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더 이상의 벼랑 끝은 안 된다 [문화 전반]

글 입력 2020.03.28 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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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부터 꾸준히 거론되었던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드디어 주요 언론을 타며 공론화되었다. 국민일보의 ‘n번방 추적기’ 기획 기사로 많은 국민이 끔찍한 사건을 접하고, 국민 청원이 단숨에 답변에 의무가 있는 기준인 20만 명을 훨씬 넘겼으며, ‘박사’라는 닉네임의 범죄자 조주빈의 신상이 밝혀졌고, n번방을 세상에 처음 알린 용기 있는 존재가 대학생 기자단 ‘추적단 불꽃’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루하루가 빠르게, 새로운 정보가 입수되고 있는 상황이다.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의 신상 공개를 요청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은 265만 5582명의 동의를 얻으며 역대 최다 인원의 동의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3월 27일 기준).

쏟아지는 텔레그램 n번방 기사들을 보면서 여성이자 인간으로서 말을 잇지 못할 만큼의 참담함을 느꼈다. 여성이기에 성범죄가 남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두려움과 공포심이 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인간이길 포기한 잔혹한 짓을 할 수 있는지 그 잔인함에 치가 떨렸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전말을 접하게 된 날 이후 며칠 동안 사건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답답한 하루들이 계속되었다.

기사들을 읽다가 문득 지난달에 읽었던 탈 성매매한 저자의 책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이 떠올랐다. 가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던 저자는 성매매를 나가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이 분야의 산업 구조는 본인도 모르게 성매매라는 착취와 폭력에 휘말리게 만든다. 책을 읽으며 너무나 놀라웠던 점은 다양한 수요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성매매 업소가 있다는 것이다. 가라오케, 룸살롱, 유리방, 보도방, 티켓다방 등 무수한 업종을 보며 크고 넓은 산업 규모에 절망스러웠다.

책에서 저자는 미성년자였던 당시 처음 가게 된 곳이 가라오케라고 말한다. 돈을 벌어야 했던 그녀가 돈을 벌기 위해 한 발 떼었을 때, 그는 이미 폭력과 착취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졌다. 포주들은 성매매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접근했고, 보호해 줄 것처럼 믿음직스럽게 다가왔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성매매를 하게 만드는 일종의 미끼였다. 일을 하려면 포주들이 원하는 대로 갖춰 입고 꾸며야 하는데, 그 돈은 고스란히 빚으로 쌓여갔으므로 그 산업에서 빠져나오기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문제는 성매매 산업의 시작점이 여성에게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었을 때 몇 년 전 알바 구직 어플을 처음 깔았을 때가 떠올랐다. 알바 구직 어플엔 어느 지역에나 ‘바(BAR)’ 알바가 있다. 보통 20대 여성을 환영한다는 그 알바는 고수입을 보장하며, 건전한 곳이라는 것을 굉장히 강조한다. 내가 알바 어플에 내 정보가 담긴 이력서를 올려두었을 때, 나는 내 이력서를 열람한 여러 바(BAR)로부터 메시지와 전화를 받았다. 나에게 전화를 건 남자는 아주 건전한 카페 같은 곳이며 가끔 손님들과 대화만 해주면 되는 손쉬운 알바라고 말했다.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엄마한테 여쭤보니 그런 알바는 성적 착취로 이어지는 위험한 곳이라고 조언을 해주셨다. 당시엔 그러고 넘겼지만, 책을 읽으며 다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니 아찔했다.

당시 나는 꼭 알바를 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고 엄마의 조언이 있었기에 그 전화를 가볍게 무시하고 넘길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환경에 있는 여성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이라는 책 제목이 상황을 너무나도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저 클릭 한 번으로 ‘길 하나’ 건넜을 뿐인데, 착취와 폭력이라는 벼랑 끝에 몰리고 만다. 성매매로 유인되는 구조는 너무나 손쉽고 여성에게 취약하다. 사회에는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아이들을 성적으로 착취하여 이득을 챙기려는 나쁜 어른들이 있다. 아이들의 위태로운 환경을 이용하여 돈벌이 수단으로 착취하는 어른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사회가 정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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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n번방이 수면 위로 오르면서 정말 다양한 종류의 디지털 성범죄가 언급되었다. 그중에는 일탈계의 개인 정보를 해킹하여 정보를 얻고,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협박하여 피해자를 만든 사례가 있었다. 내가 눈을 의심한 건 ‘지인 능욕’이었다. 지인 능욕은 여성인 지인의 사진과 이름, 거주지 등의 개인 정보를 올리고 음란물에 지인의 얼굴을 합성해 성추행하는 행위다.

최근 뉴스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고등학교 남학생이 여학생들 얼굴과 음란물을 합성한 ‘지인 능욕’ 사진을 만들어 텔레그램 n번방에 유포했다고 한다. 밝혀진 피해자 5명 중엔 학교 선후배를 포함한 여성들이 있었고, 놀랍게도 범행은 피해자들 모르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가해 남학생이 학폭위를 통해 받은 징계는 출석정지 10일뿐.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의 분리도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텔레그램엔 여성 연예인을 소재로 한 ‘성인 딥페이크 물’ 전용방도 운영되고 있다. 딥트레이스에 따르면, 전 세계 딥페이크 포르노의 25%가 K팝 아이돌 등 한국 여성 연예인이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이 음란물에 합성되어 온갖 성희롱을 당하는 현실이 말이 되는가?

하지만 딥페이크 처벌법 입법 과정에서 고위 공무원들과 국회 법제 사법 위원들의 발언을 보면 ‘딥페이크 물’의 피해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수준이었다. “자기만족을 위해 이런 영상을 가지고 나 혼자 즐기는 것까지 갈(처벌할) 것이냐”(정점식 미래통합당 의원), “자기는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 수 있다”(김인겸 법원행정처 차장), “청소년이나 자라나는 사람들은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짓 자주 한다”(김오수 법무부 차관), “일기장에 혼자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처벌할 수는 없지 않냐”(법사위 민주당 간사인 송기헌 의원)***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성범죄에 대한 고위 공무원들의 안일한 태도를 보고 한국 사회가 범죄자에게 관대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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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제 분노하기도 지친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이전 많은 성범죄들이 제대로 해결된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소라넷, 웹하드 카르텔, 버닝썬 사건, 다크웹, 정준영 사건, 최근 김학의 무혐의 판결까지. 성범죄를 향해 맞서는 우리는 단 한 번도 승기를 쥐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번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도 ‘또?’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무력감과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이번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보며 드는 참담함은 피해자와 가해자 중 미성년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같은 학교 여학생이 음란물에 합성되어 텔레그램 n번방에 공유되며 희롱당할 때, 같은 학교 남학생은 어떠한 죄책감 없이 지인 능욕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제작했다. 고위 공직자들은 새로운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인식과 이해도 부족하며 망언을 일삼는다. 심지어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은 턱 없이 낮은데, 법정 최고형도 좀체 선고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성범죄자들이 너무나도 살기 좋은 곳이 아닌가?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성 착취는 단순히 여성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향해서도 손을 뻗는다. 착취와 폭력이 썩은 문화로 남아 있는 곳에서 여성과 아이는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있는 존재나 다름없다. 여교사, 여대생, 여고생, 여중생, 그리고 여아에 이르기까지 여성은 나이나 직업별로 나뉘어 n번방에 분류되는 대상이 된다. 무수한 디지털 성범죄를 묵과했던 한국 사회가 텔레그램 n번방이라는 끔찍한 괴물을 만드는데 공조했다. 이제는 정말로 멈춰야 할 때다.

나는 피해자들에 대한 충분한 치료와 지원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가해자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끔찍한 일에 대한 대가를 법의 이름으로 돌려받길 바란다. 여성들이 더 이상 벼랑 끝에 서지 않길 바라며, 썩을 대로 썩은 한국 사회의 성 착취 구조가 해체되기를 바란다. 정의를 찾는 그날까지 사건을 알리는데 힘쓰고 꾸준히 목소리를 낼 것이다.


참고 자료
* TV조선, [단독] 동창생 사진으로 음란물 만든 고교생 덜미…학교까지 번진 ‘지인 능욕’
** 중앙일보, [팩플] ‘지인 능욕방’ 만든 그 기술…딥페이크 어디까지 왔나
*** 경향신문, [단독] “예술작품이라 생각하고 만들 수 있지 않냐” 딥페이크 처벌 법 만든 고위공직자들의 안일한 현실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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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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