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토록 '평범한' 여성의 등장 - '티끌 같은 나' [도서]

글 입력 2020.04.27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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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러시아 문학, 그리고 여성 서사


 

러시아 소설이라면 오랫동안 좋아해왔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푸시킨 등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19세기 대문호들부터 나보코프, 바벨, 유리 올레샤 등 미적으로 정제된 20세기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작품들이 가진 개성들은 모두 뚜렷하지만, 위대하지 않은 평범한 인물에의 초점, 어딘가 조금씩 가라앉은 분위기, 사고와 정서의 극단적 발현 등 스스로 생각하는 러시아 소설 특유의 감성들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를 사로잡아 왔다.


그러나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스스로 답답함을 느끼던 부분이 두 가지 있었다. 바로 현대 러시아 문학은 어떠한가, 그리고 러시아 소설에서 여성의 이야기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러시아 문학은 20세기 중반 무렵에서 끊기고, 소련 말기 이후의 러시아문학은 국내에서 널리 알려진 것이 없는 상황이다.


또한 지극히 남성 지식인 중심이던 러시아 문학계에서 여성 작가는 물론이고, 작품 속에 여성의 이야기가 거의 등장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20세기에 이르러 서서히 아흐마토바 등의 시인들을 포함한 여성 작가들이 등장했지만, 소설 쪽에서는 딱히 견고하게 굳어진 남성 작가들의 이름 사이를 뚫고 거론되는 여성 작가 역시 없는 실정이다.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티끌 같은 나》는 그런 점에서 나의 주의을 끌었다. 현대 러시아 문학, 그리고 여성 서사. 《티끌 같은 나》는 현존하는 러시아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꼽히는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중단편 선집이다. 1963년 단편 <거짓 없는 하루>를 통해 등단한 빅토리아 토카레바는 자신의 소설 및 시나리오에서 주로 대도시 여성의 심리, 일과 사생활, 여성의 꿈과 연약함을 이야기한다. 수많은 단편과 시나리오가 영화로 제작되면서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명성을 얻었고, 1990년대에는 '토카레바 붐'이 일어나 대부분의 작품이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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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평범한' 여성의 이야기


 

이번에 도서출판 ‘잔’에서 번역한 《티끌 같은 나》는 토카레바의 중단편 다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스탈린 시절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시대를 다루는 다섯 편 모두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현대 러시아를 살아가는 다름 아닌 평범한 여성이 주인공이다.


가수가 되기 위해 모스크바로 온 이리나(<티끌같은 나>), 종교의 문제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도록 바라봐야만 했던 마리나(<이유>), 재봉사로서, 학자로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던 열정적인 마라(<첫번째 시도>), 발레리나를 은퇴한 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는 안티포바(<남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후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리타(<어느 한가한 저녁>)까지.


토카레바는 복잡하고 치밀하게 얽힌 플롯보다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박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따라서 우리는 주인공이 되는 이 인물들에게 초점을 맞춰 그들의 인생 전반을 보기도 하고(<티끌같은 나>, <이유>, <첫번재 시도>), 특정 시기를 함께하기도 한다(<남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 <어느 한가한 저녁>).

 

 

 

3. 문제적 여성 주인공들


 

그런데 《티끌 같은 나》 속 인물들은 지극히 평범한 나머지 도저히 닮고 싶은 구석이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이 없는 경우도 있을 뿐더러, 현대에 비해 다소 시대착오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티끌 같은 나>의 주인공 이리나는 자신의 음반을 발매하고자 연인이자 스폰서인 니콜라이에게 5천 달러를 달라고 하기도 하고, 영화에 출연하고자 당연스럽게 감독에게 뇌물을 주기도 한다. 새로운 연인을 만나 전 애인의 돈을 들고 도망가는 데에 대해 큰 죄책감을 가지지도 않는다.


<이유>의 주인공 마리나는 어머니라는 이유로 자신의 자식들의 사랑을 갈라놓으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식들에게 저주를 퍼붓기까지 한다. 자신의 친구가 돈이 많다는 이유로 그녀의 찬장에서 초콜릿을 꺼내 자신의 전 애인에게 선물해 달라고 뻔뻔히 부탁하기도 한다. 책을 펼쳐든 처음에는 토카레바의 소설들이 페미니즘적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등장인물들의 말 속에서도, 화자의 서술 속에서도 뒤떨어진 사고와 생각들이 자주 등장한다.


《티끌 같은 나》의 주인공들은 분명히 그 전 세대와는 다르다. 결혼은 인생의 유일무이한 것이며, 결혼과 사랑은 동일한 것이라(<이유>) 여기며 알코올 중독 남편에게서 떠나지 못하는 등(<티끌 같은 나>)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나서지 못하는 이전 세대와는 달리, 자신이 가진 꿈과 당장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것을 좀 더 들여다보면, 여전히 주인공들의 삶의 선택들은 사실상 모두 남성을 선택하는 일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이 생각하는 좋은 삶이란 곧 좋은 남성을 만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나은 삶으로의 욕망은 더 ‘좋은 사랑’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자신의 꿈의 실현(<티끌같은 나>, <첫 번째 시도>, <이유>)이나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유>, <남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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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토카레바

 

 

그러나 이러한 서술들이 마냥 시대 착오적이라고 볼 수만은 없는 부분이 있다. 토카레바는 《티끌 같은 나》 속  주인공들을 절대 이상적인 인물로서 그려내지 않는다. 이것은 중편들인 앞의 두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주인공들은 초반 모두 어머니와는 대비되는 새로운 세대로서 그려지지만, 시간이 흐르며 인생의 큰 사건들을 겪는 과정에서 어머니와 다름없는 모습을 발견한다.


주인공의 딸 스네자나가 등장하는 <이유>에서는 적극적으로 스네자나에 의해 주인공 마리나의 구시대성이 비판받기도 한다. 또한, 주인공의 부도덕한 행동들이 적극적으로 서술되기도 하며, 토카레바는 그 행동들을 함부로 매력있는 것으로 그리지 않는다. 주인공들에게는 그들을 지지하는 동시에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인해 그들을 어느 정도 비판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티클 같은 나> 속 ‘키라’, <이유> 속 ‘안나’, <첫 번째 시도> 속 ‘라리사(나)’)


《티끌 같은 나》의 주인공들은 <첫 번째 시도> 속 ‘마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작품의 말미에 가서 스스로가 살아온 삶에 대해 반추하게 된다. 이들은 권력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소련 해체 직후의 혼란스러운 러시아 사회를 절실히 실감하기에, 그 권력을 얻기 위해 당시 그녀들이 가진 유일한 수단-지배층 남성과의 교제-을 얻어냄으로써 자신이 가진 욕망에 이르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그녀들이 전부라고 믿어왔던 삶의 태도나 가치관에 무언가 큰 부조리가 존재하지는 않았는가. 주인공들은 실패의 끝에서 질문의 시작에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그 모든 아픈 과거와, 헤어나오기 힘든 구조적 불평등에서도 스스로 나름의 삶의 의미를 찾고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기까지에 이르는 인물들도 존재한다(<티끌 같은 나>, <남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

 

 

 

4. 《티끌 같은 나》가 현재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티끌 같은 나》의 주인공들은 그 시대를 지배하던 가치관에서 크게 앞서나가지 못하는 인물들이며, 토카레바는 단순하고 투박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의 소박한 문체로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안긴다.


20세기 후반, 혼란스러운 국내 정세와 더불어 차별과 불평등, 혐오가 짙게 깔려있는 러시아 사회를 살아가던 평범한 여성들은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만 했는가. 그중에서도 자신의 꿈을 찾아 그것을 이루고자 했던 여성들은, 그 어떤 권력도 없는 상태에서 어떠한 수단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것이 러시아의 올리가르히와 교제하고, 그들의 재산을 비윤리적으로 불리는 방식이더라도, 마냥 비난할 수 있는 일인가. 그들이 그러한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던 사회적 상황은 없었을까.


그리고 현재의 우리는 《티끌 같은 나》의 주인공들에게서 어떠한 공통점도 과연 찾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가 깨뜨리고자 하는, 그렇지만 여전히 현재에 뿌리딛고 있는, 차별과 혐오로 점철된 사회는 《티끌 같은 나》 속 이리나가 살던 모스크바와 분명히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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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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