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생긴 일]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글 입력 2020.01.20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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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감옥이다. 이 무슨 중2병 같은 말인가 싶을 수 있겠지만, 교환학생 생활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나는 아래의 이미지를 절로 떠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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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들은 중국 영화 강의는 수강 인원이 스무 명도 채 되지 않는 소규모 강의였다. 대부분이 중국인 유학생들이었고, 백인 학생이 2명, 한국인은 나 혼자였다. 교수님께서는 중문학을 전공하신 백인이셨고, 그래서 수업시간에 종종 중국과 미국의 문화를 비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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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바라본

뉴욕 맨하탄의 풍경

 


그중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것은 아시아와 미국의 도시 공간을 비교했던 수업이다. 늘 아시아로만 여행을 다녀서 막연히 미국 도시의 모습도 비슷하겠거니 생각하고 미국에 가게 되었고, 실제로 생활해보니 별로 다를 게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아시아와 미국의 도시가 다르다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니 미국의 도시에는 서울처럼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은 거리가 없었다(관광객이 가득한 뉴욕의 타임스퀘어를 제외하면). 반면 서울에서는 늘 무언가에 쫓기듯 ‘지옥철’에 몸을 싣고 통학을 하고, 거리에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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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포분자> 스틸컷

 


영화 <공포분자>는 이러한 아시아의 도시 공간에서 살아가는 중산층의 존재론적 위기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작년 한국에 재개봉한 <타이페이 스토리>의 감독 에드워드 양의 작품이다. 타이페이를 배경으로 도시인의 모습을 그린다는 점에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타이페이 스토리>와 함께 ‘타이페이 3부작’으로 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공포분자>는 영화의 등장인물이 여느 영화처럼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거나 교훈을 주거나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특징적인 것은 타이페이라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등장인물처럼 그려진다는 점이다.


푸른 빛을 띠고, 롱 숏으로만 비춰지는 타이페이는 밝은 낮에도 위태롭고 불안한 공간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도시에는 사이렌이 울려 퍼지고, 총성이 울리고 사람이 죽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몇 차례 등장하는 개 우리와 짖어대는 개, 직접 만나지 않고 전화로 소통하는 사람들, 찰랑거리는 열쇠까지, 타이페이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옥과도 같은 공간으로 그려진다.


사실 영화가 타이페이를 배경으로 한다고 했지만, 관객들이 영화 속 공간이 타이페이라고 알아챌 만한 단서는 주어지지 않는다. 서울이나 도쿄라고 해도 믿을 법한, 아시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높고 낮은 건물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사람들은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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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어느 나라에 있든 탄생부터 효율성과 반복이 바탕에 있었다. 하지만 유럽이나 북미의 도시처럼 오랜 시간을 거쳐 자연스럽게 형성되지 않고, 정부 주도로 급성장해온 아시아의 도시에서 그러한 특성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좁은 공간에 더 많은 사람이 살게 하려고 건물은 좁고 높게 지어지고, 복잡한 대중교통 노선이 마련된다. 그래서 아시아의 도심은 공간과 사람 모두 여유가 없다는 느낌을 준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지난 에세이에서 다루었듯 어느 나라의 학교든 효율성을 중시하고, 예술보다는 언어나 수학에 더 방점을 두는 것은 공통적인 것으로 보이나, 아시아의 학교는 훨씬 더 경쟁적이고,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내가 ‘학교’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공간은, 하루의 반 이상을 교실에서 보냈던 고등학교다. 오전 4시간, 오후 4시간 수업을 듣고, 밤에 4시간 동안 자율학습을 하고 집에 돌아가는 생활을 꼬박 3년을 했다. 말만 자율학습이지, 자율학습에 빠지기 위해서는 그 시간에 학원에 간다는 확인서와 부모님의 동의서가 필요했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최소 2시간은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앉아있어야 하고, 음악도 들을 수 없고, 음식도 먹을 수 없는 곳은 결코 정상적인 공간이 아니다. 모두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반적인 노력으로는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믿으며, 몸과 정신이 상하는 줄도 모르고 그것들을 견뎠다. 행복은 대학생이 된 이후로 미루면서, 하루하루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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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트라즈 감옥의 독방

 


미국에서 들은 또 다른 강의인 ‘Psychology, Law, and Social Policy’에서 감옥이 독방이 죄수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배웠다. 독방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죄수들은 인지적으로는 안과 밖, 근거리와 원거리를 구분하기 어려워하고, 심리적으로는 사회 부적응, 범불안장애를 겪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증상들이 완전히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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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신학기, 수능 즈음이 되면 학업 스트레스나 불안과 관련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10대에 경험하는 치열한 경쟁과 스트레스가 당연한 양, ‘수험생 불안 대처법’이 여기저기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당연하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 학교는 말 그대로 배우고 익히는 곳이어야 하지, 감옥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만 살았다면, 공간이 이토록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왜 아시아 사람들은 공부를 잘하고, 열심히 일한다는(hard-working) 편견이 생기게 되었는지, 왜 미국인들은 유난히 여유로워 보이는지를 몸소 느낄 수 있었던 한 학기였다.

 


[김채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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