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명함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영화]

어른의 세계에서 나 홀로 동심
글 입력 2020.05.25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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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았던 때가 언제였더라. 아마 초등학교 3학년 때일 것이다. 나이가 두 자리수가 되면서 '나도 이제 어른이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산타클로스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고 그것의 '실현 가능성'을 생각했다. 아빠가 산타클로스라는 걸 알았을 땐, 실망감도 들었지만 "역시나! 그럴 줄 알았어!"라며 어른스러운 척을 했다. 이후로 계속 어른스러운 척을 해왔다. 그 시절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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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린왕자>는 단순한 영화다. 어른에게 잊었던 동심을 되찾아주자, 라는 단순한 주제로 아름다운 영상미와 감미롭게 샹송이 흐른다. 할아버지와 소녀의 케미스트리 역시 귀엽고 아기자기하다.


엄마가 세워 준 계획대로 살고 있던 소녀는 비행기 조종사였던 이웃집 할아버지를 만나며 점차 동심을 알아간다. 계획을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아버지와 놀던 소녀는 할아버지가 만났던 '어린 왕자'이야기에 푹 빠져든다. 할아버지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중, 할아버지는 소녀에게 자신이 어린왕자처럼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린다. 소녀는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어린왕자를 찾아 나선다.


어쩌면 뻔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영화가 오래토록 기억에 남는 이유는 '취준생'에게 동심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가치를 다시금 새겨줬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발생으로 많은 취준생들이 눈물을 흘렸다. 좁던 채용문은 이제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고, 채용 취소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승무원을 준비하는 지인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쪽 시장은 암담했다. 올해는 그냥 날려야 하는 수준이었다. 2020년에는 꼭 취업하겠다고 다짐하며 서울에 올라왔는데,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나 역시 상경하고 바로 코로나19가 터져 눈물 흘리는 취준생 중 하나다. 하고 싶은 것은 잊은 지 오래다. 등본을 떼면 나 혼자 나온다. 말 그대로 가장이다. 일단 내 앞가림, 내 입부터 채워야 꿈을 좇든 동심을 찾든 할테다. 당장 10만원이 아쉬워서 근로자의 날에도 자진해서 근무하던 내게 꿈, 동심은 너무도 먼 얘기였다.


돈은 내게 전부였고, 사람은 돈을 벌며 쓸모를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과 얘기할 땐 항상 "모든 사람은 존중 받아야 해"라고 했던 내가 궁색해지자 편협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그토록 싫어하던 '이게 옳아, 이게 어른이야'라고 박박 우기는 어른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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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에선 모든 계획을 세워주는 엄마가 등장한다. 10분 단위로 계획을 세워 최종적으론 인생 마지막까지 계획해 주는 엄마가 내게도 있다. 바로, 세상이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강요한다. '이렇게 살아야 해!' 아마 취준생이라면 모두가 느끼지 않을까. 집에서 눈치를 주지 않아도 눈치를 보고, 친구들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위축된다.


직장인 친구들의 푸념이 마냥 부럽게만 느껴지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쓸모가 없는 것 같다. 아무도 내게 강요하지 않았는데, 나는 언제부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천천히 사회에 젖어들어 결국 어린왕자에서 Mr. 프린스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비행기 조종사를 떠난 어린왕자는 어른들의 세계에 붙잡혀 개조를 당한 후, Mr. 프린스가 되어 굴뚝 청소를 한다. '쓸 데 없는 말 걸지 마. 나 지금 바빠. 일해야 해'라는 말을 달고 살며 어떻게든 사장에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 보이려 한다. 실수하면 마치 세상이 끝난 것 마냥 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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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이 없으면 나를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난 어떤 사람이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고, 장차 꿈은 무엇인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명함이 없다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효율을 중요시하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명함은 이러한 수많은 대화거리를 명함으로 압축해 버린다.


그런 명함이 없는 취준생은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나 이렇게 쓸모 있어요!' 증명하지 못하면 탈락하는 사회에서 뭐라도 해야 한다. 유튜브 하나를 하더라도 취업에 도움이 되는 영상을 보거나 업로드한다.


나중에 포트폴리오로 쓰일 수 있도록 개인계정을 관리한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다들 그렇게 사니까, 라는 말로 스스로를 등 떠밀며 살아간다. 그런데 모두가 같은 걸 바라게 되면 다른 길에 서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 사실 그 길이라는 게 정말 분명하게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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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준생이 무슨 연기야'하며 연기 수업을 갈까 말까 고민했었다. 이 나이에 무슨..... 하며 몇 번을 망설였다. 몇 번의 고민 끝에 찾아간 연기 수업에서는 진지하게 자신의 꿈에 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 배우 할래요!"라는 말을 어렸을 적 치기라고 생각하지 않고 끝까지 가져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연기로 돈을 벌지 못한다고 나는 그들을 업신여길 텐가, 불가능했다. 순수한 열정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한 번도 꿈을 좇아 본 적이 없었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고, 적성에 맞춰서 꿈을 찾았다. 이 글을 쓰기 좀 전까지만 해도 채용공고를 뒤적이고 있었다. 적당히 잘 어울릴 만한 직업, 돈도 적당히 벌 수 있는 직업. 에디터면 적당하지 않을까, 했던 안일한 마음이 26살 김명재를 채웠다. 안일하게 살기엔 너무 젊지 않나, 사랑하기에 충분한 나이지 않나.


<어린왕자>에서 끝까지 꿈을 잃지 않은 사람은 결국 파일럿 할아버지다. 마을에 있는 주민들의 눈총을 받고 외로워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다. 비행기 시동을 켜서 4번이나 경찰에게 경고를 받아도 하늘을 날고 싶다. 친구와 함께.


아마도 나는 할아버지처럼은 못살 것 같다. 영화 한 편 보고 "그래, 꿈을 찾자!"라는 마음이 들었으면 처음부터 이렇게 살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할아버지의 순수한 열망에 조금은 마음이 동했다. 가끔은 별을 보자고, 취준생이란 신분이 아무것도 증명해 주지 못할 지언정 김명재는 무엇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너 언제 취업하려 그래? 라는 말엔 '언젠가는 되겠지'라고 웃으며 대꾸해주기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친구를 사귈 마음의 여유 정도는 항상 남겨두자고.

 


[김명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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