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샹냥한 감옥 속의 비극 - 장녀들

글 입력 2020.07.03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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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녀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는 그 이름에 얽매어 본 적은 없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동세대 분들을 생각했을 때 답답한 차별적 얘기를 비교적 지양하는 편에 속했다. 내가 여자임에 대해서도 예쁘게 좀 하고 다니라는 말 몇번 듣고 무릎 보이는 옷 입지 말라는 얘기 몇번 들은 정도가 다였다. 아, 물론 여자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집중하는게 좋다는 주의였지만 최근에는 평생 커리어 잘 쌓으면서 살라고 하신다. 육아와 커리어 쌓기 두 가지를 동시에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 곱씹어보니 꽤 많은 얘기를 들어오긴 했군.

 

하지만 장녀이니 이래야 한다는 의무는 강요받아본 적 없었다. 그럼에도 내 머릿속에는 부담감이 존재했다.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모든 동생이 그런건 아니지만 내 남동생만큼은 아주 철이 없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남동생에게 매우 무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해가 지날수록 나이들어 가시는게 눈에 보인다. 아버지가 퇴직하시고 이런 저런 일을 전전하시는 것도 꽤 된 일이다.

 

어렸을 때는 가족이 날 지켜주는 거대한 울타리로 여겨졌는데 지금은 내가 지켜가야 할 연약한 뿌리처럼 느껴진다. 가족을 어떻게 케어해야 할 것인가? 이건 나이가 들수록 점점 현실적인 고민이 되어갔는데, 초반에는 장남이나 장녀나 형제 중 맏이로써 겪는 고민거리에 가까웠다. 다만 어느 순간 이런 직감이 들더라. 돌봄의 영역에 있어서 딸과 아들 중 누구에게 의무의 프레임이 씌워질지. 엄마가 할아버지를 간병했고, 고모는 시어머님과 함께했다. 가족을 챙기지 않는 딸이 얼마나 매정한가에 대한 말들이 오감을 알았다. 그러니까 이건 무의식적으로 보고 들은 것, 경험에 근거한 직감이었다.

 

나는 우리 가족이 너무 좋다.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만큼 기쁨과 안정을 주는 관계. 아마 이는 우리 가족과 내가 나이를 들어갈 미래에도 동일할 것이다. 부모님을 돌봐드려야 한다면 기꺼이 시간을 들여 노력할 테다. 요즘은 부모님의 미래를 가늠하며 씀씀이도 줄였다. 하지만 내 기꺼운 사랑과 감사의 마음에서 나타나는 행동이 아니라 부모를 외면하는 매정한 딸로 매도되지 않기 위한 행동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런 프레임에 묶이고 싶지 않다. 물론 아프고 힘든 가족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현실적이고 힘든 일인지 아직 몰라서 더 조심스럽다.

 

책 <장녀들>은 보금자리였던 가족이 어느새 족쇄가 되어버린 장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내가 여성이고 첫째이기에 더 몰입해서 본 것도 있지만, 비혼주의자인 친구들을 생각하니 더욱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

 

예전에는 딸을 낳으면 그런 소릴 했댄다. 딸은 살림 밑천이니 잘 키워야 한다고.

 

사실 그렇게 옛 말도 아닌 것이, 내 어릴 적만 해도 친할머니는 그런 말씀을 하셨다. 할머니와 지낼 때면 그런 얘길 들어야만 했고, 내 가치관이 정립되어갈 성장의 시기에 그런 말을 들으며 자랐다는게 썩 유쾌하진 않다. 아이에게 어른이 건네는 말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생각해보라.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모른다. 딸이란 존재는 하나의 개체로 인식되기보다 가족에 종속된 부분적 존재로 여겨졌던 것이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지만 사람들 내면의 아주 깊은 곳에 자리한 인식까지는 완전히 바뀌기 어렵다.

 

책 <장녀들>은 어머니, 며느리, 딸 등 수많은 여성 중 비혼인 장녀와 아직 딸을 가족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의 이야기를 다룬다. 책에 등장하는 장녀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 어머니 세대와 달리 고등 교육을 받고 특정한 사회적 지위를 쟁취해내기에 이른다. 하지만 직장을 다니는 자유로운 싱글 여성이라는 타이틀은 이들에게 자유가 아닌 족쇄를 채운다. 때로는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나이 든 부모를 돌보고 경제적 부담을 짊어진다.

 

책은 크게 3가지 이야기를 다룬다. 먼저 '집 지키는 딸'에 나오는 나오미는 직장을 그만두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며, '퍼스트 레이디'의 게이코는 어머니에게 신장을 기증하는 문제로 고민한다. '미션'의 주인공 요리코는 자신의 뜻대로 사회로 나아가 살아가지만 홀로 죽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힘들어한다.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돌봄 노동. 이는 그렇게 애틋하고 따듯한 일이 아니다. 현실에서 마주한 돌봄은 말 그대로 노동이 될 수 있다.

 

감사와 사랑, 배려가 오가도 힘겨울 문제인데 의무와 책임의 굴레로 이를 묶어버린다니 얼마나 가혹한가. 이처럼 비슷한 듯 각기 다른 삶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다양한 여성 3명의 이야기는 굉장히 생생한 문장으로 전달돼 몰입도를 높인다. 작가는 실제로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20년간 간병해온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살에 와 닿는 스토리텔링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 삶을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니 더욱 먹먹했다.

 

*

 

그렇다면 여성 문제에서 나아가, 가족에 대한 돌봄 노동은 근본적으로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책은 '장녀들'을 조망하긴 하지만 돌봄 문제가 온전히 해결되기 위해선 더 거시적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함을 암시한다. 여성에 대한 인식이 가족 구성원 내에서,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변해가야 함은 맞지만 이와 별개로 초고령 사회가 도래한 지금 돌봄 노동은 필수불가결한 고려 사항이기 때문이다. 굳이 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약하고 나이들어가는 자신을 보살펴줄 사람을 찾아야 하며, 누군가는 그러한 가족을 보살펴야 하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

 

사실 책 <장녀들>은 무척 사적인 이야기에 집중한다. 돌봄 노동에 대한 한 개인의 선택과 결정을 보여줄 뿐, 그 이상을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들을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마음 쓰는 그녀들을 지켜보노라면 이 문제는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현대를 살아가는 모두의 고민이며, 고령 사회가 가진 가장 큰 숙제다. 아주 사적인 개인의 삶과 선택을 통해 오히려 거대한 사회의 모습과 가치 충돌을 읽어볼 수 있었던 책 <장녀들>. 모든 사람들은 늙었거나 늙어가고 있는, 혹은 늙음을 케어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책은 이런 현실을 아주 서늘하게 깨우치도록 만든다.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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