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비가역적인 관계가 빚어낸 정상성 - 연극 '듀랑고(Durango)'

연극 <듀랑고>
글 입력 2020.01.24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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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의적인 정상성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서 드는 생각은, 내가 이 관계에서 그들과 형성한 무언의 특질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학창 시절 도덕 시간이나 가정 시간에 배웠던 일반적인 내용과 사뭇 다르다. 학교가 우리에게 가르쳤던 내용은 주로 현대인의 가족 구조가 과거에 비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서다. 이를테면 대가족 형태에서 핵가족 형태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말 그대로 교과서적인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학교는 구성적 차원에서의 일반성만 우리에게 가르칠 뿐, 구성적인 특징 이외에 제각기의 가족마다 존재하는 비일반적인 정상성에 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이를 터득하고 체화하는 일은 순전히 개인의 몫이다.

 

이상하게도 그 과정에서 가장 노력을 많이 해야 하는 쪽은 가정을 이끌어가는 위치에 놓인 성인이 아닌, 어린 아이다. 이미 어른이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만들어 놓은 무의식적인 정상성을 아이는 부모와, 그에 준하는 다른 어른과 지내며 터득해야 한다. 그렇게 학습하면서 아이는 성장한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 어딘가가 계속해서 곪아 간다. 그 상처를 인지하건 인지하지 않건, 그 과정에서 다른 가족과의 소통을 꺼리거나 어려워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 어른들은 그것을 이해하건 이해하지 않건, 여전히 가족 사이에 만연한 특유의 정상성을 강요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때 부모로부터, 부모와 나이대가 비슷한 다른 어른으로부터 들리는 이야기는 가지각색이다.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 네가 우릴 이해해야 한다, 가족을 이해해야 한다, 다 네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러는 것이다, 우리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데 너는 이걸 아느냐 모르느냐. 이런 말을 듣는 나이가 되기 이전의 아이에게는 최소한의 변명도 없이 그저 아이를 다그치거나, 무언의 압박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달래기만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러다가 위의 말들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면 어느 정도 아이에게까지 책임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는 무력하다. 아이는 성장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선다. 특히 가족에의 효를 중시하는 전통이 있는, 이런 사회에서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난 우리 같은 아이들은 부모 앞에서 굉장히 무력해진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다 내 탓입니다. 라는 말 이 외에 무엇을 내뱉을 수 있겠나. 그들의 말처럼 가족은 구성적인 요소 외에 정신적인, 무형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다양성을 저마다 띠고 있다. 그 다양성은 가족 내에서 “특수한 정상성”이 된다. 굉장히 아이러니한 일이다. 보통 정상성이라는 말은 분명 절대 다수에게 만연하고 보편타당한 무언가를 대상으로 정당화를 시도하고자 할 때 쓰이지 않는가.

 

“우리 가족은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거야, 이게 우리의 규칙이야.” 자녀는 쉽게 항변할 수 없다. 나는 자녀에게 불효의 책임을 묻는 것이 생각보다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소통이 어려워지고 개인의 관계가 날이 갈수록 삭막해지는 현상은 가족의 관계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난다. 한 가정 안에서 성립하는 정상성은 지극히 자의적이고 그것을 체득하며 첫 번째 사회화를 감행해야 하는 아이들은 무방비한 약자로 전락한다. 아이는 고통 받는다. 참으로 답답한 것은, 아이만 고통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부모나, 가족의 다른 일원이나 그들이 암암리에 규정한 정상성에 얽매이며 살아간다. 그래서 함부로 근본적인 원인이 당신들에서 비롯된 것이라 비난하기도 어렵다. 그렇게 응어리는 쌓인다. <듀랑고>는 쌓인 응어리를 분출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어디까지 분출되는지, 갈등의 양상을 좇으며 서사를 관조하는 것이 내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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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랑 관련이 없는 사진.


 

 

2. 인상적인 연기, 인상적인 캐릭터성


 

배우들의 연기가 연극을 기억하게 하는 요소 중 하나였던 적은 드물었다. 내가 관람했던 연극에서 대부분의 배우들은 준수한 연기력을 보여주었고 그것만으로 극에 몰입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항상 연극을 관람할 때면 배우들의 감정선보다는 작품 자체의 플롯, 무대장치, 플롯이 전개되는 내러티브 등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이번 연극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앞서 열거한 것들이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였다. 특히 아이삭 역할을 맡은 배우분의 연기가 굉장히 놀라웠다. 아이삭은 극중에서 겉으로는 능청스럽고 장난기가 많은 것 같아 보이면서도, 아버지가 강요한 진로나 아들로서의 좋은 모습에 부응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감정의 골이 무척 깊은 인물이다. 비아냥거리며 재치 있는 농담을 던지면서도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는 “잘못”에서 기인하는 불안함을 동시에 내비췄어야만 했는데, 담당 배우 분께서 아주 훌륭하게 연기해 주셨다.

 

부승과 지미를 연기하신 배우 분들도 마찬가지였다. 부당해고를 당하고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부승은 타인과의 비교를 일삼으며 “훌륭한 가족”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이다. 직업을 가진 가장이라는 직위는 본인이 행사할 수 있었던 권력이자, 그 자신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었던 결정적인 요소였다. 한국에서 좋은 일자리를 얻고 높은 직위까지 올라간 친구들을 언급하며 자괴감을 느꼈던 대목이 이를 증명한다. 그럼에도 자신은 미국이라는 선진국에서 나름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통보된 해고로 그는 그런 자기 위로조차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두 명의 아들 앞에서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하지만, 누가 봐도 부자연스럽다.

 

인물이 겪어야만 하는 절망적인 시련을 배우 분이 실감나게 연기하셨다고 느꼈다. 특히 수영장에서 우연히 만난 행인에게 갑자기 일자리를 잃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자신보다 훨씬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좋은 환경을 지닌 행인에게서 단편적인 위로를 들을 때, 그가 일순간 느꼈던 자괴감이 온전히 배우의 표정 연기를 통해 그대로 느껴졌다. 대사 한 마디 없이 감정을 표현하는 내공에 감탄했다.

 

지미의 경우 아버지나 형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늘 웃는 얼굴로,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으로 사교성을 드러내지만 만화 그리기를 통해 숨겨야만 하는 본인의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거나 재능이 있지만 흥미는 가지 않는 수영을 그만두는 등의 자기 갈등을 겪기도 하는 인물이다. 끝까지 좋은 아들로 남기 위해 스스로가 생각하는 본인의 치부를 숨기고자 발버둥치는 모습이 안타까웠고, 한편으로는 끝까지 사랑스럽고 모범적인 아들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아 아쉬웠다. 그럼으로써 극의 후반부에 도달할수록 본인의 미성숙함을 있는 그대로 선보였다고 생각했다. 지미를 맡은 배우 분이 지미의 미성숙함을 잘 연기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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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른 의미로 속이 편할 수 없었던 마무리


 

당신들 도대체 뭘 하는 거냐. 연극을 보면서 끊임없이 들었던 의문이다. 아마 연출이 의도했던 바도 비슷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짜고짜 여행지를 이름조차 생소한 듀랑고로 정해버리고, 여행을 떠나는 와중에도 타인의 자녀와 본인의 자녀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본인 자식을 깎아내리는 아버지나, 가지 않겠다고 항변하긴 했지만 어쨌든 아버지를 따라 나선 상황에서 대놓고 불쾌함을 드러내는 아이삭이나, 이미 망쳐진(...) 분위기를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애를 쓰는 지미나. 시놉시스에 따르면, 관람한 바에 따르면 본 작품은 관계가 삐걱거리는 가족이 여행을 떠나면서 각자가 품어 왔던 내면의 상처와 갈등을 폭로한다는 흐름을 이어나간다.

 

이때 연극이 해피엔딩으로 끝나거나 어떤 문제가 표면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조짐이 보이게 되면, 맥이 빠진다. 온갖 갈등을 표출함으로써 만들어낸 극적 긴장이 그대로 풀려버린다. 그래서 나는 파멸적인 엔딩을 원했다. 차라리 이대로 감정을 모조리 표출한 후에 각자 뿔뿔이 흩어지거나, 더욱 극단적으로는 누구 한 명이 목숨을 끊길 바랐다. 그렇게 가족 사이에 만들어진 정상성이 근본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것임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연극은 어정쩡한 판타지에 지나지 않을 것이란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는 쉽게 보여줄 수 없는, 가족에 내재된 갈등과 서로가 서로에게 가지고 있었던 애증과 불만으로 점철된 답답함을 분출하는 것. 현실에서 가족 갈등은 생각 이상으로 빈번하게 발생한다. 감정의 그릇이 더 이상 갈등을 참아내지 못할 정도로 꽉 차게 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이때 감정이 폭발하면서 서로에게 내뱉는 폭언에 대해, 폭언이 가득했던 가정 싸움에 대해 타인에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정말 친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주변에 이런 일이 있었음을 알리는 것 자체를 꺼린다. 이렇듯 가정사의 모순은 관계를 유지하는 설사 알린다고 해도 본인과 타인의 기분만 상하게 하는 이야기일 뿐이기에, 타인에게 공개하기 무척이나 힘든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타인을 마주할 때 말 그대로 속이 편할 수가 없다.

 

<듀랑고>에서 부승 가족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부승에게든, 아이삭에게든, 지미에게든 조금이나마 공감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저마다의 가정에 존재하는 이상한 정상성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을 타인에게 함부로 공개할 수 없어서, 고통을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감내해야 하는 현실. 대부분은 이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직면하고 나서도, 다시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정말 작정하고 서로의 밑바닥까지 보겠다는 심정이 아닌 이상,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이쯤 싸우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각이 생기기 시작한다. 미지근한 타협에 성공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또 다시 상처가 쌓이고 또 다시 싸움이 반복된다. 싸움이 반복된다는 것은 서로간의 갈등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밑바닥까지 건드려서 끝장을 볼 필요는 없다는, 무의식으로 가족의 현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위기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의 밑바닥을 어떤 연유로든 보게 되는 순간, 관계는 이전처럼 유지될 수 없다. 타협이 상당히 어려워진다. <듀랑고>에서 부승 가족이 처한 상황도 분명 그랬다. 가족은 서로의 선을 넘었다. 그런데 연극의 말미에 아이삭은 아버지에게 지인을 통해 다시 인터뷰 일정을 잡아 준다면 하와이로 돌아가 의대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말한다. 지미는 형이 자신의 치부, 즉 의대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는 파격적인 행보와 아버지가 너무나도 지긋지긋하다는 무례함을 드러냈음에도 본인이 학교 수영부에서 나왔다는 소리는 일절 내뱉지 않는다. 자신을 아꼈던 아버지가 자신에게 씌운 승리자, 착한 아들이라는 프레임을 끝까지 포기하지 못했다. 부승 역시도 아들을 향한 사과도 일절 하지 않은 채, 별 일이 없었다는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려고 한다.

 

상당히 김이 빠지는 엔딩이었다. 굳이 이렇게 끝을 맺었어야 했나, 아쉬웠다. 다시 붙이려고 시도할 수조차 없어진 상태의 유리 조각을 애써 모아 원 상태의 유리컵으로 되돌리려는 것만 같았다. 관계가 파탄이 나는 지경까지 이르길 원했건만. 다른 의미로 속이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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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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