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연이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 여름날 [영화]

글 입력 2020.08.18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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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의 시간을 버티는 것



나에게 고독은 양날의 검이다. 외로움이라는 해결되지 않는 감정을 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외로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주기도 한다. 고립의 시간은 평범한 것을 특별하게 느끼게 해준다.


나의 삶에는 고립의 순간이 잦았다. 물리적인 고립 혹은 정서적인 고립. 그런 상태에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이루어내기 어렵다. 하지만 지금 와서 나의 고립의 시간을 떠올려보면 그로 인해 나는 성장하기도 하였다.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고 버텨낸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경험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립의 시간을 이겨낸 내가 강하다고들 말한다. 그렇지만 ‘이겨냈다’는 표현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내가 삶을 위해 고독을, 아픔을 스스로 이겨낸 건가? 나는 그저 버텼을 뿐인데. 나는 은연중에, 내가 약하기 때문에 고작 버티는 일밖에 못 해왔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여름날’이라는 작품과 그 작품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버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버티는 것도 충분히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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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희의 여름날



주인공인 승희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거제도에서 잠시 머무르게 된다. 하지만 고향이 그녀에게 준 것은 따뜻함과 편안함이 아니었고, 그녀에게는 어머니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뿐이다.


승희는 고독해 보인다. 살면서 숱한 만남과 이별을 겪어왔을 승희는, 새로운 만남을 약간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여름날에 이별이라는 사건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그녀가 머무르는 거제도는 과거에 고려 왕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승희는 낚시 중 우연히 만난 거제 청년과 폐왕성에 방문하기도 한다. 과거에 누군가를 고립시키던 공간이지만 승희는 그곳에서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용기를 얻은 것 같다. 자신의 유배된 시간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얻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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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움



‘여름날’은 이제껏 내가 본 작품 중에 가장 자연스러운 작품이다. 촬영 기법, 연출, 사운드까지.


연출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이 관람했는데, 관람하면서도 굉장히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우선, ‘정확한 대본이 존재하는 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카메라가 움직임 없이 그저 그들의 일상을 ‘포착’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고 난 후 기자간담회에서 이 작품이 즉흥연기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대본 없이 커다란 상황만 주어진 상태로 배우들이 장면을 즉흥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런 시도가 가능하다니 놀라웠다. 나는 영화보다 연극을 선호하는데, 영화는 감독이 보여지기를 원하는 장면만을 촬영하고 철저히 편집해서 관객에게 보여주는 장르라고만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영화는 어딘가 계산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장르라는 편견을 가졌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여름날’의 시도가 나에게는 굉장히 긍정적이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영화라니. 커다란 사건 없이 잔잔히 흘러가는 영화임에도 나에게는 굉장히 인상 깊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 사운드에 있어서도 굉장히 자연스러운 작품이다. 낮의 매미 소리, 밤의 귀뚜라미 소리, 닭들의 울음소리 등이 선명하게 담겨 있다. 이는 관객이 승희의 여름날에 함께 스며들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효과적인 장치 중 하나이다.


*


그밖에도 ‘여름날’에서는 공간성을 좀 더 살리기 위해 거제도 유일의 극단 예도의 배우들을 섭외하고, 비전문 배우로 오정석 감독의 할머니가 직접 출연하였다. 이러한 포인트들은 영화를 한층 더 자연스럽게 만든다.


새로운 시도들이 굉장히 돋보였고, 메시지도 연출도 와닿았던 작품이다. 오정석 감독의 인터뷰 중 영화와 우연에 대한 생각이 인상 깊어 그것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친다.


“영화 현장에서는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고 우연이 존재한다. 연출자의 몫은 영화를 그 우연에 내맡기는 것이 아닌 우연이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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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 Days in a summer -
  
 
감독/각본 : 오정석
 

출연

김유라, 김록경

 

장르 : 드라마

개봉
2020년 08월 20일

등급
전체관람가

상영시간 : 82분

 

 

 

송진희 컬쳐리스트.jpg

 

 

[송진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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