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끊임없는 결핍의 글, 자소서 [사람]

글 입력 2020.01.14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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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서’, 자기소개서의 줄임말로 대한민국 청년이라면 안 쓸 수가 없는 글이다. 비단 회사에 들어가기 위함이 아니라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서도, 서포터즈, 기자단과 같은 대외활동에서도 자소서는 필수적으로 되었다. 현 한국에 살아가는 청년이면서 자소서를 써보지 않은, 쓰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의심이 될 정도이다.


이렇게 많이 쓰고, 쓰이는 글이라 그 자체에 대한 고찰보다는 ‘잘 쓰는 방법’이 중요하다. 내가 이렇게 잘 살았다고 말하는, 반성문의 대척점에 있는, 많은 사람 중 나를 뽑아 달라는 수많은 문장의 외침. 그래서 합격, 취업으로 이어져야 하는 외침.

 

오늘은 ‘어떻게 자소서를 잘 쓰는가’와 같은 실용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냥, 이 글 자체에 대해 살펴보자.

 


 

‘자소설’이라는 오명


 

 

자소서의 특성상 솔직하게 쓰기 힘들다. 회사에 매력적으로 보여야 하기에, 실제로 있었던 팀 프로젝트의 말싸움과 인류애 상실을 여실히 담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신은 협동심이 넘치는 사람이며 팀원들 간에 있었던 위기를 지혜롭게 넘기는 인간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이만큼 많은 활동을 하였고 잘난 사람이라는 것을 실제로 가진 것보다 과장해서 적어야 한다.

 

그래서 자소서는 ‘자소설’이라는 오명을 썼다. 현실에 없는 반듯한 인간을 만들어내 반듯한 가상의 스토리를 담았기에 소개서가 아닌, 소설이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재인지 증명할 수는 없다는 비판, 뽑히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낸다는 비판을 담은 단어이다.

 

분명히 틀린 지적은 아니며, 우리나라 공채 시스템이 지니는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얀 종이를 빽빽하게 채우기 위해 타자를 두드리며 자신을 증명하는 자소서의 지은이들까지 비꼬는 이 단어가 반갑지 않다. 이 묘한 글을 제출한다는 것은, 자신 안에서 여러 종류의 고통을 지나쳐 결국은 완성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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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서가 마주하는 것들


 

 

앞서 언급하였듯 자소서는 본인이 이렇게 좋은 인재임을 외치는 글이다. 그러나 이 외침은 너무 시끄럽지 않도록 은근하게 드러나야 한다. 즉 자기 자랑이지만 여러 포장을 거쳐, 확실하지만 거칠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외활동이나 봉사, 수상경력과 같은 증명 가능한 활동들이 있으면 좋다. 자신이 지난 몇 년간 했던 활동들을 추적해 본다. 그러다 ‘뭐 하고 살았지?’라는 질문과 맞닿고, 과거는 빠르게 공허해진다.


분명 무언가 한다고 했는데 자소서라는 여백 앞에서 지난 시간의 나는 무기력하다. 남들 한다는 ‘스펙 쌓기’에 동참했는데 막상 회사의 질문에 1500자 이내로 대답을 하려니 난감하다. 이렇게 채워도 채워도 부족한 자소서를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 끊임없는 결핍과 마주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새겨지는 글자 뒤에서 뻗어 나가는 가능성과 불가능성, 즉 불확실한 미래와도 마주해야 한다. 1차 합격 이후 면접을 준비하는 일, 최종합격 이후라는 행복한 가능성. 만약 이번에도 떨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막막한 불가능성. 전자의 기대감과 후자의 절망, 이 상충하는 두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것은 눈앞에 있는 자소서뿐이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다시 현실로 복귀하여 이것부터 써 내려가야 한다.

 

이렇게 자소서는 과거의 나를 들여다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재의 나를 증명해야 하며, 양극단에 서있는 미래의 나를 상상하는 것을 참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야 하는 글이다. 참 쓰기 힘들고, 이상한 글을 오늘도 많은 이들이 써 내려간다.


오은 시인의 시 <이력서>처럼,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을 '밥을 먹고', '밥을 먹기 위해' 쓴다.

 

 

밥을 먹고 쓰는 것.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나는 잘났고

나는 둥글둥글하고

나는 예의 바른다는 사실을

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밤에는, 그리고

 

오늘밤에도

내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달콤한 혀로 속삭이듯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다음 버전이 언제 업데이트 될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 쓰고 나면 어김없이 허기.

아무리 먹어도 허깨비처럼 가벼워지는데

 

몇줄의 거짓말처럼

내일 아침 문서가 열린다.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다.

 

- 오은, 이력서


 



[안루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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