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윤희에게(Moonlit Winter), 달빛이 비치는 차가운 밤 그대를 떠올리며 [영화]

글 입력 2020.02.27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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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많은 영화애호인들의 기대 속에 임대형 감독의 <윤희에게>가 개봉했다.


김희애 주연의 다양성 영화, 어쩐지 김윤석 감독의 <미성년>이 떠오른다. 다양성 영화는 상업영화와 대비되는 의미로서 상영 규모나 주제의 측면에서 <미성년>보다는 <윤희에게>가 조금 더 가깝겠지만, 사실 두 작품 모두 어느 하나로 규정되기에 모호한 측면이 있다. 다양성영화와 상업영화의 기준이 사실 모순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예산 독립영화나 명백한 상업영화는 논쟁의 여지가 없겠지만, 위의 두 작품처럼 기존의 상업영화와 구별되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이름있는 배우들이 주연을 맡고있는 경우 구분이 의아해진다. 이러한 구분이 오히려 '상업영화'의 작품성과 '다양성영화'의 수익성을 틀에 가둘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두 가지 구분 사이의 모호한 영화는 두 가지 모두 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윤희에게>는 한국에서 전례가 없는 중년 여성의 퀴어 영화이면서 언성 한 번 높이는 인물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작품이지만 12만 명이 넘는 관객수를 달성했다. 다양성 영화로서는 꽤나 흥행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 배경지가 일본이라는 점이 당시 가열되던 일본 불매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흥행의 물결을 타던 중 급격히 반응이 시들해지며 상영이 마무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잊혀지기엔 너무나도 아쉬운, 작품성 높은 한국영화라고 생각했다. 다시 찾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며 이 글을 남기어본다.



앨범을 보는 윤희.jpg


 

윤희에게, 편지의 수신인을 의미하는 영화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의 이야기는 윤희에게 도착한 편지 한 통으로부터 시작된다. 편지 내용을 읊어내려가며 극이 진행되지만 편지를 읽어가는 사람, 즉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윤희가 아닌, 윤희의 딸 새봄이다. 윤희, 그리고 편지의 발신인 쥰은 이제 40 즈음이 되었을 중년 여성들이다. 둘은 서로를 '옛친구'라 칭한다.


하지만 '친구'라는 이름으로 명명되기에 편지는 너무나도 다양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글자 하나하나에 감정을 꾹꾹 눌러담아 힘겹게 써내려갔을 그 편지에 새봄은 혼란스러워진다. 자신의 엄마가 아닌 '윤희'에게 온 편지를, 새봄은 고민 끝에 그대로 받아들였다. 비록 엄마의 어린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새봄은 알 수 없지만 편지를 보내온 사람이 그녀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쯤은 새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새봄은, 윤희에게 여행을 제안한다. 그들은 쥰이 살고 있는 곳, 오타루로 떠났다.



일본에 도착한 윤희와 새봄.jpg


 

새봄은 그곳에서 자신의 엄마를 '윤희'로서 마주한다.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맨 그녀의 모습에 '예쁘다'며 감탄했다. 엄마의 습관을, 과거를, 그 낯선 두 글자 이름을 새봄은 새로운 공간에서 다시 마주하는 것이다. 결국 여행의 마지막 날 밤, 새봄은 윤희와 쥰을 위한 자리를 만들었다. 이 만남은 마치, 편지를 대신 부친 쥰의 고모와 만남를 만든 새봄에 의해 이루어진 듯 보이지만, 사실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수십 번은 써내려갔을 쥰과 직장을 그만두고서라도 오타루 행 여행을 택한 윤희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이 그들이 서로를 위해 딛을 수 있는 가장 큰 발걸음이었을 것이다.


학창시절 그들의 만남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임과 동시에 함부로 꺼내볼 수 조차 없는 아픔이었다. 윤희는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된 채 사랑하는 이에게 헤어짐을 고해야했으며, 쥰은 영문을 알 수 없이 헤어져야만 했다. 쥰은 윤희에게 편지를 쓰던 날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던 손님에게 용기내어 이야기한 바 있다. "혹시 여태까지 숨기고 살아온 게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숨기고 살아요." 여전히 윤희를 잊지 못함과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에 당당했던 그 기억이 그녀에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워하는 것조차 그 이에 대한 기억을 닳게하는 듯 조심스러우면서도, 오랜 상념이 때때로 스스로를 할퀴어가매 무디어진 척 스무 해를 보냈을 그들은 다시 만날 순간을 위해 각자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한 것이다.



윤희와 쥰.jpg


 

결국 그들은 만났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오랜만이네.", "그렇네." 그저 짧은 대화를 주고 받을 뿐이다. 감독은 그들이 만나 나누었을 시간을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만월(滿月)이 뜬 그 날 밤, 그들이 관계를 다시금 끝맺음했는지, 아니면 어떠한 후약을 맺었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결말이었던 간에 중요한 것은, 한국으로 돌아온 윤희가 이전과 사뭇 달라졌다는 것이다.


쥰과 헤어진 후 그녀는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아픈 기억에 얽매여 죄책감에 끌려가는 삶을 살아왔다. 지독한 벌을 받는다는 마음으로, 울부짖는 자신의 목소리를 묵살해가며. 하지만 쥰을 만나고 돌아온 윤희는 처음으로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보고자 첫걸음을 내딛는다. 감정의 만월이 뜨던 그 날 밤의 만남을 통해, 그녀는 어디선가 단단히 엉키어버려 잘라낼 수도 없던 매듭을 이제서야 풀 수 있게 된 것이다. 쥰에게, 윤희가 읊어내려가는 편지와 함께 영화는 마무리된다.


"... 용기를 내고 싶어.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거야." ... 맑게 번지는 윤희의 웃음,

그리고 나즈막히,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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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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