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야기를 수놓고 떠나다,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도서]

글 입력 2020.05.15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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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투’를 주제로 이야기를 써보라고 하면 어떤 이야기를 내놓아야 할까? 그에 대한 답으로,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 나를 지켜주는 수호동물 같은 소재를 제안한다면 그다지 참신하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지나치게 장르문학에 치우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구병모 작가는 이같은 모험적인 소재를, 전작들이 그랬듯이 또 한 번 아름답게 풀어냈다.

 

구병모 작가가 그려내는 판타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가장 돋보인다. 뭔가 한 발짝만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금방 세간에 들킬 것만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등장하나 그들은 가장 평범한 인물들에 의해서만 발견된다.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에서도 문신에 깃든 신묘함을 알아채는 건 평범하디 평범한 중년의 직장 여성 ‘시미’이다. 그는 능력 면에서도 도덕 면에서도 특출나거나 튀는 점이라고는 없는 사람이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조금 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정도다.


그런 그가 직장 후배 ‘화인’의 타투에 이유도 모르게 매료되면서 수상쩍은 문신술사에게 직접 찾아가고, 화인과 얽힌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SNS를 통해 낯선 사람을 면담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정말로 나를 지켜줬어요. 제일 절박했던 순간에. 이러다 죽을 것 같았을 때.” (…)


“그리고 자기 일을 마치고 떠나갔어요.” - 105-106p


 

도저히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미제 사건으로 남겨진 몇 개의 사건들이 이야기의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데, 공통점은 피해자들의 신체에 타투가 새겨져 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에 화인에 의해 밝혀지지만, 중반쯤 오면 독자 역시 그들의 타투와 사건의 관계성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 상사, 전 애인이 폭력을 가하는 순간에 실체를 보이며 주인을 지키고 떠나간다는 설정은 마치 《해리 포터 시리즈》의 ‘패트로누스’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몸에 잠시 머물렀다가 역할을 마치고 나면 사라진다는 점에서 수호 정령보다는 임시적 동반 관계 같은 느낌도 든다.



스스로가 빛나지 않는다면, 시미는 다만 몇 발자국 앞이나마 비추어줄 한 점의 빛을 보고 싶었다. 바라는 건 그뿐이었다. -148p


 

화인과 다른 피해자들의 절체절명의 순간에 목숨을 구해주고 떠나는 타투의 정령들은 어쩌면 그 누구보다 시미에게 필요한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주지 못했다는 빚이 결국 그를 아들과 멀어지게 만들었고, 시류를 따라잡으려고 노력할 여력이 없던 탓에 유행에서 뒤처져 버렸다는 자책감. 시미의 시점에서 그려진 세상은 어딘가 피해의식이 느껴진다. 계속해서 후회와 자책이 미지근하게 스며드는 와중에 마주하게 된 존재이기에 더욱 이 초현실적인 현상이 신비롭고 매혹적으로 느껴진 게 아닐까 싶다.

 

이 이야기가 유독 매혹적인 이유는 완급 조절 덕분이 아닐까 싶다. 전반에 깔려 있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긴장을 멈출 수 없게 하지만 극한까지 몰고 가는 건조함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물들의 의지와 믿음이 전해지면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시미가 드디어 두려워하던 타투를 몸에 새기고 밖으로 나서는 그 순간, 별 모양의 타투가 실제로 환하게 빛을 발하면서 실체화되는 장면은 너무나 영화적이고 아름다운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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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아가미》를 읽을 때도 느꼈던 점이지만, 그의 작품은 잘 만든 컬트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이 들게도 만든다. 숨 막히는 현실 속 세상이 흑백으로 그려진다면,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판타지적 요소만이 선명한 컬러로 나타나는 듯하다. 이 작품에서도 타투만이 그 뚜렷한 생동감을 자랑하면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책을 읽으면서도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 든다는 점에서 참으로 감각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몰입해서 읽었더라도 덮고 나면 머릿속에 오래 남지 않는 작품이 있는 반면, 제법 긴 여운을 남기면서 문득 문득 떠오르게 만드는 작품도 있게 마련이다.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는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생각보다 가볍게 읽히지만, 그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타투처럼 새겨놓고 떠나는 소설이다. 구병모 작가가 다음 작품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로 독자들을 매료시킬지 궁금해진다.



[한민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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