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빛의 속도를 넘어 닿고 싶다는 간절한 희망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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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이다. 나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적게 소모되므로 심신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빠져든다. …그런 점에서 낙관과 비관의 차이는 쉽게 힘을 낼 수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인 점은 비관이 더 많은 희망의 증거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어둡고 무기력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관을 일삼는 사람이야말로 그것이 깨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 『빛의 과거』 p.319~320
은희경 작가의 『빛의 과거』를 읽고 오래 기억에 남았던 부분이다. 아무래도 삶은 세상과 희망을 긍정하며 불의와 싸우는 것보단, 그저 그런 현실을 비관하며 안주하는 것이 더 편하다. 소설 속 주인공도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여 세상을 바라보았고, 결국은 그것이 회피와 비관을 정당화하는 도구였음을 깨닫는다. 손쉬운 비관을 택하며 주어진 현실에 순응할 때, 진실은 왜곡되며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비관을 택했다는 것은 더 간절히 희망을 원한다는 것을 뜻한다. 주인공은 ‘다름’을 넘어선 ‘섞임’의 세계를 누구보다 원했을 것이다. 은희경 작가는 ‘우리의 현재는 과거로부터 온 빛’이라며, 과거를 어떻게 비추어보는가에 따라 현재도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한다. 편집하고 유기해버린 타인의 기억도 인정할 때 과거는 빛이 되어 현재에 닿는다.
반대로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모두 미래를 그린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미래를 통해 현재를 비춘다. 우주에서의 탐사와 연구가 더욱 활발해지고, 인간 배양과 생명 연장, 기억의 영원한 지속이 가능한 미래를 그리면서 소외된 이들, 타인과 현재를 살아낼 방법을 제시한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나’는 성인이 되어 지구로 떠나는 순례자들의 일부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에 의문을 가진다. 마을은 어떠한 흠을 가진 사람도 배척하지 않는 평화로운 곳이지만, 같은 자궁에서 태어난 똑같은 이들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에 빠지지도 않는다. 완벽하게 안정적인 이 세계에선 저항도, 고통도 없다. 그래서 마치 유토피아 같지만, 떠난 순례자들 중 일부는 항상 저 너머에 남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들은 ‘망각’된다.
‘나’는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 사실에 의문을 가지고, 마을을 만든 올리브와 릴리의 이야기를 찾아낸다. 릴리는 얼굴의 흉측한 자국 때문에 차별을 당했다. 그래서 유전적으로 완벽한 인간을 배양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결국 크게 성공하여 세계는 모두 완벽한 인간들로만 구성된다. 배양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은 완벽하게 분리되어 주변부로 밀려났다. 릴리는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 올리브를 배양하지만 올리브에게도 릴리와 같은 ‘결함’이 발생한다.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실수였고 폐기하면 그만이었지만, 릴리는 올리브를 차마 없애지 못한다.
그래서 릴리는 어떤 결함이 있어도 서로의 존재를 배제하지 않는 마을을 만든다. 올리브는 그곳에서 아무런 차별의 시선 없이 자랐다. 하지만 올리브는 마을과 릴리에 대한 진실을 알기 위해 지구로 떠났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에는 지구에서 도움을 줬던 델피와 함께 남아 분리주의에 맞섰다. 그리고 마을에서 다른 세계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채 안정적으로 살았던 이들이 진실을 마주하고 선택할 기회, 즉 ‘순례’라는 관습을 만든다.
마을에는 평화와 안정이 있지만, 대신에 낭만적 감정이나 사랑이 없다. 김초엽 작가는 왜 완벽한 평화와 사랑이 공존하지 못하도록 설정했을까. 아마 소설 밖의 우리는 어떻게든 타인과 마주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타자와 완전히 같아질 수 없다. 지구는 완전히 다른 수많은 타인이 공존하는 곳이기 때문에 고통과 차별이 있지만, 동시에 사랑도 있다. 올리브와 일부 순례자들은 진실을 마주하고 사랑하는 이들과 억압에 맞서는 것을 택했다. 완벽한 안정과 평화 대신 혐오와 차별의 세계를 선택하는 것이 비논리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것은 단 한 명의 사랑하는 사람으로도 충분한 선택이었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며 고통을 향해 기꺼이 나아간 올리브와 순례자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많이 울고 부딪히겠지만, 그만큼 누군가와 사랑하고 행복할 것이다.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은 완벽한 분리가 아니다. 나와 완전히 다른 이들과 섞이는 것, 그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 그러면서 차별과 분리의 세계에 맞서는 것이다.
“지구에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충격적으로 다른 존재들이 수없이 많겠지. 이제 나는 상상할 수 있어.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 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 p.52
하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인류 역사 내내 혐오와 차별은 항상 있었고, 타자를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실상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래서 혐오와 차별의 소멸은 영원히 이르지 못할 사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김초엽 작가는 표제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향해 가야 한다고 말한다.
안나는 폐쇄된 우주 정류장에서 슬렌포니아로 가는 우주선을 한없이 기다린다. 한때 인류는 워프 항법을 통해 다른 행성으로 이동했고, 그 기술은 시간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안나의 딥프리징 기술이 필요했다. 하지만 웜홀이 발견되면서 인류는 웜홀을 통해 갈 수 있는 행성만을 개척했고, 워프 항법을 통해 가던 슬렌포니아 행 우주선은 종료되었다. 안나는 슬렌포니아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딥프리징 기술로 동결과 각성을 반복하며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주선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우주 정거장’을 철거하기 위해 찾아온 남자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해준 후, 안나는 자신의 조그마한 구식 우주선을 타고 ‘방긋 웃으며’ 슬렌포니아로 떠난다. 비록 그 우주선은 슬렌포니아에 결코 닿지 못하겠지만, 만약 닿는다 해도 이미 1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흘러 안나의 가족은 모두 죽었겠지만, 안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 p.181~182
안나는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는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으며, 매번 남겨진 사람들을 만들어 외로움을 늘려갈 뿐이라고 말한다. 언젠가 인간이 빛의 속도로 갈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 해도 남겨진, 소외된 사람은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타인과 함께 사랑하며 더불어 사는, 외로움이 없는 세계이다. 비록 너무나 이상적이고 현실성이 없을지라도, 적어도 그곳으로 가야겠다는 목표는 명확히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언젠가,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끝에’ 정말로 도착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미래로 향하는 빛을 통해 지금의 우리를 보게 한다. 우리가 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을까. 저 빛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언젠가 그곳에 갈 수 있을까. 아무리 보아도 절대 닿지 못할 것 같아 비관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그 비관은 그곳에 이르고 싶다는 간절한 희망일 것이다. 그러므로 비관에 빠져 회피해서는 안 된다. 아주 희미한 빛일지라도 꿈꾸어야 한다. 남겨진 이들이 없는, 타인과 함께 하는 사회를 향해 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와 우리를 돌아보며 작은 변화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과정은 아마 매우 괴롭고 힘들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행복할 것이다.
[정다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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