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을 뒤흔든 사랑의 순간 [영화]

드라마 <밀회>와 영화 <아이 엠 러브>에 대하여
글 입력 2020.07.2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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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 혼자 산다'에 배우 유아인이 출현했다. 방송에서 그가 하루를 마무리할 때 본 영화가 있다. 유아인이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라고 소개한, 나 또한 인생영화로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아이 엠 러브>다.

 

그는 마지막 장면을 여러 번,  0.5배 속으로 돌려보며 그 찰나의 순간이 주는 느낌에 집중했다. 모든 걸 버리기로 결심한 틸다 스위튼이 활짝 열린 현관문으로 뛰어나가는 장면이다. 자신이 연기한 수많은 배역 중 <밀회>의 '이선재'를 자신과 가장 닮았다고 꼽은 배우라면, 영화 <아이 엠 러브>를 사랑한다는 게 당연한 이치처럼 느껴진다.

 

 

 

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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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회>는 2014년 김희애와 유아인이 주연을 맡은 JTBC의 16부작 드라마다.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서한예술재단 기획실장 오혜원(김희애)은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실상 재벌들의 뒷일을 처리하는 우아한 노비에 불과하다. 이선재(유아인)는 가난한 퀵 배달원이었지만 천재 피아니스트로 발굴되어 서한음대에 입학한다. 혜원의 남편이 선재의 지도교수를 맡게 되면서 혜원과 선재는 위험한 연인으로 발전하고, 주변 인물들은 이들의 관계를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들을 얻어내려 한다. 선재는 혜원을 비리 가득한 세상에서 나오게 하고, 결국 혜원은 자신이 쌓아온 허상들을 버린 채 자수한다.

 

방영 당시 극 중 마흔 살과 스무 살이라는 파격적인 나이 차이와 둘이 근본적으로 불륜관계라는 설정은 시작부터 세간을 뜨겁게 달궜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불륜은 절대 미화해서는 안 되는 소재일 것이다. '부부의 세계'에서 이태오는 '개태오'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안판석 감독의 섬세한 연출, 시궁창 같은 현실을 어루만지는 아름다운 클래식 피아노의 선율, 숨 막히는 우아함과 애처로운 순수함으로 무장한 <밀회>는 감히 '불륜'이라는 지저분한 단어로 뭉뚱그려 비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이 드라마는 오히려, 삶과 사랑의 본질을 건드린다. 한 평생 쌓아 올린 세상을 제 손으로 무너뜨리게 만드는 사랑, 그것이 이들의 사랑이다. 평생 명성과 부를 착실히 쌓아 올라온 오혜원이 이 젊고 무구한 청년 선재의 사랑의 외침 앞에 흔들리고, 돈과 권력 대신 자유와 사랑이 있는 선재의 세계로 친히 걸어 내려간다. 그녀의 발걸음을 옮긴 건 무엇일까. 마흔 살. 스무 살이 된 이후부터 20년 동안 오직 출세를 위한 삶이었다.  그녀가 입는 옷, 좋은 차, 으리으리한 집까지. 상류사회에 속하기 위해 그녀가 지나왔던 인생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었나.

 

가진 게 너무 많은 혜원과 달리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청년은 한 번도 상처 받은 적 없는 심장 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을 퍼붓는다. 그 당돌함과 유약함, 스스로를 태워버릴 듯한 열정 앞에 혜원은 애써 침착한 척해봐도 결국엔  속수무책이다. 기획실장 오혜원은 선재 앞에서 인간 오혜원이 된다. 질투라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을 느끼고, 밀어내면서도 확인받고 싶어한다. 그런 혜원에게 선재는 이렇게 말한다.

 

"그냥 저 사랑하시면 돼요. 밑질 거 없잖아요 분명 제가 더 사랑하는데"

 

선재가 그녀를 흔들어 깨우기 전까지, 혜원은 일종의 마비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출세 전략으로서의 결혼, 뺨을 맞고 돌아와도 신경 쓰지 않는 남편의 무관심. 어떻게든 약점을 잡아 그녀를 끌어내리려는 예술재단 사람들과 참아야 하는 모욕감, 범법을 일삼고 스스로를 기만한 세월까지. 하나하나 아프게 느껴버리면  자리를 지켜낼 수 없기에 스스로를 마취시켰다. 혜원의 밑바닥까지 존중하고, 기분을 살피고, 그녀를 못 견디게 원하는 사람 앞에서 마취로 무감해졌던 감각은 되살아난다. 마땅히 느껴야 할 기분을 느끼고 자기 마음을 살핀다. 그리고 지금껏 지켜왔던 인생이라는 것이 고작 텅 빈 껍질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사랑 앞에서 그 추한 민낯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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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사회의 사람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속물 같은 짓도 서슴지 않으며 자신의 세계를 일궈낸 오혜원이다. 순간의 연애 감정에 이리도 세차게 흔들리는 것은 지금껏 철저하게 억압되어 있던 욕망이 처음으로 분출구를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가진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삶에서 감정은 부질없을 뿐이었다. 그래도 모든 걸 버린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결심이다. 누군가는 어리석다고 혀를 찰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결심의 결과가 두 다리 쭉 벋고 잠잘 수 있는 삶이라면 지금껏 끌어안고 있었던 세계를 내던져도 좋을 것 같다.

 

하나의 사건이 인생을 변화시켰다는 건 그 일이 인생 전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확신시켰다는 뜻일 것이다. 때문에 밀회는 단지 사랑에 대한 드라마라기보다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밀회의 혜원처럼, 뒤늦게 찾아온 사랑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는 여인 또 있다. 영화 <아이 엠 러브>. '나는 사랑이야!' 외치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다.


 

 

영화, 아이 엠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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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엠 러브>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2009년 작, 틸다 스윈튼 주연의 로맨스 영화다. 틸다 스윈튼은 화려한 필모그래피와 그보다 더 화려한 연기력을 자랑하는데, 섬세한 감정 연기부터 격정의 순간까지 최대한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와 옥자에서 강렬한 캐릭터를 선보인 적 있어 우리에게 무척이나 익숙하고, 이시언과 함께 여행사 광고를 촬영해 "여행이 영어로 뭐지?"라는 대사로 국내 영화 팬들의 충격을 자아낸 경력이 있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그 유명한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의 감독. 믿고 봐도 좋다. 개인적으론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을 먼저 보고 좋아서 이 감독의 전작인 <아이 엠 러브>를 찾아 본건데, <아이 엠 러브>가 훨씬 더 좋았다.

 

엠마(틸다 스윈튼)는 자신의 고향 러시아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이탈리아 밀라노로 건너왔다. 이곳에서 재벌가의 일원이 되어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 듯 하지만 외국인이라는 신분에서 오는 소외감과 대저택 전체를 휘두른 삭막한 분위기 속에  메말라 갈 뿐이다. 엠마 자신조차 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지냈으나 우연히 찾아온 사랑으로 깊이 묻어 두었던 내면이 깨어난다. 이를 계기로 엠마는 진정한 자아의 해방을 위해 그녀를 가둬뒀던 인형의 집을 박차고 나온다.

 

 

메마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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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고 웅장한 대저택은 다섯 가족의 온기가 메우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굳게 닫힌 창과 문, 대저택 사이사이를 가로막는 여닫이 또는 미닫이 문들은  엠마가 일종의 격리 상태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엠마' 또한 남편이 지어준 이름이다. 그녀는 자신의 원래 이름은 잊어버린 채 그저 레키 가문의 일원으로써, 남편의 소유물로서, 이 커다란 저택의 가구로써 존재한다.  엠마는 아들의 친구 안토니오를 만나면서 변화를 맞이한다. 자아를 가렸던 두껍고 무거운 장막이 걷어지며 환한 햇살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리친다.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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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는 사랑의 순간을 자연의 생명력과 함께 환한 햇볕이 축복하는 모습으로 그린다. <콜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도 두드러졌던 초록의 풀과 산들바람, 따사로운 햇살 같은 것들이 엠마와 안토니오의 사랑의 순간에 화면을 가득 채운다.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불륜 관계임에도 한 점의 부끄러움 없이 밝게 묘사되는 정사 장면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을 넘어 우거진 자연 속에서 본연의 자아를 갈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첫 키스 후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엠마가 화장실에서 참았던 소변을 누며 환하게 미소 짓는 장면이다. 다소 독특한 이 화면 전환은 그 키스의 순간보다 그것이 그녀에게 가지고 온 마음의 격량에 집중하게 하면서 배설 행위가 갖는 카타르시스를 탁월하게 전달한다. 연출의 측면에서 보면 둘의 첫 키스 장면은 흐릿하게, 초점이 맞지 않은 상태로 짧게 지나치는데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이 영화 전체에서 중요한 건 찰나의 순간이 아닌 그 이후의 파동이라는 점이다.

 

영화의 첫 시작은 하얗게 눈이 내리는 밀라노의 풍경이다. 거기서 엠마는 동분서주하며 대저택의 가족모임을 위해 애쓰고 있다. 엠마가 남편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항상 그늘이 저 어둡고, 얼굴엔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반면 안토니오와 함께 있는 곳은 여름의 산레오다. 산레오는 러시아인 엠마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러시아 정교회가 있는 공간이자, 녹음이 푸르르고 해가 들이치는 밝음의 공간이다. 기품 있고 우아한 아내로서 차가운 밀라노의 부속품처럼 움직였던 엠마는 산레오에서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

 

 

탈출


마지막은 '탈출'이다. 엄마의 외도를 눈치챈 큰아들과의 언쟁 중, 아들이 실수로 죽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한 없이 유약해진 엠마는 레키 가문에서의 삶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장례식에서 마음이 텅 비어버린 엠마는 맨발 차림으로 울고 있는데 그녀의 남편이 다가와 신발을 신겨주고, 자신의 외투로 그녀를 덮어준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때 엠마는 성당에 잘못 들어온 비둘기가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을 보더니 "나 안토니오를 사랑해요"리고 실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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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저택으로 들어온 엠마는 자신이 걸치고 있던 불편한 옷과 장신구를 벗어던진다.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갈아입고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뛰어나온다. 일층에서 마주친 딸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모든 걸 이해하는 듯한 하인과 눈빛을 주고받는다. 그리고는 활짝 열린 대문. 내내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새장 속에 갇혀 있던 새가 멀리 날아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전체를 뛰어넘는 순간

 

드라마 밀회와 영화 아이 엠 러브 모두 불륜을 소재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결국엔 인생의 본질에 관해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며 이야기를 끝맺는다. 혜원은 선재에게서 과거 젊고 열정이 넘쳤던 꿈 많은 소녀 혜원을 본 것 같다. 엠마는 안토니오가 대접한 러시아 음식을 먹으며 사랑에 눈을 뜸과 동시에  잃어버렸던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찰나의 순간이 인생 전체를 변화시키기 위해선 그 찰나가 긴 세월을 이겨야만 한다. 비단 사랑에 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부와 명성, 화려한 겉모습에  둘러싸여 있어도 그곳에 '나'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더라도 '나'가 두 발 뻗고 존재할 수 있는 곳으로 몸을 던질 수 있을까?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는 대사가 떠오른다. 그것이 구원인지 파괴인지는 다른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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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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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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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엠러브
    • 너무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영화와 드라마 둘 다 보진 못했었는데  이 글을 읽는 동안 주인공의 기분이 느껴질정도로  감정이입이 되네요.  당장 보고시퍼 지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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