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상처'받을' 캐릭터를 위한 가이드 : 트라우마 사전 [도서]

글 입력 2020.06.08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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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의 붕괴, 산을 타는 이야기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이미 쓴 것과 아직 쓰지 않은 것 사이의 끝없는 되먹임 과정이다. 이미 쓰여진 것들이 앞으로 쓰여질 것들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라 하더라도 이미 쓴 것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소설은, 소설 속의 인물은 손님처럼 찾아와 서서히 작가를 지배한다. 소설을 시작할 때 100의 자율성을 갖고 있던 작가는 마지막 문장을 쓸 때는 0의 자율성을 갖는다. 작가는 이미 쓴 문장에 위배되는 그 어떤 문장도 쓸 수 없는 존재다.

 

–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메이킹 스토리 중 발췌

 

*

 

어떤 작가는 자신이 만든 캐릭터를 ‘붕괴’시키고, 잘 가던 이야기를 먼 곳으로 ‘등산’ 보낸다. 그럴 때마다 고통은 늘 독자의, 시청자의 몫이다. 붕괴가 아니고, 산 탄 게 아니고, 그냥 창조주인 작가의 ‘마음’ 아니겠냐고? 아니,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작가의 자율성, 다시 말해 작가의 전지전능함이란 것은 이야기의 끝으로 갈수록 그 힘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작가의 손에서 태어난 수많은 문장과 장면, 그것들은 논리적인 구조가 되어 작품을 떠받친다. 이 단단한 누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 캐릭터나 작가나 매한가지다. 그 논리적 구조는 다른 말로 하면 바로 ‘맥락’이다.

 

작가는 자신이 쓴 맥락을 무시할 수 없다. 이미 쓴 것을 배반하며 제멋대로 캐릭터를 움직일 수 없으며, 앞서 천명한 주제의식과 전혀 다른 결말로 쉽게 안착할 수 없다. 혼자 쓰고 혼자 읽는다면 모를까. 독자와 시청자를 상정한 이야기에선 쉬이 용납되지 않는다. <부부의 세계>의 이태오가 돌연 세상에 둘도 없는 순정남으로 탈바꿈될 순 없고,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갑자기 ‘감빵 속 인간사'로 메시지를 옮길 수 없는 이유다.

 

작가는 캐릭터와 배경, 상황, 사건 등을 통해 '맥락'을 만들어가고, 그렇게 이야기는 단단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 나간다. 이 단단한 논리로 만들어진 작품의 윤곽. 그것을 벗어나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때, 우린 캐릭터가 ‘붕괴’됐다고 말하고, 이야기가 ‘산 탄다’고 말하는 것이다.

 

 

 

상처로 심연 비추기


 

그렇담 ‘맥락’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트라우마 사전』의 저자진은 맥락을 “우리의 인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각자 살고 있는 1분 1초에는 맥락이 없다. 괴로운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은 긴 시간 지하철을 타고, 공과금을 처리하는 "지루한" 일들을 이어 나간다. 하지만 이야기의 세계에선 다르다. 이야기는 선택과 배제를 통해 현실을 재구조화하며, 특정한 맥락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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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맥락'에 있어 주요하게 기능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캐릭터의 상처다. 우리가 품고 있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미치듯, 캐릭터 내면의 상처도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모든 이야기가 상처를 가진 캐릭터를 내세우는 건 아니다. 상처가 큰 사건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현실을 반영하는바. 우리가 생채기 난 내면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듯, 많은 이야기는 상처를 가진 인물의 "내적 여행"에 집중하곤 한다. 그가 그것을 극복하는지, 하지 못하는지, 그게 인물의 성공과 사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어떤 방향과 방식으로 나아가는지를 면밀히 좇는 것이다.

 

『트라우마 사전』은 이런 이야기를 위한 '사전'이다. 트라우마를 가진 캐릭터로 이야기를 전개시킬 때, 작가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밝히고, 이야기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목록화했다. 저자진은 이렇게 밝힌다. "과거에 입은 감정적 상처를 잘 검토"함으로써, 캐릭터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캐릭터가 특정한 상처를 받으면, 그것에서 두려움이 생겨난다. 이 두려움으로 인해 감정적 보호막이 생기고, 그것은 결국 결핍된 욕구로 이어진다. 이 상처의 메커니즘은 곧 이야기의 주제, 혹은 캐릭터의 서사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상처받을 캐릭터를 위한 가이드


 

『트라우마 사전』은 어린 시절의 상처부터, 예기치 못한 불상사와 실패, 범죄 피해 등까지 폭넓은 상처를 다룬다. 이를 항목별로 정리했고, 항목 하위의 상처는 다시 가나다순으로 정렬했다.

 

각각의 챕터에선 캐릭터 빌딩부터 극복 가능성까지를 차례로 살핀다. 먼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구체적 상황을 제시하고, 이로 인해 어떤 욕구가 훼손되었는지, 그래서 어떤 잘못된 믿음과 두려움을 가질 수 있는지를 밝힌다. 이어 이것이 캐릭터에게 어떤 반응과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지와 어떤 성격과 특성으로 구체화되는지를 제시하고, 마지막으론 상처를 악화할 수 있는 계기와 직면하고 극복할 기회까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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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실 치사' 일부 갈무리.

 

 

세부 항목은 여러 가능성으로 열려있다. 상황의 다양함. 그리고 각 캐릭터마다, 설정마다 달라질 수 있는 반응과 결과를 열거한 것이다. 가령, '과실 치사' 챕터에서는 구체적 상황을 10개 이상 제시하면서, '지나칠 정도로 대비한다'와 '위험한 일을 감수한다'를 모두 가능한 반응으로 포함시켰다.

 

어떤 캐릭터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상처를 입었느냐 하는 디테일에 따라, 캐릭터는 강박적으로 위험을 피할 수도, 죄책감에 의해 위험을 자초할 수도 있다. 이는 작가가 어떤 '맥락'을 만들어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수많은 사전이 그러하듯, 『트라우마 사전』의 역할도 길잡이에 그친다. 100의 전지전능함이 0이란 답으로 나아가는 여정. 그 여정의 길잡이. 그래서 여기엔 '무엇을 이야기할지'에 대한 답은 없다. 캐릭터를 통해 말하려는 것이 휴머니즘인지, 로맨스인지, 영웅담인지, 운명 개척인지, 혹은 이 캐릭터가 악역인지, 조연인지도 우린 모른다. 당연히도 이는 작가의 몫이다.

 

이 책이 주는 건 상처 '받을' 캐릭터를 위한 가이딩 뿐, 어떤 캐릭터를 가지고 어떤 길을 만들지는 활용하기 나름인 거다. 하지만 이 가이드 안에 잠재된 수많은 이야기들을 기다려볼 순 있을 테다. 그렇게 만들어진 단단한 맥락이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 어떤 그림을 그려낼지, '붕괴'와 '등산'이라는 상처를 다신 겪고 싶지 않은 독자로선 자연히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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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사전
- 작가를 위한 캐릭터 창조 가이드 -


지은이
안젤라 애커만, 베카 푸글리시
 
옮긴이 : 임상훈

출판사 : 윌북

분야
글쓰기, 창작 작법

규격
152*220mm

쪽 수 : 508쪽

발행일
2020년 04월 20일

정가 : 22,000원

ISBN
979-11-5581-266-2 (03600)
 



[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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