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안톤 체호프 '갈매기'의 우아한 영화화 [영화]

글 입력 2020.06.21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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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의 막이 올라가고, 성공한 여배우 이리나는 애인이자 유명 소설가인 보리스와 이웃들과 함께 아들의 연극을 보러 간다. 이리나의 아들 콘스탄틴은 25살 작가 지망생이며 그의 아름다운 연인 니나가 배우를 맡는다. 어머니 이리나의 질투와 트집으로 연극은 망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니나와 보리스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갈매기>는 체호프의 희곡<갈매기>를 영화화한 작품으로써 내용과 형식을 거의 그대로 옮겨 놓았다. 영화를 논하기 전, 희곡 <갈매기>를 먼저 이야기하자면, 이 극은 안톤 체호프 문학의 정수가 담겨있는 작품이다. 작품 속에는 연극을 쓰는 작가와 연극배우가 나오고 극 중 다른 인물들도 연극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논한다. 극 자체가 연극에 대한 연극인 것이다. 연극은 일반적으로 극적인 하나의 사건과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지만 <갈매기>에는 하나의 사건이나 인물을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작중 모든 인물들의 이야기를 고르게 다루고, 작은 갈등과 사건들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마지막에 터지는 비극을 완성시킨다. 형식적 측면에서 이 작품은 당시 연극의 기존 형식에 '반反'하는 작품이었다.

 

 

 

1. 덧없는 인생과 갈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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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의 작품들은 알싸하고 씁쓸하다. 체호프는 유명 작가로 성공한 자신의 인생에 큰 회의감을 느꼈던 걸까. 몇몇 그의 작품, 특히나 그의 말년에 쓴 작품들에서 (죽기 전 쓴 단편 <추기경>이 대표적) 이런 주제가 더욱 두드러진다. 그의 이야기가 쓰라리고 이토록 슬픈 이유는 아마, 곧 사라질 인간존재의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일 것이다.

  

체호프는 쓰디쓴 현실을 그저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건 관객(혹은 독자)의 몫으로 돌린다.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갈망한다. 여러 종류의 사랑이 나오지만 실제로 사랑을 이루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꿈을 꾸던 청춘들은 현실의 고통을 맛보고 그토록 비난하던 기성세대의 형식을 닮아간다. 유일하게 이득을 취한 것처럼 보이는 인물은 이미 성공한 여배우 이리나와 작가 보리스. 보리스는 니나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취하고 이리나는 보리스를 붙잡아 두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들은 주체적이지 못하고 껍데기만 남은 '마비된'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다. 기성세대는 성공을 무기 삼아 젊은이들의 재능을 착취하고 마음껏 깎아내린다. 청춘을 위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인격을 뽐내려는 의사 도린은 아프다고 하는 사람에게 신경안정제를 처방하고 이리나는 자신의 서글픔을 감추기 위해 교묘한 방법으로 남에게 상처를 준다. 늙은 소린의 말처럼 기성세대는 죽은 나무처럼 뻣뻣하다. 그 반면 젊은 콘스탄틴과 니나는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각자의 욕망을 열정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한다. 실로 열정과 패기가 넘치는, 어찌 보면 순수하고 어리석은 청춘 그 자체다. 하지만 체호프는 이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는 청춘들에게 잔인한 현실을 깨닫게 한다. “인생은 성공이나 명예 따위를 쫓는 게 아니라 그저 견디는 것뿐"이라는 니나의 대사처럼 삶은 그저 버텨내는 것이다. 매혹적인 호수에 끌려 그 주위를 계속 맴돌던  갈매기, 니나와 콘스탄틴은 결국 총에 맞아 죽는다. 니나의 대사가 가슴 아프게 울려댄다.

 

 

난 갈매기예요. 아니에요.

난 배우예요. 그래, 맞아요!

 

- 니나

 


 

2. 연극과 영화의 비교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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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갈매기>는 원작의 스토리와 특성을 그대로 살리되 영화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 풍성함을 더했다. 가령, 제한된 연극 무대는 아름다운 영화적 배경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고, 희곡에서 다 표현할 수 없었던 미묘한 감정 선은 클로즈업 화면으로 이어나간다. 그 외에 원작 희곡과 다른 점은 영화는 희곡의 4막, 이리나와 보리스가 소린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골 저택에 돌아와 사람들과 재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마지막 막을 앞에 배치하면서 궁금증을 유발함은 물론 수미상관의 효과, 인생의 덧없는 순환적 메시지까지 포함시킨다.

 

하지만 영화와 희곡의 차이점 중에 무엇보다 눈에 띄는 점은, 이리나의 감정이 영화에서는 더 두드러지게 표현된다는 점이다. 젊음에 대한 동경의 시선,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더욱 화려하게 포장하는 이리나에게 동정을 느끼게 하면서, 동시에 이기적인 그녀에게 분노를 유발케 한다. 경멸하면서도 묘하게 이 캐릭터를 보면 슬퍼지는 이유는 배우 아네트 베닝의 뛰어난 연기력은 물론, 이리나처럼 저물어갈 우리 자신에게 동정심을 느껴서가 아닐까.

 

*

 

<갈매기>는 비극이다. 체호프는 이 극을 'comedy'라 명시했지만 김영하 작가가 말하길, 관객이 작품을 비극이라 느낀다면 극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비극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 극이 비극적인 이유는 우리의 인생이 (작가의 생각대로라면) 비극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매혹적인 호수에서 빠져나와 멀리 비상하는 갈매기는 인생의 고통을 버텨낼 것이다. 그 끝에는 분명 행복이 있을 거란 희망. 그 희망으로 살아내는 것이 또 우리의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백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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