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러 형태의 가부장제, ‘툴리’(Tully, 2018) [영화]

사실은 괜찮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글 입력 2020.03.27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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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난 장래 희망을 적는 칸에 항상 ‘현모양처’를 썼다. 큰 의미를 두고 쓰진 않았다. 꿈이 없으니 아무거나 쓰자, 하고 쓴 것이 ‘현모양처’였다. 하지만 아무렇게 쓴 장래 희망이 하필이면 ‘현모양처’였던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고작 14살이었던 난 여성이란 자고로 좋은 아내, 좋은 엄마로 성장해야 한다는 사회 인식을 이미 학습하고 있었다. 직업을 가지고 나로서 존재하는 모습보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존재하는 내 모습을 더 상상하기 쉬웠다. 더욱이 그것을 칭하는 번지르르한 단어, ‘현모양처’가 있으니 긴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10년 전인 그때도,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이 전업 가사노동자인 아내나 엄마를 직업인으로 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장래 희망 칸의 네 글자를 보고도 문제 삼은 어른은 없었다. 장래 희망을 그리는 미술 시간에 앞치마를 매고 요리를 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려도, 그것이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미래이기 때문에 굳이 고쳐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직업이든 아니든, 장래의 내 역할 중 하나가 될 것임은 구태여 따지지 않아도 확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더 넓은 상상의 여지가 필요하다. 의식적으로 성역할을 무의식해야 한다. 자연스러움은 성역할 수행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자연스러움은 정상성의 궤도에 있을 뿐, 정상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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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툴리>(Tully, 2018)는 이 ‘자연스러운’ 성역할의 수행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보여준다. 마를로(샤를리즈 테론)는 세 아이의 엄마다. 그의 하루는 숨 쉴 틈이 없이 흘러간다. 특히 갓난아기인 셋째는 밤새 울며 마를로를 깨운다. 둘째를 키울 때 한 차례 고비를 겪었던 마를로이기 때문에 그의 오빠인 크레이그(마크 듀플라스)는 야간 보모를 쓰라고 제안한다. 보모를 한 번도 써보지 않았던 마를로는 제안을 거절하고 버틸 때까지 버틴다. 하지만 결국 한계를 느끼고, 야간 보모인 툴리(맥켄지 데이비스)를 부르게 된다.

 

 

[이후의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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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리의 등장으로 마를로는 활기를 되찾는 듯 보인다. 학교 관계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저녁 식사를 직접 만들기도 하며, 아이들과 농담을 나눈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 툴리의 정체가 드러난다. 툴리는 마를로가 만들어낸 상상의 인물이며, 26살의 자기 자신이다. 강도 높은 육아와 가사노동이 마를로의 정신질환을 초래한 것이다.


영화에서 독박가사의 위험성은 심각한 정신질환,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심각한 사고로 나타난다. 마를로의 특수한 피해 상황은 개연성 있게 구성된다. 마를로가 겪는 피해가 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개연성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해의 원인이 되는 보편적인 주변 상황이 쉽게 납득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된 원인인 남편, 드류(론 리빙스턴)의 행동과 태도를 보자. 아내의 상태와는 별개로 냉동 피자를 저녁으로 차렸다는 것에 은근한 불만을 표한다. 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육아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매일 밤 하는 게임은 일상에서 빠뜨리지 않는다. 보모가 온 첫날 보모가 이상한 것 같다는 마를로의 말에도 개의치 않고 게임을 지속한다. 자신은 아기에게 먹일 젖이 없기 때문에 아기의 울음소리에 깨지 않는 것이라며 농담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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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은 가정에 소홀한 인물이지, 특이한 인물은 아니다. 사회생활을 하며 집안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자신의 성역할에 충실한 인물이다. 흔한 행동을 하는 기시감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런 흔한 행동이 바로 피해를 발생시킨 가해행위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마를로의 특수한 피해가 발생한 후에야 인정된다.


영화는 독박가사와 독박육아의 불평등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신체적 가해행위 없이도 정신적, 신체적 피해가 발생한다는 것을 되새겨주는 것 또한 의의가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방식의 전개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그것을 표현함에 있어서 극단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사하고, 이는 (특수한 피해를 본 적이 없는) 다수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절체절명의 사연과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 직면하지 않더라도 피해는 발생하고, 가해행위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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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삶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꿈을 이루신 거예요. 그렇게 싫어하는 단조로움요. 가족에겐 선물 같은 거예요. 매일 일어나서 가족에게 같은 일을 해주는 것. 삶도 심심하고 결혼도 심심하고 집도 심심하지만 그게 멋진 거예요!”

 

마를로-“이젠 어떻게 하죠?”

툴리-“해야 하는 일을 해야겠죠. 그걸 반복하면 돼요.”

마를로-“나이는 내가 많은데 왜 당신이 더 지혜롭죠?”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마를로에게 툴리가 한 말, 그리고 이후 마를로와 툴리가 헤어지기 직전에 한 대화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하지만 나는 이 또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전업 가사노동이 미화되는 게 위험하다는 말이 아니다.


왜 하필 마를로의 삶, 독박 가사로 인해 피폐해진 삶이 미화되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독박육아를 수행하다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 마를로가 왜 성역할을 인정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이 대사들의 대상이 마를로가 되는 순간 대사는 적절한 선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성역할을 수행하자는 메시지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정상성 궤도의 ‘아름다운 결말’로 해석되고 가부장제를 공고히 한다.


이처럼 영화는 따뜻한 목소리로 적당한 만큼의 가부장제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더 위험하고, 그래서 더 악질이다. 그럼에도 <툴리>는 관람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따뜻한 목소리만이라도 필요하다. 독박 가사노동의 문제점만이라도 알려져야 한다. 물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따뜻한 목소리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에 대한 논의 또한 활발하게 이뤄져야 할 것이다.


우리에겐 모든 툴리가 마를로로 성장하지 않고, 모든 마를로에게 툴리가 요구되지 않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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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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