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엄마에게 필요했을 솔질에 대하여 [영화]

한강의 시와 영화 <툴리>
글 입력 2020.06.03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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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한강, 괜찮아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중 ‘괜찮아’라는 시. 영화 <툴리>를 보면 이 시가 떠오른다.

 

 
 영화는 평화로운 음악과 햇살, 그리고 엄마 마를로가 아들 조나의 피부에 ‘솔질’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를로는 원래 저런 사람인가?
  따뜻했던 첫 장면이 무색하게, 영화의 색은 무채색으로 훅 돌변한다. 주인공 마를로는 어딘가 유약해 보이는 남편 ‘드류’와 함께 살고, 끊임없이 소리 지르는 아들과 시크한 큰딸 사이에서 육아전쟁을 치르고 있는 평범한 주부이다. 좀 특별한 게 있다면 셋째를 출산하기 직전이라는 것인데 그 때문인지 영화 초반 마를로는 상당히 날카롭고 시니컬한 모습을 보인다. 자신을 꽤 따뜻하게 챙겨주는 오빠네 부부에게도 독설을 서슴지 않거나 아들 ‘조나’(영화 속 조나는 불안하거나 뜻대로 안 될 때 계속해서 반복적인 행동을 하는데 이는 자폐아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상동행동’으로 추측해볼 수 있었다.)의 유치원 선생님의 면전에서 욕을 쏟아붓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마를로는 원래부터 저렇게 성격이 신경질적이고 예민했던 걸까? 영화를 보며 드는 의문에 마를로의 오빠가 대신 대답해준다.
 
“동생을 몇 년 전에 잃어버린 기분이야. 전처럼 생기도 없고.”

  마를로는 원래 그랬던 게 아니라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전형적인 산후 우울증의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셋째가 태어나고 ‘평범한’ 육아의 모습을 카메라가 반복적으로 비추면서 관객은 왜 마를로가 그렇게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는지 함께 느껴간다. 아이의 울음을 배경음악으로 마를로의 기저귀 갈기, 분유 먹이기, 잠재우기의 무한 반복을 보고 있자면 마를로가 우울해지는 과정이 바로 납득되기 때문이다. 와중에 무력하고 평범한 남편의 짧은 입맞춤으로 시작되고 끝나는 시퀀스는 마를로와 남편의 대비되는 모습을 부각해 실소가 나오게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울해지기 전 마를로의 본래 모습은 어떠했을까? 영화는 아래와 같은 과정들을 거쳐 마를로의 본질이 어땠는지 천천히 보여준다.
    
돌보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
  처음에는 아이들을 혼자서도 잘 돌볼 수 있다는 자존심 때문인지, 오빠네 부부의 ‘야간 보모’ 제안을 거절하던 마를로였지만 조지의 유치원에 욕을 퍼붓고 돌아온 날 그녀는 결국 야간 보모를 쓰기로 결정한다.
  처음 만난 야간 보모 ‘툴리’의 첫인상은 ‘희한하다.’는 것이었다. 툴리는 첫 등장부터 마를로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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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엄마를 돌봐드리러 왔어요.”
 
  아이라곤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인상에 이상한 말만 늘어놓는 아주 젊은 보모를 마를로는 희한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후 처음으로 푹 자본 그녀는 다음 날 우렁각시라도 왔다 간 마냥 완전히 깨끗해져 있는 집을 보며 희한하지만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고 생각한다.
 
“다시 색깔을 보게 된 기분이야.”

  남편과 나눈 대화의 한 문장은, 앞서 마를로의 오빠가 그녀를 묘사하던 것과는 확연히 대비된다. 단지 야간 시간 동안만의 육아와 가사에서 벗어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영화를 보며 나는 문득 나의 할머니가 떠올랐다. 복층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던 때의 어느 날이었다. 홀로 계단 난간을 닦고 계셨는데 자세히 보니 한 계단 한 계단 오르실 때마다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내몰리듯 ‘엄마’가 된 후 누구에게도 돌봐지지도, 누군가에게 돌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도 없는 팔십 평생의 할머니 인생이 그 눈물에 녹아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이야 –물론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산모의 정신 건강을 꽤 조명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는 일이 긍정적으로 여겨지지만 할머니 세대에는 그런 일들이 먹고살기 바쁜 세상에 사치스럽게 느껴졌으리라. 세상의 할머니할아버지 세대들에게 ‘툴리’가 허락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었다.
 
엄마는 어른인데도 새로운 일은 늘 겁나
  툴리가 등장한 후로 마를로는 방어적이었던 모습을 버리고 점차 활기차지고 솔직해진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을 치고 간 대사가 있었다. 아들 조지의 문제행동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유치원에 그를 데리고 가는 장면이었다.
 
엄마는 어른인데도 새로운 일은 늘 겁나.

  사실 내 또래 대부분의 자녀들은, 엄마에 대해 양가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엄마에 대한 애정과 원망…. 특히 첫째들, 그리고 딸의 경우, ‘엄마도 처음인 엄마’를 감당하느라 겪게 된 수많은 시행착오들 속에서 알게 모르게 상처 받아왔다는 이야기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모든 게 새로워서 두려웠을 엄마의 심정을 마를로의 입으로 전해 듣고 나니 나의 젊었던 엄마를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엄마도 새로 시작하는 일들이 많이 무서웠겠구나.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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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와 엄마가 함께 하는 나뭇잎 털기 게임 장면.

  영화는 (아마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세간의 ‘엄마’를 향한 높은 기준과 암묵적인 검열을 곳곳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녹여내기도 한다.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는 마를로가 임신 중에 가서 디카페인 머핀을 시켜먹을 때, 디카페인에도 소량의 카페인이 들어있다고 눈치를 주던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 사실 특수교육학개론을 배워 임신 중의 섭취가 얼마나 태아에게 영향을 주는지 들은 적이 있어서인지 나 역시 영화 속 주변 사람들의 시선 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왔는데, 나에겐 배려라고 생각했던 일이 사실은 산모를 한 명의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다기보다는 ‘아이의 집’으로 먼저 생각하고 있다는 반증은 아니었는가, 뼈저린 반성을 하게 되었다.
 
  또 영화에서 마를로는 틈만 나면 무력하게 앉아 포르노를 시청하는데 이 역시 여성으로서의 삶이 아닌 엄마로서의 삶에만 맞춰오던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무의식적 저항은 아니었나 생각된다. 실제로 툴리는 그러한 마를로의 성적 본능을 계속해서 일깨워주고자 하며 심지어 코스튬을 한 채 남편 드류의 침실에 함께 들어가기도 한다.(!) (할리우드의 세계란 참으로 열려있구나 감탄했으나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되면 그것이 나의 오해였음을 알게 된다.)

아무도 싫어하지 않아
  영화에 드러난 사소한 오해들을 잡아내는 것도 재미있는 관람 포인트였다. 극 중에는 마를로의 오빠와 마를로의 남편이 서로 “그는 날 싫어하잖아.”하고 오해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서로 싫어하지 않는다. 단지 오해하고 있었을 뿐이다. 마를로 역시 조나의 선생님과 서로 갈등하며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하잖아.’라고 말하지만 관객들은 그들이 사실은 서로를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나 역시 영화 초반, 마를로는 원래 저렇게 어둡고 시니컬한 사람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툴리를 만나며 변화하는 과정을 보고 그것이 오해였음을 알게 된다. 오해하고 풀리는 과정의 재미가 있는 영화였다.
    
다시 브루클린으로!
  마를로는 툴리를 만나 가사로부터 해방되어 생기를 찾다가 급기야 다시 고향 브루클린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그녀는 술에 취해 영화 초반에 잠깐 등장했던 ‘바이올렛’을 애타게 찾는데, 바이올렛이 마를로가 끊임없이 언급하는 ‘룸메이트’였다는 것과 또 브루클린의 술집에서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봐서는 과거에 연인 사이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그 사실은 꽤 충격적이었는데 그녀가 레즈비언이었어서라기 보다는 평범한 줄 알았던 ‘엄마’에게 그런 반전 과거가 있어서였던 것 같다.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평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장치였다.

마를로의 본질, 툴리 그리고 인어
  마를로가 점점 생기로워져 갈수록 툴리는 점점 빛을 잃어만 간다. 왜 이런 대비가 있는 걸까 싶던 순간 툴리는 갑자기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관객들은 충격적인 반전을 마주한다.
 
  툴리와 마를로는 브루클린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사고를 당하고 툴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남편과 진료 접수원의 대화에서 우리는 마를로의 결혼 전 성이 ‘툴리’였음을 알게 된다. 즉 툴리는 마를로가 소환해낸 과거의 자신이었던 것이다.
 
  사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미니언즈 머핀 등을 포함해서 이와 같은 반전을 암시하는 수많은 힌트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것은 브루클린 술집에서 툴리의 비유를 꼽을 수 있겠다. 툴리는 인간의 신체를 배에 빗대어 표현한다. 부품이 전부 바뀌면 그 배는 예전의 그 배인가 아니면 새로운 배인가? 이것에 대해 툴리는 같은 배라고 한다. 즉 세포가 아무리 바뀌었어도 당신과 나는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자유분방하고 희한한 툴리가 사실은 염세적이고 회의적인 마를로 속에 살아있다는 메시지이다. 더 나아가 해석해보자면 엄마의 세포를 간직하고 있는 아이 역시 엄마와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확대되기도 한다. ‘순환’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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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영화에서는 내내 ‘인어’가 등장하는데, 티비 속 화면이나 마를로의 꿈속, 또 마를로가 차 사고로 물에 빠졌을 때 보게 된 환상에서 인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자꾸 인어가 등장하는 걸까 궁금해질 때쯤 마지막으로 등장한 인어의 얼굴이 비춰지는데 다름 아닌 툴리의 얼굴이었다. 즉, 잡고 싶은 자기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을 인어에 빗댄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마를로가 얼마나 인어와 같은 존재를 바라는 절박한 심경이었는지를 나타내 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엄마의 솔질
  영화는 시작과 끝을 모두 솔질로 열고 닫는 수미상관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솔질의 의미가 무엇일까 오래 생각하며 영화를 보아야 했다.
  먼저 표면상의 의미는 마를로와 툴리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서가 불안한 조나를 위해 마를로가 유튜브에서 독학한 심리 안정 기법인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할 정도면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솔질과 비슷한 장치들이 몇 가지 등장하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우선 ‘레고’였다. 영화 초반에 아이를 안고 육아전쟁을 치르던 마를로가 아무렇게나 어질러져 있는 레고를 밟고 괴로워하는 장면이 있는데 툴리의 등장 이후 마를로는 그 레고는 쌓아 올리며 조나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데에 그것을 쓴다.
  두 번째로는 나뭇잎 털기 게임이다. 새로 전학 간 조나의 유치원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가 온몸의 긴장을 푸는 방법으로 조나에게 나뭇잎 털기 게임을 알려주는데 그때 옆에 있던 마를로도 함께 그 게임에 동참한다. 당시에 셋째까지 안고 있던 무거운 몸이라 굳이 저걸 같이 따라 한다고...?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조나만큼이나 엄마 마를로도 나뭇잎처럼 떨치고 싶은 긴장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앞서 살펴본 레고나 나뭇잎 털기 게임과 같이 조나에게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들이 마를로에게도 필요했던 것처럼, 솔질은 조나에게 보다도 마를로 본인에게 더 필요했던 것이다. ‘솔질’은 결국 조지를 향한 것이 아닌 처음 엄마로 맞는 모든 상황에서 느낀 부담감과 긴장감을 해소시켜 줄 본인 자신을 위한 위로의 행위로 해석되었다.
 
  조나는 마침내 “엄마 나 이제 이거 안 해도 괜찮을 것 같아.”라며 솔질을 졸업한다. 영화 내내 마를로는 변화하고 또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나의 솔질 종식 선언은 마를로의 심리적 해방의 의미로 느껴졌다. 동시에 이 솔질이 앞서 소개한 한강의 시에서 반복된 ‘괜찮아’라는 안도의 말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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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하나 없는 전쟁터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참 좋았던 것은 ‘악역이 없는’ 전쟁터의 현장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뽀뽀 말고는 하는 게 없는 남편을 보고 화가 날 수도 있지만 나름 성실히 일하고 가정에 충실한 보통의 가장의 얼굴을 한 그가 ‘죽일 놈’인가? 묻자면 그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개인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독박육아라는 기이한 시스템에서 파생되는 상황만을 덤덤하게 서술함으로써 개인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지기보다는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이 영화는 잔잔하고 환상적인 기법을 사용해서 전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함께 따뜻하게
  영화의 엔딩은 툴리가 떠난 자리에 남편 드류가 들어오고, 드류와 마를로가 이어폰을 한 쪽 씩 나눠 끼며 동등하게 요리를 하는 장면들로 장식된다. 더 이상 가사를 ‘돕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툴리는 더 이상 없지만 이제 그 빈자리를 드류가 알차게 메꿀 것이란 사실을 관객들은 흐뭇하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따뜻한 결말들을 이끌어 낸 데에는 미혼모의 애환을 유쾌하고 따뜻하게 그려낸 영화 <주노>를 제작한 감독 ‘제이슨 라이트만’과 각본가 ‘디아블로 코디’등 <주노> 제작진의 재회도 한 몫 했다고 본다.
 
1가구 1툴리 보급 시급
  이 영화를 모든 가정이 (특히 예비 엄마아빠) 필수 코스로 보았으면 좋겠다. 강요하지 않고, 성별 갈등을 야기시키지도 않으면서 아주 부드럽게 육아와 가사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킨다. 영화를 보고 기왕이면 모든 아빠들이 툴리를 자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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