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슬픔과 눈물, 피로 쓴 빛의 여로

글 입력 2020.06.29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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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슬픔과 눈물, 피로 쓴 빛의 여로


 

유진 오닐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밤으로의 긴 여로’는 작가 자신의 특수한 가족사를 여과 없이 담음과 동시에 세대와 국경을 아우르는 근원적인 감정들을 직조해내었기에 경탄과 공감을 이끌었다. 읽는 동안 코네티컷에 위치한 별장에서 분노하고 울부짖는 네 명의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감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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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질수록 안개가 짙어져 사위는 희미해지지만 오닐의 가족이 서로에게 품은 악의는 점점 더 날카롭게 드러난다. 그들을 보며 불가피하게 떠오른 파편은 나를 침울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잠깐 상기해도 괴로운 기억들을 유진 오닐은 한데 모아 조립했고 수시로 마주 보며 글을 썼다. 그렇게도 아파하면서까지 글을 쓰려 했던 유진 오닐의 마음이 도통 와닿지 않아 그를 헤아리려 애썼던 나날을 지나, 오늘에서야 고통으로 가득해 보였던 여로에서 단단한 용기와 따뜻함을 보았다.

 

(앞을 응시하며) 전 안개 속에 있고 싶었어요. 정원을 반만 내려가도 이 집은 보이지 않죠. 여기에 집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거죠. 이 동네 다른 집들도요. 지척을 구분할 수가 없었어요. 아무도 만나지 않았죠.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들렸어요. 그대로인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로 제가 원하던 거였죠.-160쪽

 

오닐은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가족들의 만행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는다. 오닐을 낳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던 어머니의 떨리는 음성에서 외로움과 상실의 역사를 보고 모든 것을 망쳐버린 아버지의 인색함에서 가난했기에 무력했던 과거가 만든 강박을 발견한다. 그렇게 써 내려간 여로의 끝에서 오닐은 가족을 이해하고 용서했으며 결국 여로를 완성한다.

 

그의 회귀가 절망으로 머물지 않고 용서에 이를 수 있었던 이유에는 어떻게든 가족을 이해하려 했던 오닐의 따뜻함에 덧붙여, 이토록 어려운 과정을 해내게 한 치유로서의 글쓰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닐만이 할 수 있었던 용서였고 글쓰기였기 때문에 완수할 수 있었다.

 

운명이 저렇게 만든 거지 저 아이 탓은 아닐 거야. 사람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운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써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게 만들지.

 

[곽성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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