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나는 나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 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수업

철학은 어떻게 삶에 도움이 되는가
글 입력 2020.03.25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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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평생 질문해야 하는 우리에게,

 


-철학은 어떻게 삶에 도움이 되는가-

 

『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수업』

_시라토리 하루히코, 지지엔즈



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수업_표1.jpg

 


[PRESS]

나는 나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단지 정해진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로 숫자 하나씩 먹어가며 내가 버린 것은 흔히 ‘꿈’이라 불렸던 것이었다. 갑자기 ‘꿈’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조금 이상한 것 같지만 스물넷의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회상할 때면 나는 항상 내가 버렸던 것들을 먼저 떠올리게 되었고, 내가 버린 것은 ‘꿈’이었으니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의도치 않게, 누구의 짓인지 모르지만 만났다는 이유로 쫓아보게 되는 신기루처럼 내가 걸어갈 길 앞을 비추던 가로등들을 모두 치우니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깜깜한 장면이 너무 낯설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지금껏 내가 스스로 세운 가로등 하나 없이 길을 걷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당황스러웠다. ‘허, 이럴 수가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구나!’라며 씁쓸한 감탄을 내뱉다가도, 나는 이 상태로만 머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쨌든 나는 불가피하게 내게 주어진 사회 속에서 ‘나’라는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야 했다. 이왕 다시 시작할 거면 조금 더 깨끗하게 정리하고 시작하고 싶었다. 나의 착각을 지워보고, 나의 이유가 아니었던 것을 지우고, 휩쓸려서 했던 것들을 비워냈다. 정확한 무엇인가를 붙잡은 기분은 분명히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멈춰서서 무엇인가를 해본 것이었다.


많은 것들이 지워진 후 남겨진 헛헛함이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모든 것을 쓸어 없애버리니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내가 나에게 해야 했던 질문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왜 살고 있는 거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거지?’처럼 이미 모두가 아는 질문들, 그러니까 정답이 없으니 답은 스스로 내려야 한다는 걸 이미 아는 질문들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러니까 내가 살아갈 방식을 내가 어떻게 정해야 그것이 옳은 것이지?’ 생각은 꼬이고 꼬이며 안과 밖을 알 수 없는 기묘한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버린 꼴이었다. 아이러니하게 딱 ‘나만 아는 세상’에 갇힌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찾아보기 시작했고, 사람에 대해 사유하는 인문학을 더 마음을 두고 만나기 시작했다. 내가 세워야 할 '나의 기준'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작은 근거들을 찾아보고 싶었다. 거창한 여정은 아니었으나 그런 모습으로 조금씩 걸어가며 내가 불현듯 떠올린 것은 바로 ‘철학’이었다.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막연한 연상이었지만 내가 아는 한 철학만큼 삶과 사람의 존재에 대해 깊이 사유한 것이 없었다.


세상에 철학 도서는 정말 많지만 나에겐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바로 내가 살아갈 인생을 두고 고민하려는 시작에 하나의 버팀목이 될 수 있는 목소리가 담긴 철학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철학의 용어가 익숙하지 않은 나도 버거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도서야 했다. 그렇게 몇 개의 기준을 가지고 여러 도서 사이를 맴돌다가 이번 리뷰 글의 주인공인 <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수업>이라는 도서를 만났다.

 

 

***

 

 "철학은 어떻게 삶을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가"

 

삶에 도움이 되는

가장 쓸모 있는 철학 사용법

 

 

『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수업』은 각각 일본과 대만을 대표하는 두 저자가 소크라테스, 플라톤, 흄, 칸트, 사르트르 등 12명의 철학자가 남긴 지적 유산을 바탕으로 삶에 도움이 되는 일상 철학을 전한다. 두 저자는 철학이 사는 데 무슨 쓸모가 있냐는 사람들에게 반박이라도 하듯, 철학을 아주 실용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며 당장 우리 눈앞에 펼쳐진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철학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철학은 삶에 필요한 학문이라고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철학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왜 그런 걸까, 그저 대화가 잘 안 통하는 친구처럼 철학의 언어가 낯설고 어렵기 때문인 걸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질문해보고 싶다. “철학의 언어를 어떻게 우리 삶과 일상에 적용할 수 있을까?”라고 말이다. 아무리 많은 철학에 대한 이야기와 이론을 들어도 여전히 삶의 영역으로 데려오는 방법을 모르니 이 거리는 더 쉽게 좁혀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삶과 철학이 잘 어울리기 위해선 철학과 우리 사이에 남겨진 모호하고 막연한 공간 위에 멋진 다리 하나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철학에 대한 설명과 이론에서 더 나아가 이를 일상의 언어로 바라보는 방법, 그리고 철학은 삶에 적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해석과 이야기가 있는 다리 말이다. 철학과 함께 삶에서 겪은 깨달음이나 경험과 같은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으면 더욱이나 좋은 다리가 될 것 같다. 그리고 <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수업>은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다.

 


한 가지 더 특별한 점은 두 저자의 표현 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지지엔즈는 자신의 인생 경험을 예로 들어 철학적인 사고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한편, 시라토리 하루히코는 세상의 상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치관을 세우는 일이 어떻게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지를 전한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지적 대담 코너는 철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워하거나 궁금해할 만한 문제를 친절하게 되짚어준다.

 

 

어쩌면 처음으로 무게를 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에 대해 고민하며 읽은 <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수업>은 나에게 좋은 다리 위에 올라서 있다는 경험을 안겨주었다. 12명 철학자의 철학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해서, 저자의 구체적인 예시와 해석, 경험과 조언이 연결된 내용을 읽으며 철학과 삶이 조금씩 맞물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깨달은 것은 삶에 불러오는 철학은 생각보다 엄격한 학문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로는 단단하게 자신의 이론을 이루어야 하지만, 정답이 없는 세상인 만큼 이를 해석해서 한 개인의 삶으로 불러오는 과정은 정말 다채롭다는 것이었다. 책을 쓴 두 저자가 말하는 비유나 철학과 함께한 삶의 순간에 대한 이야기 역시 절대적인 것이 아닌, 저자의 입장에서 여러 고민을 거치며 저자만의 해석으로 일상에 자리 잡은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수많은 독자 역시 철학을 자신의 일상에서 어떻게 함께할지 얼마든지 자신만의 방식을 찾으며 생각을 뻗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철학을 너무도 딱딱한 틀에서 바라보지 않았었나 생각도 들었다.


이처럼 철학과 저자의 경험과 조언이 한 데 모여있는 <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수업>은 하나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의 인생에 어떻게 철학을 불러올 것인가', '철학을 통해 나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함께 사유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번 리뷰 글에서는 실제로 이 도서를 만나면서 일상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나의 경험을 나누어보려 한다. 내가 파악한 책의 여러 특징을 이리저리 전해도 이 도서의 진짜 힘은 누군가의 경험으로 전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 판단했다. 아무래도 책에서 읽었던 철학 이론에 대한 내용도 담아야 했는데, 몇 개의 문단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느낌도 들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해보다는 철학이 일상에 스며드는 과정으로 글을 봐주시면 좋을 것 같다.



“삶에 정답은 없지만, 최선의 선택을 하는 방법은 있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에 부딪혔다면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그리고 그 누구보다 삶의 정답을 찾으려 노력했던 철학자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실마리를 얻어보자. 분명 어떤 한 가지 철학적인 사고방식이나 깨달음이 문제 해결을 위한 돌파구가 되어줄 것이다.”




***


"나조차도 어쩔줄 모르던 예민한 나"

 

책 속

[데이비드 흄 : 인간의 성장은

사고를 뒤흔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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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필자가 책을 읽은 후 남긴 메모



예민한 사람의 정확한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예민함 때문에 일상이 휘청이는 일이 빈번하다면 예민한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온종일 그 문제를 붙잡아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문제가 신경 쓰이는 사람이었다. 의도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머릿속이 잔뜩 꼬여버린 나를 가라앉히는 데에 일상의 많은 순간을 써야 했고, 그럴 때마다 흔들리는 일상을 보며 예민한 나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감정을 잘 통제하지 못하는 것 같고, 나를 잘 제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죄책감마저 들기도 했다.


그러다 사건이 하나 일어났는데, 평소 소음으로 나를 괴롭혔던 옆집 때문에 새벽에 잠에서 깨버린 것이었다. 다시 2시간을 뒤척이다가 화를 못 참고 종이에 참아 왔던 말들을 쏟아내 옆집 문에 붙이고 들어와 버렸다. 그렇게 딱 끝내면 좋은데 마음속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충분히 자지 못하고 시작하는 오늘 하루가 걱정되기 시작하고, 방금 붙이고 온 종이에 내가 쓰지 말아야 할 말을 썼나 고민되기 시작하고, 보복 같은 건하지 않을지 두렵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원인 모를 죄책감을 느끼는 내가 너무 싫어졌다.


그러다 다른 거에라도 관심을 돌려보자며 막 읽고 있던 <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수업>을 무작정 읽기 시작했다. 속은 여전히 씩씩거리고 잠도 잘 못 잔 머릿속은 윙윙거리고 제대로 될 독서가 될 리 없는 채로 무심코 책장을 넘기다 순간 번뜩이는 부분을 만났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대부분의 고뇌, 즉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 걸까?’, ‘나의 존재가 혹시 위태롭지는 않을까?’ 등의 생각은 모두 아집*에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공공장소에서 모욕을 받거나 누군가에게 푸대접을 받는 등 창피를 당했다고 해봅시다. 이럴 때는 당신 안에 있는 핵심 부분인 자아가 상처를 받아서 상당히 불쾌한 기분이 들게 마련입니다.


- 103p

*아집: 불교 용어. ‘나’에 기반한 관념이 형성한 습관적인 사고(같은 도서에서 인용)

 

 

철학자 흄에 대한 내용 중 일부였다. 이 문단을 읽자마자 이건 나의 이야기라는 걸 깨달았다. 원하지 않은 일, 침착하지 못한 나의 모습 등 여러모로 불쾌하고 답답한 지금 이 순간의 이야기.

 


하지만 만약 그 자아가 외관상의 모습에 불과할 뿐 실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런저런 생각에 괴로워할 일이 없어집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무언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행복을 낭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103p

 

 

갑자기 머릿속이 백지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 사건으로 불쾌한 자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나는 바로 몇 페이지 앞으로 돌아가 저자가 설명한 흄의 철학에 대해 다시 읽어 보았다.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런 상상 속의 내재적인 핵심을 자아라고 부르며 자기 자신을 인식합니다. 하지만 그 핵심을 배제하면 거기에 남는 것은 연속적인 경험의 흐름 뿐입니다. 아직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면 불을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불은 끊임없이 열기를 피워 올리고 빛을 발산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을 하나의 물질이라고 느끼는데, 사실 이는 착각일 뿐입니다. 불이란 발광하는 기체가 연속적으로 확산하고 있는 현상일 뿐입니다. 즉 하나의 물질이라고 불릴 만한 핵심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인간 영혼의 세계를 끊임없이 솟아나는 경험의 흐름이라고 간주하고 거기에 내재적인 핵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자아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 99p ~ 100p

 

 

데카르트는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처럼 생각하는 행위, 심지어 나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조차도 생각하는 주체인 ‘나’가 있기에 가능하므로 생각하는 것은 곧 존재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전의 사고하던 주체와 이후에 사고하는 주체는 같은 하나의 자아, 즉 의심할 여지 없이 연속성과 연계성이 있는 자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사고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자아의 존재를 어떻게 확인해야 할까. 그리고 그 이전에 사고한 주체로서의 자아는 다음에 사고하는 주체인 자아와 정말 같은 자아일까? 흄은 이처럼 데카르트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 자아’를 의심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내재적인 핵심’이라 말하는 자아를 확인할 수 있는 어떠한 경험을 한 적도 없었다. 마치 뉴턴이 지구의 인력에 대해 자신이 본 현상으로 설명했지만 정작 그 지구의 인력 자체는 확인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연속성과 연계성을 가진 단 하나의 자아라는 것은 결국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는 여지가 남아있는 것이었다.


책의 저자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흄의 철학을 알고 난 후, ‘나’의 존재를 지우는 연습을 통해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의도대로 되지 않은 일 앞에서 분노처럼 감정의 파도가 일어날 때 ‘나’를 지우고 나서 분노하게 했던 일을 바라보면, 서서히 감정이 가라앉으면서 사건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고 구체적인 경험담을 통해 전해주었다. 또한 육체적인 아픔을 느끼는 순간에도 ‘나’라는 관념을 지워 생각하는 행위로 육체적인 아픔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픔을 감정적으로 불평하지 않고 냉정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나’라는 관념에서 벗어나라


‘나’를 지워보라니, 엄청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흄의 철학이었지만 나는 가만히 생각해봤다. 자아가 없다는 생각까지 가지 않더라도 지금의 자아가 그 이전의 자아와 꼭 같은 자아가 아니라면, 지금의 나는 새벽 소음에 받은 이전 자아의 상처를 구태여 안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 일은 몇 분 전의 자아의 일이지(어쩌면 존재하지 않은 자아의 일) 지금의 당장의 경험이나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명 소음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 될지는 모르지만, 우선 내가 겪은 지나친 감정들은 과거의 자아에게 맡겨두고 나는 지금의 자아로서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적용하는 게 맞나?’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지나치게 가까웠던 불쾌한 일과 나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겪은 불쾌함은 그저 불쾌함으로 덩그러니 남고 나는 오롯이 지금의 나로서, 혹은 정말 ‘나’를 지운 지금 이 순간의 존재로만 남은 것이다. 더 이상 불쾌함은 지금의 자아에겐 없는 것이니 나는 평소처럼 이 순간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면 지금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닌 불쾌함에 잃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었다.


자주 들려오는 ‘지나간 일은 그냥 잊어’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각 전환이었다. 흄의 철학 위에선 ‘잊어야 하는 이유’가 ‘그냥 그래도 되는 것’이 아닌, ‘명확한 의미가 있는 이유’가 되어 있었다. 덕분에 이른 새벽의 두려움과 달리 그날 하루는 나름대로 잘 지낼 수 있었다. 물론 단번에 변하지는 못하고 자주 새벽의 불편한 일을 떠올렸지만, 그 순간마다 흄의 철학대로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어쩌면 그날 하루는 흄의 철학을 일상에 적용하는 연습을 시작한 날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


“인생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철학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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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지적 겸손을 통해 그토록 받아들일 수 없었던 타인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고, 행복이라 믿었던 것들이 깨졌을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 철학에 기대어 무너지지 않을 힘을 얻는다. 또 나를 휘두르고 가로막는 감정에 빠졌을 때, 데카르트에게 감정에 압도되지 않고 유연해지는 법을 익힌다. 다른 사람과 자신의 인생을 비교하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힘든 이에게 니체는 자기답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며, 프롬은 우리가 사랑에 실패한 진짜 이유를 말하며 사랑에 성공하는 비법을 알려준다. 지금, 고민과 걱정으로 힘든 새벽을 보내고 있다면 죽은 철학자들이 남긴 지적 유산에 귀를 기울여보자. 생각지도 못한 위안과 평안을 얻고, 더 나은 내일을 사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며칠 전 이 책을 선택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여러 고민을 안고 있다가 아주 마음을 먹고 철학 도서를 찾아 선택하게 된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때까지도 막연한 마음뿐이었다.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겠지!”가 아닌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겠지?”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수업>을 읽은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막연한 마음은 확고한 무엇인가로 변화하는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정답을 얻거나 완전히 믿을 수 있는 방법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 내가 던지던 '나'와 삶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질문 그 자체로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여러 철학을 만나면서 나는 더 나의 삶을 스스로 고민하고 싶어졌고, 어렵더라도 나를 받치던 외부에 의한 삶의 기준을 버려두고서라도 나만의 기준을 찾아가고 싶어졌다. 용기가 생긴 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용기가 생긴 이유는 내가 살아갈 나의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생겼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허공에서 두리번거릴 필요 없이 이제는 손에 붙잡고 만지작거려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고방식이 생겨난 것이었다. 확실한 것이 없는 고민 사이에서, 확실하게 내가 사유해 볼 수 있는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수업>은 단순히 철학 입문서라기보다는 ‘나’와 인생에 대해 철학하는 첫걸음이 되어 줄 수 있는 도서라고 소개하고 싶다. 철학이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철학과 삶이 모두 주인공으로 자리한 도서다. ’인생수업’이라는 단어처럼 이 도서는 철학 이론에 대한 설명과 함께 삶에 대해서 철학하고자 한다. 철학한다는 말이 조금 거창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필자의 이야기처럼 나를 고민하고, 살아가야 할 인생을 고민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한결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나는 누구지, 나로서 살아가는 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가지신 분이라면 더욱더 좋은 만남이 될 것이다. 삶을 고민할 수 있는 정답 없는 수많은 방법 중 철학을 만나보는 것도 분명 의미 있는 경험이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의 경험에 의하면 <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수업>을 통해 새롭게 나와 삶을 바라보고, 완고한 사유로 지어진 철학자의 철학 위에서 구체적으로 질문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이 어렵고 낯선 것이라고 하면 어렵고 낯선 것이 될 것이고, 마음을 두고 일상에 불러올 수 있는 학문이라 한다면 철학은 인생수업으로 다가올 것이다. 마음을 두고 철학에 다가간다면 분명 반복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다.

 

*


처음부터 글을 다시 살펴보니 조금 아이러니하게도 글의 시작에 있던 나의 인생이나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은 특별한 정답을 얻지 못한 채 글의 끝으로 향해가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모습이 더 좋을 것 같다. 그만큼 어려운 질문이고, 그만큼 당장 대답하기에는 이후에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질 질문이기 때문이다.

 

<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수업>은 질문부터 답을 얻는, 마치 ‘완성된 과정’ 같은 시간을 주었다기보다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하나의 단단한 디딤돌을 마련하는 시간을 주었고, 내게 세상을 볼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과 그래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를 안겨주었다.


'그래 이거야!'를 외치며 얻은 정답은 없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사르트르의 문장과 함께 글을 마무리 짓고 싶다. 우리는 태어날 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정해진 채로 태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최초의 인간을 말하는 성경조차도 인간이 태어난 목적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정답이 없는 아이러니한 자유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행동해야 하는지, 나를 정의해야 하는지 더욱더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인간이지만, 한편으론 무한한 가능성과 방향을 가진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일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 의미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존재”


-장 폴 사르트르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하는 나의 행위는 결국 ‘나’라는 의미를 스스로 창조하는 과정이다. 사람이 본래 선하거나 악한 존재로 정의된 채로 태어난 것이 아닌, 선한 행위를 통해 선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만들어지고 악한 행위를 함으로써 악한 사람이라는 정의를 스스로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철학을 우리 일상에 불러온다면 매 순간, 일상에서 내가 하는 행위들은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소중한 순간이라는 깨달음이 생겨난다. 그리고 다가올 시간도 어느 하나 사소하지 않게 우리의 존재 의미를 창조하는 모습으로 흘러갈 것이다.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들에 의미 없이 반복되는 것 같고, 거창한 일 없이 나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 같아도 결코 사소한 일들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나 자신에게 전하며 글에도 함께 남겨본다. 작은 행동에도 나의 존재를 담는 것에서 나로서 살아가는 삶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행동한다는 것은

세계의 모습을 바꾸는 일이다”


-장 폴 사르트르

 

 


 

 

[도서정보]


『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수업』

-철학은 어떻게 삶에 도움이 되는가-



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수업_입체.jpg

 


지은이

시라토리 하루히코,

지지엔즈


옮긴이

김지윤


펴낸곳

포레스트북스


분류

철학일반


가격

16,000원


출간일

2020년 3월 6일


페이지

272쪽

 

 


 

 

오예찬_PRESS.jpg

 


[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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