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N번째 제주를 기다리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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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또 제주다. 나는 제주를 4번 갔다. 처음은 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으로, 두 번째는 22살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너무 사랑하는 친구들과, 세 번째는 많은 기억과 생각을 남겨준 혼자, 마지막으로는 1년을 함께 살았던 대학 동기들과. 내가 느꼈던 제주를 추억하며 앞으로 다가올 N번의 제주를 기다리고 있다.
첫 번째 제주
이 여행은 유독 처음이 많았다. 첫 비행기, 첫 수학여행, 첫 제주도 등등.. 설렘으로 가득했다. 중학생 때는 수학여행을 가지 않았다. 수많은 이유가 생각나지만, 굳이 말하지 않겠다. 어쨌든 그 설렘으로 새 옷까지 준비해서 교복 위에 입었다. 현란한 색상의 바람막이었는데.. 그 당시엔 그런 디자인이 유행했나보다. 나 말고도 그런 친구들이 몇몇 보였다. 클리셰처럼 영화, 드라마,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18살, 진짜 긴장될 만큼 설레였다.
비행기 좌석을 무작위로 선생님이 배부하셨다. 나처럼 처음 비행기를 타는 친구들과 셋이 손을 꼭 잡고 탔던 기억이 난다. 그 커다란 고철에 타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사고나면 어쩌지.. 하필 그때가 딱 남북 전쟁이 발발한다 이런 말들이 나돌 때였다. 다행히 우린 제주도에 무사히 도착했다.
다들 공감하겠지만, 수학여행을 가는 모든 고등학생의 필수코스가 있다. 그 제육볶음집, 천지연폭포, 주상절리 등등.. 딱히 기억에 남는 건 없었다. 그냥 수학여행이라는 말 자체가 설레임 그 자체였다. 친구들과 밤새 수다를 떨고, 진실게임을 하고. 제주도 자체가 매력적이라기보다는 처음이어서, 수학여행이라는 말 자체만으로도 좋았다.
그렇게 추억 속의 첫 번째 제주는 막을 내렸다.
두 번째 제주
나는 첫 번째 제주에서 그다지 흥미를 느끼진 못했다. 그래서 아무리 SNS에 제주도 사진이 난무해도 큰 관심이 없었는데,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여행을 가자고 했다. 가난한 대학생인 우리가 갈 수 있는 여행지의 폭은 좁았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바로 제주였다. 그렇게 나는 나의 두 번째 제주를 22살 여름에 만났다. 나까지 포함해 총 4명의 친구들인데, 이상하게 유독 편하게 느껴지는, 내가 너무 사랑하는 친구들이다. 사실 어쩌다 이렇게 넷이서 졸업하고 자주 보게 되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여행 스타일이 있다. 넷 중 두 명은 여기저기서 정보를 알아 온다. 유명하고 예쁜 카페, 맛집 게스트하우스 등등.. 그리고 나와 다른 친구 한 명은 그냥 잘 따라다니는 편이다. SNS에서 사진을 많이 올리는 카멜리아 힐, 월정리, 세화 등등 많은 곳을 다녔다. 이때도 제주 자체가 좋다고는 못 느꼈다. 중간에 투닥투닥 다퉈도, 생각보다 맛이 없어도, 밤에 배고파서 결국 치킨을 시켜 먹었어도 즐거웠다.
세 번째 제주
세 번째는 혼자 갔다. 24살 봄이었는데, 사실 부모님이 말리셨다. 고민하던 나에게 친구 한 명이 그냥 후회할 바엔 가버리라고 해서 몰래 갔다. 사실 이 여행을 간 시기는 새로운 학교의 1학년을 마치고 조금은 정신이 피폐했을 때였다. 이런저런 마음고생도 했고, 함께인 것이 조금은 벅찰 때여서 그런지 혼자 처음 가는 여행이 자유롭게 느껴졌다.
2월의 제주는 따뜻하다고 해서 별 생각 없이 갔는데 진짜 너무 추웠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후회를 잔뜩 했다. ‘아.. 돌아갈까?’라는 생각마저 들고 있는데, 버스에서 내려서 본 바다가 그 생각을 모두 잊게 만들었다. 푸른 바다와 하늘, 그 아래 서 있는 나의 모습. 완벽했다.
이번 여행은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천천히 다니려고 일부러 계획을 많이 잡지 않았다. 첫날은 빛의 벙커와 게스트하우스에서 진행하는 별빛투어를 다녀왔다. 빛의 벙커는 클림트 전이었는데 순식간의 나를 매료시켰다. 속설로 눈감았다 뜨니 한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그 후,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갔는데 우연히도 내가 묵은 4인 도미토리룸의 숙박객들이 모두 혼자 여행 온 사람들이었다. 잠깐 이야기하다가 별빛투어를 갔는데 밤의 오름은 더 추웠다. 그런 나를 보고 같은 방 숙박객 중 한 명이 목도리랑 장갑도 빌려줬다. 그녀의 다정함은 제주를 올 때마다 늘 떠올리게 된다. 그 순간의 다정함을 난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둘째 날, 버스를 타고 두 번째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이날은 나처럼 혼자 온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두 번째 제주를 함께한 친구다. 친구와 각자 시간을 보내다 흑돼지는 같이 먹기로 했었는데, 밤바다를 보고 흑돼지를 실컷 먹었다. 날씨가 유독 추워서인지 밤새 내가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다음날 제일 두꺼운 후드티를 꺼내입고 친구랑 인사하고 금능을 만났다.
그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보고 황홀함을 느꼈다. 친구들과 스터디로 공부했던 추사관도 다녀왔다. 추사 김정희 선생님은 ‘세한이후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라고 하셨는데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다. 괜히 나도 먹먹해졌었다. 집에 돌아가는 버스에서 친구가 카톡이 왔다. 함께 시간을 보내서 너무 좋았다고, 너도 좋은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감동 그 자체.
즐거웠던 여행이 끝나고 씁쓸한 마음으로 김포행 비행기를 탔다. 정말 펑펑 울었다. 누가 보면 이별 여행이라도 한 줄 알았을 거다. 지나고 보니 이게 바로 생각정리라는 거였나 싶다. 정말 푹 쉬었고, 푹 즐겼고, 제주의 다정함을 물씬 느낀, 그런 여행이었다. 처음으로 여행을 마치며 이렇게나 좋았고 행복했던 제주를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한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네 번째 제주
네 번째 제주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부모님이 용돈을 끊어버린 직후, 나는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제주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바람처럼 찾아왔다. 제주도에 사는 동기 친구의 부모님께서 나와 다른 친구 한 명을 초대한 것이다. 그렇게 바로 티켓을 끊고, 돈을 모아 다녀왔다. 친구네 부모님께서 운영하시는 가게에서 실컷 밥도 먹었다. 단연코 제주에서 먹은 흑돼지 중에 제일 맛있었다.
여긴 바로 중문솥뚜껑. 알만한 사람들은 알 거다. 리뷰가 400개나 된다. 친구네 부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따뜻하고 예쁜 집을 알려주신 것만으로도 모자라 우리를 사육했다. 진짜 배고플 틈 없이 계속 먹었다. 여담이지만 발렌타인 30년산을 선뜻 뜯어주셨다. 감동 그 자체. 초대한 친구도 계속 현지인들만 알만한 로컬 맛집, 볼만한 장소들을 찾아서 알려줬다. 진짜 난 계속 뭐든 좋다고 했었는데 정말 다 좋았다.
친구 집에는 정말 귀여운 강아지도 있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너무 보고 싶다. 그 귀여운,, 치와와.. 이름은 또롱이다. 함께 여행한 친구들은 사실 나보다 2살, 3살 어린 동생들인데 같이 있으면 서로 너무 말이 많다. 근데 그게 너무 웃기다. 예전에 혼자 보는 SNS에 이 친구들을 ‘매번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 주는 애들’이라고 칭했던 게 생각난다. 신기할 정도로 훅 들어와서 처음엔 당황스러웠는데 지금은 반갑다. 나이는 다르지만, 그만큼 내가 이 친구들을 친하다고 여기게 되었나 싶기도 하다.
N번째 제주를 기다리며
난 그래도 바다 근처에 살아서 어렸을 적부터 물은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제주바다는 볼 때마다 좋다. 마음이 평온해진다. 생각이 깔끔해지면서도 생각에 잠식된다. 올 때마다 다르게 느껴진다. 그리고 항상 추억이 된다. 이제까지의 모든 제주들이 또다시 N번의 제주를 기대하게 만든다. 나는 지금도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제주를 기다리고 있다.
[김화정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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