떤 세계의 범위 자체를 좋아한다는 건가? 아니면 어떤 작가나 작품을 좋아한다는 의미인 걸까? 그렇다면 어떤 작가나 작품을 좋아한다는 건 무엇일까? 미술을 ‘좋아한다’는 표현이 맞는 걸까?

 

“좋아하면 그냥 좋아하는 거지”라고 결론 내리면 참으로 쉬운 문제였다. 하지만 왜 그러지 못하는 건지, 이제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며칠을 그렇게 전전긍긍하다 종이 위는 정갈한 구성이 아닌 흩뿌려진 톱밥 가루처럼 난데없는 생각 조각들이 마구 흩날렸다.

 

어느 날 만난 친구에게 물어봤다. “너는 어떤 작가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뭐야?” 친구는 잠시 고민하더니 좋아하는 작가와 그의 작품이 좋은 이유를 차근차근 내게 들려주었다. 친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너는 예술가의 삶이 담긴 작품을 좋아하는 거네?” 친구는 완벽한 요약이라 했다.

 

길지 않은 한 편의 대화를 끝으로 나는 잠시 멍해졌다. ‘이렇게 쉬운 질문인데 나는 왜 이렇게 어려워했지?’ 나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술을 내 전공으로 생각한 이후로 모든 작품을 좋고 싫음이나 나름의 취향을 모두 배제한 채 바라보려 노력해서 그랬던 걸까.' 그것이 습관이 되어 ‘좋아한다’라는 말 자체가 낯설어진 거고. 내가 정말 그랬던 것인지는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일단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이유인 것 같았다. 순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친구와 달리 나는 어느새 작품을 뜯어보고 해석하려는 무미건조한 관찰자가 되었나 싶었다.


*

 

나는 “왜 미술을 좋아할까”라는 질문을 미술과 관련된 나의 몇몇 에피소드와 함께 풀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혼란스러움 한편에서는 미술과 엮인 나의 이야기를 흩어진 기억 사이에서 추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완전히 잊고 있던 스무 살 때의 일을 떠올렸고 다행히도 그때 썼던 글을 발굴(?)할 수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호기심에 들은 서양미술사 교양 강의에서 미술관 전시 감상문 과제를 한 적이 있었다. 교수님께선 당시 열리던 국내 프랑스 국립 오르세미술관 전시회를 추천하셨고, 나는 다른 전시회를 알아보지도 않고 그 전시회에 말로만 듣던 명작이 전시된다는 사실만을 기억하고 별다른 고민 없이 발걸음을 옮겼었다.

 

감상문은 현실과 똑같이 그린 고전주의 그림에 대한 놀라움, 사진으로만 봤던 밀레의 <이삭 줍기>를 보며 느낀 것들, 강의에서 배운 대로 인상주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졌다. 여기까지 분량의 딱 반을 채웠다. 그리고 감상문의 다른 절반은 오로지 빈센트 반 고흐의 <정오의 휴식>에 대한 내용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실제로 나는 이렇게 썼었다(글의 일부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처음으로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 글인 만큼 자유롭고 서툰 흔적이 가득하다는 점을 고려해주시면 좋을 것 같다).

 

 

전시회에 걸린 작품은 고흐의 <정오의 휴식>이었는데 감히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멀리서 딱 발견하고 걸어가는데 뭐랄까 점점 그 그림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림 속으로 잠기는 기분, 이런 느낌이라기보다는 거의 그 그림의 생동감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진짜 다가서자마자 속으로 감탄사를 쏟아부었다. 그림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강렬한 고흐만의 붓 터치들이 하나하나 빠짐없이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림을 보자마자 바로 그려지는 가을 즈음의 풍경. 어떻게 그림에 대해 써도 내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어떤 작품들보다도 상상 그 이상이었다. '사진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생동감과 에너지가 느껴지는 이유가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은 그냥 내 생각을 뒤흔들어 놓았다. 계속 그 그림 앞에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기도 했고 다시 멀찍이서 바라보기도 했다. 프랑스만의 파스텔 컬러도 아름답게 빛을 발했다. 황금빛의 볏짚들, 햇빛에 반사되는 들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휴식을 취하고 있는 두 농민의 옷깃, 노란빛과 하늘빛의 환상적인 조화였다. 거기에 고흐의 혼이 담긴 붓 터치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 그림을 그린 그때에는 잔잔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던 것 같다. 붓이 지나간 자리의 흐름이 그랬다. 단지 내가 그렇게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감상은 그랬다. 의도적으로는 그릴 수 없는 그런 생동감이었다. 과연 화가의 의식에 따라 영혼을 다해 그린 그림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고흐의 작품 앞에서 정확히 몇 분을 서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한 삼십 분 정도 그림을 바라본 그것 같다. 뒤돌아서기에는 여운이 남는 그림이었다. 그래서 발을 못 움직이고 계속 서 있었다.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고흐의 작품이 걸린 벽은 짙은 초록색이었고, 그곳은 공간을 밝히는 조명은 어두운데 작품을 비추는 조명은 밝아서 빛과 그림자가 꽤 강한 대비를 이룬 공간이었다. 몇몇 사람들 실루엣 너머로 고흐의 작품이 슬쩍슬쩍 보였고 나는 고흐의 그림이 한눈에 보일 만큼 다가간 순간 그대로 멍하니 멈춰 섰다. 가만히 있는 그림에서 무엇인가 많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그리고 나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거칠게 쓴 그대로, 원작은 그냥 내 생각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글에는 너무 이상해서 인상 깊은 문장이 있다. “단지 내가 그렇게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감상은 그랬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 문장인가. “내가 그렇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느낌은 그랬다”와 별다름 없는 문장이지 않은가. 서툴게 삐걱거리며 급하게 나열된 문장들만큼이나 그때의 내겐 고흐의 작품을 마주한 순간이 정말 신기하고 생경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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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정오의 휴식

 

 

몸은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굳어있는데, 시선은 그림의 눈부신 색채를 음미하느라, 살아있는 떨림을 품은 듯한 붓 터치의 흔적을 살펴보느라 그림 위를 들뜬 움직임으로 배회했다. 정말 신기하다 생각했다. 그림이 그럴 수 있구나, 단지 아름답거나 유명해서 명작이 아니구나. 그러다 막연한 생각을 그만두고 계속 그림 앞에 서 있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나는 눈시울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조명이 밝아서 눈이 시렸던 걸까. 하여튼 눈물이 살짝 고이는 것 같았다. 그것을 알아차리자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작품에 감동 받은 건가?’ 아무렇지 않게 감동이라는 단어를 썼다. ‘작품에 감동한다는 게 뭐지?’ 나는 그 순간을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내가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좋았다. 다른 그림, 명작이라던 밀레의 그림도 무심코 지나쳤던 내가 이 <정오의 휴식> 앞은 쉽사리 떠날 수 없는 이유를 알 수 없이, 그저 계속 머물고 싶다는 마음만 들었다.

 

겨우 뒤돌아 전시장을 나오며 “그림 앞에 의자만 있었어도 더 오래 머물 수 있을 텐데”라고 아쉬워하던 내가 기억난다. 아직 <정오의 휴식> 이후로 그토록 오래 마주하고 싶은 작품을 만난 적이 없다. 앞으로 그런 경험을 다시 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고흐의 그림과 마주했던 내게 일었던 벅차오르는 감정은 정말 어디서 무엇 때문에 일었던 걸까. 다시 생각해봐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정말 “그냥 좋아서” 그랬던 걸까. 말로 설명되지 않아도 미술 작품 앞에서 행복한 경험이었던 건 확실한 것 같다.


*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으로부터 고립된다면

마음에는 의심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2019.10-

 

작가도, 이름도 모르는 작품과의 만남을 기록한 일기가 있다. 너무도 절박하게 시작하는 이 글은 강박과 불안에 쫓겨 불쑥 키아프(KIAF, 한국국제아트페어)에 갔던 날에 쓴 것이다.


 

모든 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상상에만 머물고 있으니 좋아하는 마음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사라지고, 어쩌면 이 모든 게 겨우 꿈이었고 내가 바라던 만큼 할 수 없을 거라는 회의감이 생겨났다. 나는 정말 미술을 좋아하는 걸까. 그냥 지금까지 내 생각에만 갇혀왔지 이뤄온 것이 하나도 없던 게 아닐까. 좋아하고 있다기엔 사실 지금까지 아무것도 한 게 없지 않나. 의심은 나에게 무엇이 있었는지조차 망각하게 한다. 뒤돌아보니 아무것도 없고, 지금의 나는 나의 마음조차 확신할 수 없고, 그래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 딱 그런 상태였다.


이것이 내가 무작정 서울로 올라간 이유였다.

 

 

당시 나의 상황을 요약하자면, 휴학 후 돈을 버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부으면서 몸도 정신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우울증이라면 우울증이었고 번아웃이라면 번아웃이었다. 온통 지친 상태로 지내면서 전시를 보러 가거나 미술에 대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건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너덜너덜한 상태가 이어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떠오른 “나는 정말 미술을 좋아하는 걸까?”라는 질문이 가시처럼 마음 한구석에 박혀 있었다. 무엇보다 두려웠던 것은 “내가 미술을 좋아한다고 믿고 싶던 게 아닐까?”라는 의심이었다. 미술을 마음에 둔 지난 시간이 모두 무의미해진 것 같아 두려웠고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민은 지나치게 깊어지면 시작과 끝이 사라진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회로만을 돌다 깊은 수렁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속은 처참한 상태로 끔찍한 고민 덩어리를 짊어지고 서울에 무작정 올라갔던 것이다. 직접 현장에 가서 많은 미술 작품들을 보고 경험하다 보면 다시 확신이 생겨 내게 박힌 이 가시를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나는 전혀 그럴 수 없는 상태였다. 광활한 공간 속 작품들의 향연 앞에서 쌓일 대로 쌓인 고민에 휩쓸린 나의 눈은 생기 한 줌도 띄우지 못하고 있었다. “신기하다” 정도라도 외치길 바랐는데 마음은 무엇인가를 느끼기를 완전히 그만둔 것 같았다.

 

도슨트도 강의도 이미 모두 마감되어 미리 세웠던 계획마저 망가지자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는 내 자아 어딘가에게 실망스러움을 표했다. 머릿속은 미친 듯이 회전하는 뫼비우스의 띠를 끌어안으면서 언제 이곳을 나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작품을 보지 않고 정면만을 바라보며 빠른 속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많은 작품이 시야 가장자리에 문지르듯 번지며 지나갔고, 그러면서 ‘그 작품’1)도 내 시선 가장자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계속 걸어가다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발걸음을 멈춘 것이다. 그러곤 뒤돌아 다시 그 작품을 향해 걸어갔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이 하나의 빛만 보여주는 그림 앞에서 나는 아무 생각할 수 없었다. 어떤 위압감이 든 것도 아니었고, 그림에 홀려버린 기분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빛만 응시했고, 그저 그러고 있는 순간에 머물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지만 그 순간은 내게 무엇인가 찾아낸 기분을 주고 있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그림. 에메랄드색이라면 에메랄드색, 맑은 하늘색이라면 맑은 하늘색의 오묘한 빛만이 캔버스를 가득 채워 숨을 쉬는 듯 일렁이는 작품이었다. 그뿐이었다. 관찰할 것도, 생각할 것도, 무엇인가를 떠올릴 것도 없이 일렁이는 푸른빛만 눈에 가득 찼다. 텅 빈 상태로 멍하니 작품을 응시했다. 과도한 회전에 덜컹거리던 뫼비우스의 띠도 천천히 멈춰 서고 머릿속은 순식간에 새하얀 백지가 되어갔다. 나는 그렇게 그 그림 앞에 나를 내버려 두었다. 꼭 서로 응시하며 침묵으로 대화하듯이. 한참을 그러다 갑자기 정말 하고 싶던 말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아, 나 정말 미술을 좋아했구나!”

 

 

침묵 속에서 마음속이 알게 모르게 비워졌을 때, 처음으로 터져 나온 말이었다. 나는 정말 작품 앞에서 머물기를 좋아했구나. 그 순간 나조차도 어찌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이 잔뜩 쌓인 응어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지나치게 부풀어 오른 갈피 잃은 생각들이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의 수면 위를 닮은 작품처럼 차분하게 가라앉고, 줄곧 의심했던 마음들이 제 모습을 다시 찾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천천히 공간을 거닐면서 작품을 하나씩 감상해보기 시작했다. 내가 바랐던 대로 그저 가볍게 걸어 다니다 그냥 마음에 걸리는 작품이 있으면 잠시 머물기도 하는 시간을 오랜만에 보낼 수 있었다.

 

얼마나 머릿속이 복잡할 때 봤으면 나는 그 작품의 작가와 제목도 확인하지 못했었다(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얼마나 후회스러웠던지). 한편으론 내가 그 작품을 만났던 순간을 꽤 오랫동안 마음에 둘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 작품과 침묵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잠시 물러나고 쉴 수 있는 여백이 생겼던 걸까. 아니면 그때의 내겐 그저 아무것도 보지 않는 시간이 필요했던 걸까. 어떠한 말도 없이 아무것도 보지 않으면서 무엇인가를 응시하던 그 순간에 대해 나는 이렇게 기록했다. “내겐 위로였다. 그 순간이”라고.


*

 

“나는 왜 미술을 좋아할까?”

 

 

두 편의 기억을 정리하다 보니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고 싶어졌다. 나는 작품과 내가 만난 그 순간에 일어나는 경험을, 서로 같은 것 하나 없이 미술 세계를 이루는 작품들만큼이나 내게 다가오는 다채로운 경험을 좋아한다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미술에 대한 무수한 경험 사이에서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거나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단지 어떤 작품만이 아니라, 그 작품과 내가 마주한 순간에 일어난 경험 그 자체였다.

 

기존의 틀을 깨고 단번에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는 동시대 미술 앞에서 질문을 던지고 낯선 경험 속에 머물며 사유하는 것도 좋지만, 결국 내가 지금까지 예술에 마음을 둘 수 있게 한 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때 만났던 작품과의 순간이었다.

 

새삼 그때의 일들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잊고 지냈다는 생각이 든다. 객관적인 해석이나 학문적인 의미에 기대지 않았던, 정말 작품과 나만 남았을 때 느끼고 사색하며 일어났던 여러 경험을 말이다.

 

생각해보면 왠지 모르게 그런 감상은 쉽게 뒤로 물러나거나 잊히는 것 같다. 잘 모른 채로 우연히 떠올렸다는 이유로, 그저 개인적인 감상뿐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의 이야기같이 그저 나라는 사람 안에서 일어난 사사로운 감상 역시 예술이 주는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그 감상은 작품을 통해 내가 무엇을 느끼고 떠올렸는지, 무엇을 궁금해했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방식대로 자유롭게 살펴보았기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결국 내가 존재함으로써 느낀 것인 동시에 그 작품에 더해진 또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예술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작품을 이해하려는 동시에 나 자신을 살펴보고 이해하는 과정인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여기서부터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작품과 소통하는 여정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당연한 것 같다. 나의 감상은, 이미 정해진 지식이 아닌 내가 경험하는 것을 살펴보고 이해하는 것을 통해 시작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

 

글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고 싶다. 정말 나는 어느새 무미건조한 관찰자가 되어 버렸던 것일까. 지금으로선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지난 기억들을 찾아다니며 생각해보니 나는 작품을 감상할 때마다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하려 했었던 것 같다. 단지 나를 향한 질문이 감상하는 과정의 제일 처음에 있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이제 미술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아도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작품과 내가 소통하며 일어나는 경험을 좋아해요!” 세상에, 이 한 문장을 위해 얼마나 긴 여정을 다녀온 건지. 하지만 후회는 없다.  대답뿐만 아니라 미술과 나의 관계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1) 나중에 이 작품을 알아내기 위해 검색해보았는데 김택상 작가의 작품이었다. 김택상 작가는 빛에 일렁이는 듯 물이 머금어진 듯한 단색 화면을 캔버스에 담아낸 작품을 제작하는데, 실제로 캔버스 천 위에 물을 담을 수 있는 장치를 두고 색을 녹여낸 물을 그 위에 부어 물감 물의 색이 천에 스며들게 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아마 그래서 내가 작품 앞에서 빛이 숨을 쉬는 듯한 느낌, 아른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덧붙이자면 디지털 이미지는 작품의 일렁임을 잘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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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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