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라져가는 간판의 기록 [시각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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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요즘, 내 새로운 취미는 자전거 타기다. 날씨가 따뜻해져서 한산한 골목골목을 자전거로 돌아다니고 한강까지 가기도 한다.
여느 날과 크게 다르지 않게 혼자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누비다 성수동에서 한 갤러리를 발견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데 왜 아직까지 몰랐던 걸까. 마침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따끈따끈한 전시를 열고 있었다. 계획에 없이 충동적으로 전시를 보게 되니 설렜다.
레이블 갤러리LABEL GALLERY는 국내 최초로 점착라벨 소재를 생산한 ㈜세림에서 만든 전시 공간이다. 점착라벨 소재를 소개하며 동시에 라벨의 이미지와 확장되는 의미들을 찾아보고 전시한다.
현재 메인으로 사진전을 하고 있는데도 한 쪽 벽은 다양한 라벨을 부착한 병들이 전시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레이블 갤러리는 원래 을지로 쪽에 위치하다 2017년 현재의 성수동으로 옮겼다. 디자인에 관심이 있다면 친구들과 성수에서 카페를 갈 때, 맛집을 갈 때 색다른 경험으로 한 번쯤 들려도 좋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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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일부터 시작한 이영 작가의 《만물시장》 사진전은 누군가 ‘직접’ 쓴 청계천 일대의 상점과 황학동의 만물시장 등에서 촬영한 아날로그 간판들의 사진을 모았다. 이제는 거의 사라진 허름한 간판들, 그리고 그나마 있는 것들도 곧 사라질 간판들이다. ‘간판 사진’전이라니. 레이블 갤러리와 어울리는 전시라는 생각이 든다.
“일찍이 1930년대에 김복진은 당시 경성시가지를 장식하고 있던 간판의 의미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자본주의의 위력을 간판에서 간파한 것이다. 간판은 상품경제에서 불가피한 선전도구이자 도시를 장악하는 강력한 이미지다. (…) 그것은 사람들의 욕망의 도화선을 건드리고 그 무엇인가를 갈구하게 하는 동시에 경쟁적으로 자기 존재를 가시화한다.” (박영택, 평론가)
전시장은 생각보다 더 널찍했다. 게다가 관객이 나 혼자라서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다. 전시장에 들어가 바로 오른쪽 벽에 걸려있는 작품들은 시리즈로, 외국에서 포착한 한글 간판들이다. 베트남 여행을 갔을 때 자주 보던 간판들이었다. 못생긴 돋움체로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투박하게 적혀있는 한글들.
그 옆으로 <만물시장> 시리즈가 이어진다. <개미슈퍼>, <옛날물건삽니다>와 같이 평범한 간판들이다. 아마 평소에 봤더라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간판들이 사진으로 찍혀 전시장 안으로 들어왔다. 만물시장에 아직 남아있는 낡은 간판들. 한데 모아놓으니 느낌이 색다르다.
비디오 작품도 있었다. 단순히 사진들을 보여주는 영상이긴 했지만 말이다.
영상 작품 <평화와 통일>은 5분 동안 <망향>, <평남>, <통일>, <개성 가는 길> 등 우리가 갈 수 없는 곳, 북한과 통일에 대한 것을 간판으로 달고 있는 가게들을 보여준다. 영상 마지막에 등장하는 글 중 “냉전을 판매한다”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전시장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벽에는 작게 인화된 간판 사진들 <무제>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또한 <만물시장>전 말고도 레이블 갤러리의 특징인 벽을 가득 채우는 라벨 디자인들을 볼 수 있다. 각종 병에 부착되어 있는 라벨들을 새삼스럽게 눈여겨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모아서 하나씩 찬찬히 둘러보니 라벨 하나에도 신경썼을 또다른 예술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전시는 지하에서도 이어진다. 첫 작품 옆에 아주 작고 얄팍한 문이 있다. 그냥 창문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 문을 열어나가면 오른쪽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지하는 천장이 낮고 서늘하다. 지하에도 <만물시장>이 이어서 전시되어 있다. 한쪽 벽은 중국어로 된 간판을 찍은 작은 사진들이 한 벽면을 채우고 있다. 이 간판을 역시 손으로 직접 쓴 허름한 간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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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과 간판이 아름다우면 사람들은 대상에 대해 빠르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사물에 붙어서 그것의 용도와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만들어주는 것에 대해 전문적으로 다루고 전시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라벨'이라는 것에 집중하는 레이블 갤러리만의 특색이 확실하게 살아있어 인상 깊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패키지와 라벨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처럼, 가게 역시 간판으로 먼저 만난다. 간판이 가게의 ‘라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번 전시는 레이블 갤러리만의 특성을 살리면서 요즘 유행하는 복고 열풍과 맞아떨어지는 전시였다.
을지로가 옛날 감성에 힘입어 ‘힙지로’로 뜬 것처럼, 손으로 직접 쓴 간판도 인기를 끌 수 있지 않을까? 어딘가 비뚤어진 궁서체와 투박한 느낌의 감성이 현재와 맞닿는 부분이 분명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곧 사라질 간판들을 사진으로 찍어 기록한 작품들. 찍힌 간판들은 실제로는 사라져도 사진으로 남아 있을 것이고, 내가 이 전시를 우연히 만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 닿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이제 작품이 되어 모인 투박한 간판들은 죽지 않는다.
이영, 《만물시장》
2020.03.19-04.24
레이블 갤러리LABEL GALLERY
무료입장
[진수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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