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싸움을 피하는 방법 - 지금 나는 어디에 ①

'개인'의 나
글 입력 2020.05.02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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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싸움닭

- 많이 들어본 방법이긴 한데, 긍정회로는 내 것이 아니었다

- 피했다고 생각해도 결국 마주쳤다

- 모두에게 필요한 여유  

- 실리추구형 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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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haimi Abdullah/Getty Images from Bleacher Report 

 

 


나는 싸움닭


어느 집단에 소속하게 되면 그 내부에서도 다시 무리가 지어지게 마련이다. 나는 그 사이에서 ‘어디에 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거나 기싸움을 한다거나 싸움의 방법과는 상관없이 그 어떤 것이든 갈등은 나를 피곤하게 한다.

나는 무던한 편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눈치가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란 걸 알아야 한다. 오히려 본인의 예민함을 다시 체크해보기를 권유한다. 그 정반대인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둔한 사람인 것이다.

‘무던하다’는 것과 ‘둔하다’의 차이를 알 필요가 있다. 무던함과 수더분함이, 둔함과 예리하지 못함이 결을 같이 하고 있다. 무던함도 세 가지로 나뉜다. 태생이 그러한 사람과 너무 많은 일을 겪다 보니 무뎌진 사람과 나와 같이 무던함을 갖추기 위해 부단히 애쓴 노력형이다. 살다 보면 화를 내는 내 모습에 실망하는 상황이 종종 찾아왔다. 해버린 말과 하지 못한 말 때문에 이불킥을 하며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싸움닭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한 번 싸운 사람과는 다신 말도 섞지 않았었다. 고등학생 때는 쉬는 시간,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 10분동안 말싸움을 하느라 열 받아서 온 몸이 덜덜 떨리는 상태로 수업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싸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도 꽤 있지만, 나는 그 때로 돌아가도 거진 다시 싸웠을 것이다.

눈물버튼이 있듯이 폭발버튼이 있다. 그 때로 돌아가도 다시 싸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뭐, 요즘엔 ‘발작버튼’이라고 비하해서 쓰기도 하더라. 내 스스로에게 그런 단어를 쓰고 싶지 않다.). 나의 폭발버튼은 불합리에 관한 것 또는 정도를 벗어난 것이다.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다. 그게 문제였다. 상대방 언행의 의도를 잘 알아채 버렸던 것이다. 거기다가 오지랖까지 넓었다. 그러니 많은 것들을 몸으로 박치기하고 다녔던 거다. 다행히도 화가 나도 울지는 않았다.

버튼을 누른 뒤의 일처리는 자동적이다. 나는 평생 활화산처럼 모든 일에 스트레스를 받고 싸우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화가 나는 걸 어쩌라고!”, “그러게 왜 날 화나게 만들어?” 등. 뭐 또 다행히도 내 탓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어쨌든, 내 시간이 아깝기 시작했다.
 
 

많이 들어본 방법이긴 한데, 긍정회로는 내 것이 아니었다


화는 한 순간에 나는 것이 아니라, 켜켜이 쌓여 폭발한다. 버튼이라고 한 순간에 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버튼에 손가락이 올라가기까지의 이야기가 있다. 내 버튼은 꽤 높이 있는 편이라서 손가락들이 등반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필요하다. 그럼에도 내가 쌈닭이 되어버렸던 건, 주변 시야가 넓은 탓이다. “눈에 보이는 데 어쩌라고!”.

가벼운 일에는 실눈을 뜨고 흐릿하게 보는 능력도 키워봤지만, 중요한 일 앞에 선 나는 여전히 주변 사물을 분간하지 못한 채로 소리를 질렀다. 이러다 화병으로 쓰러질 것 같아서 버튼에 연결된 전선들에 필터를 넣는 훈련을 했다. 지금의 나는 소위 긍정회로가 잘 돌아간다. 한가지의 액자에서 좋은 면을 먼저 찾아낸다. 다행히도.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기간이 아직은 훨씬 길다. 나는 태생이 이래서,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계발서들을 보면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모든 말들이 싫었다. 구원자의 시선과, 계몽주의의 선두에 서서 ‘너를 구해주리라!’하는 그 건방짐이 싫다. 그러기에 화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나는 화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나의 권리가 침해당했음은 알려야 마땅하다. 불합리를 왜 수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방식이 내 권리를 회복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지 많은 실험을 했다. 책을 포기한 결과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다. “책 속에는 길이 있다.”라는 말이 모든 책에 해당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책은 빅데이터이다. 빅데이터는 경험을 집대성해 아주 높은 확률로 정답을 예측한다. 소문으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려고 하는 내 가치관과 맞지 않는 것이 자기계발서다. 지식이 아닌 사람과 관련한 책은 소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지름길을 포기한 대가로 나는 실험에 이용했던 방법들을 적절히 섞어 쓰는 데 나름 능숙한 편이다. 만능키는 없었기 때문에 골라 쓰는 방법을 택했다. 지금은 “사회생활 얘처럼 해라!”라는 소리도 심심찮게 듣는다. 손해보지 않으면서 실속을 챙겨야 한다. 대신 손해를 상쇄시킬 방법에 긍정회로를 끼워 넣었다. 막연한 기대감은 상황에 대한 유기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순간의 손해를 장기적으로 치환하면 이득이 되는 경우가 꽤 많다. 이제는 나의 물질적 손해와 내가 도움을 받을 기회, 평판 등 물질적이지 않은 이득과도 연결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 사항들을 의식적으로 되짚어 보기 시작했고, 습관이 됐고, 자동화되어서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긍정회로가 내 것이 되었다. 최근에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으로 ‘오늘 하루 중 감사한 일 3가지를 써보세요!’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피했다고 생각해도 결국 마주쳤다


처음에는 내가 참 불쌍했다. 이렇게까지 안 좋은 생각을 애써 무시하는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의 우선순위를 뒤로 미루었을 뿐이다. 계속해서 이야기하지만, 나는 보이는 것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필터를 거친 생각들을 목소리로 말을 하고 다녔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취급을 받기 시작했고, 주변에도 밝은 기운의 사람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선순환이다.

반면에 내가 조절할 수 없는 관계들이 있다. 내가 실험했던 방법 중에 잘 사용하지 않게 되는 방법이 있다면, 바로 ‘헤헤’전법이다. 무시당하고, 이용당하기 딱 좋다. 결국은 같은 문제로 다시 마주치게 됐는데 나의 에너지는 이미 바닥이 난 상태였다. 대화가 필요했다.

한 가지의 강박관념은 ‘이건 잘못된 게 분명한데 지금 화를 내면, 긍정에너지 수치가 떨어져서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을까?’하는 거였다. 첫 번째, 내가 화를 내면 주위에선 “오죽하면 쟤가 화를 냈겠냐?”라는 말과 함께 내 이야기를 먼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두 번째, 발광하지 않는다. 화가 나면 말이 빨라졌고 눈과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대화는 파국이다. 속도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내 이야기에 오히려 더 집중한다는 것을 알았다. 세 번째,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나에게는 한 번 더 생각을 하고 말한다.

화를 포기하지 않았고 싸움을 포기했으며 대화를 선택했다. 우선, 단어가 주는 힘은 강력해서 명칭을 부여할 때는 항상 조심한다. 별명도 마찬가지다. 키가 크고 힘이 좋았던 나는 말뚝박기를 할 때는 ‘필살기’라 불렸고, ‘조폭마누라’라고도 불렸다. 묘사하고자 하는 특징은 한가지이나 관점은 두가지로 나뉜다. 내가 자주 선택한 단어들은 나만의 한국어 사전 제 1권이 되고, 1권에 있는 단어들은 나의 화법을 만든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내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대화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갈등을 덮어두고 가다가 너무 큰 일이 벌어지는 상황을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너무 많이 경험했다. 긍정회로가 돌아가면서 나의 한국어 사전에도 같은 상황을 기분 상하지 않게 묘사할 수 있는 단어들이 많아졌다.

사람의 끝을 볼 때는 운전을 시키거나, 술을 먹이거나, 화를 내는 모습을 보라고 한다. 제 1 사전에 들어 있는 단어가 무엇인지 볼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사전을 구성하기까지 많은 훈련을 했고, 이 단어를 선택한 근거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말을 하는 데에 자신감이 생겼고, 침착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집중을 받는다.

특히 나는 준거집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치는 집단을 준거집단이라고 하는데,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화법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는 대화들이 재미있다. 각자 다른 부분에 대한 언급은 결코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친구들과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모두에게 필요한 여유


“사정이 있었겠지!”라고 말을 했다. 갈등을 회피하지 않지만, 용납은 할 수 있어야 넘어갈 수 있는 성격 탓이다.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나는 구체적인 상황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서, 약속에 1시간 지각을 한 친구가 있다고 했을 때, ‘늦게 일어났나?’, ‘차가 막혔나?’, 원래 몸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면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나?’ 따위의 것이다. 미리 말을 해 주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본인도 몰랐을 갑작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예상한단 말인가?

아, 물론 사과는 들어야 한다. 사과를 하지 않으면 내가 이해하려고 노력한 시간들이 또 아깝다. 상대방은 나에 대한 배려가 없는데 나는 여전히 배려를 하고 있었던 거다. 다만 잘못한 상황에서의 대처는 각자 다르다는 것을 이해한다. 나는 사과를 의미하는 단어를 들어야 직성이 풀려야 하는 사람이라서, “오~ 안 미안해?”라는 식으로 사과를 유도한다.

연락이 닿으면 가장 먼저 하는 말은 내가 예측했던 상대방의 상황이다. 나를 위한 것이다. “퇴근시간이라 차가 많이 막혀?”라고 물어보면, 그게 정답인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상대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나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나의 화가 분출될 상황을 축소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이해방법을 취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나의 모든 사정을 이해해주는 상황으로 되갚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남에게는 관대하고, 나에게는 엄격하자는 주의였다. 뭐, 항상 그럴 필요 있나? 엄격해야 할 부분과 관대해도 될 부분이 따로 존재한다.

나도 사정이 있는 사람이다. 성과만 두고 보았을 때는 오늘 할 일도 못했겠지. 시간의 흐름 1초 동안에도 내가 무슨 생산적인 활동을 했는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고3을 지났고, 완벽주의자가 되었다. 욕을 싫어하는 내가 욕을 하게 되는 순간에는 ‘내가 정말 화가 많이 났구나!’라는 지표일 뿐이다. 나는 항상 착하고 바르고 성과를 이루는 사람이어야 했던가?
 
 

실리추구형 긍정

 

가끔 비소가 튀어나온다. “긍정적이어서 좋겠다. 에휴.” 많은 케이스가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좋지 않은 부분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다. 사람은 모두 계산을 하면서 살아간다. 긍정적이라는 것은 내가 경험해온 바로, 가장 경제적이다. 그래서 그 방법을 채택한 것이다.

 
긍정은 자구책이며, 스스로의 건강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몸집을 키워 건강함을 뿜어내어 부정의 접근을 예방하는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싸움을 피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나는 확실한 단어와 생각을 가지고 내 의견을 개진해 나가기로 했다. 그렇다고 긍정 타이틀을 내려놓을 생각도 없다. 긍정적이라고 해서, 항상 착한 것은 아니며, 실리추구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생각들로 주변의 소위 ‘긍정맨’들을 만만하게 보아왔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자신의 행동양식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박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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