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살아가는 당신과 내가 '신'이다. [음악]

글 입력 2019.12.15 02:2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크기변환]20020510.jpg

 

 

지하철에 탑승하려 카드를 찍는다. 표시되는 금액이 7만원 넘어갈 때가 있다. 그건 내가 꾸준히 이동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인간이어서 그렇다. 정착하여 안정을 누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계속 이동한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도움 될 만한 것들을 주워 담으러 가고 안정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곳에 웃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동한다. 주어진 좌표로만 이동하여 진자 운동하듯 살고 싶다. 그러려면 이동해야 한다.


거의 매일 지하철을 탄다. 어디로든 이동한다. 카드에 표기된 금액이 아무리 커져도 한 달이 지나면 리셋된다. 그것처럼 이동하는 삶은 무언가를 누적할 수 없다. 매 순간 제각각 방향으로 이동해서다. 토대를 이루거나 자기 삶에 거름을 줄 수 없다. 어차피 리셋될 거다.


‘열심히 이동한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 말일까. ‘열심히’는 성취를 수반하는 언어다. ‘열심히’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혹은 어떻게 이뤘다’는 문장이 뒤에 붙어야 한다. 그래야 어색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감히 ‘열심히’를 사용할 수 없다. 성취한 게 없다. 손에 있는 게 없다.


그게 나를 가두는 의식이란 걸 안다. 불필요하고 피곤한 생각이란 것도 안다. 어쩔 수 없다. 나는 혹은 당신은 결과와 지표와 명함에 기입된 직함을 먼저 파악하는 법부터 배웠다. 결과를 통해 과정을 알 수 있다고 배웠다. 결과는 과정이고 개인의 인생에 대한 증언이다. 결과가 삶이라면 어떤 결과도 만들어내지 못한 내 삶은 저기 바닥쯤에 고여 있을 거다. 나는 그렇게 열등감에 매몰된 속물이 돼 간다.


넉살의 ‘작은 것들의 신’을 들은 것도 그런 의식이 극에 달했을 때다. ‘작은 것들의 신’은 ‘나’를 주어로 삼고 쓴 노래다. 넉살 개인의 서사가 있다. 그의 서사에서 내 서사를 본다. 일상에 치이며 사는 절대 다수의 ‘작은’ 군중인 우리는 나름대로 열심이다. 최고가 되고 싶다. 무엇이든 성취하고 싶다. 그러나 ‘최고’란 가치는 소수만이 독점한다. 그런 이들만이 신처럼 숭배 받지만, 넉살은 그런 의식에 제동을 건다. 최고만이 신이 될 수 있는가. 그는 ‘신(God)’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린다. 살아가는 것. 삶을 지탱하는 것 자체가 무수한 최선의 노력이 전제돼야 한다. 살아가는 작은 우리가 ‘신’이다.


‘작은 것들의 신’이 인상적인 건 이런 지점이다. 이 노래를 발표할 무렵에 이미 씬에서 최강의 루키로 부상하던 그는 자기 계발의 신화를 쓰지 않았다. 고된 경험, 숱한 실패, 배제와 경쟁의 레이스를 통해 여기 온 것이라며 자기 입지를 선언하기는 쉽다. 그냥 남보다 내가 최고라고 일갈하면 그만이다.


그것보다 그는 일상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통해 리스너와 본인의 간극을 좁힌다. MC의 길이나 당신의 길이나 표지판에 명시된 지번을 확인하고 끊임없이 서성이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거다. 그는 솔직하다.

 

 

 

 




내 자리는 하수구 냄샐 맡으며

아주 작은 모니터 앞에서

그저 화면이 꺼지지 않게

마우스를 건드는 일이지

사회라는 싸움에 누군

마우스피스를 찾는데 말이지

전의를 잃은 전사에겐

남은 적이 없어

버스와 지하철조차

자리가 남은 적이 없어

날 담아두던 엄마의 뱃속도

이젠 다 식었구나

적의와 희망을 주던 열정도

구차하게 살아남았는가 나란 건

서른이 되기 전 떠나자 했지

몇 년 전 아직도 어리광이

필요한가 딸과 아들로

그저 사랑한단 말을

마음에 담아 둬

가격이 붙어 있는

스냅백을 써 보다 그것이 혹시

나의 값어치인가 해서 놀라

살기 위해 살아가는 모든 이들

작은 배역들이 주연으로

살아가는 film 이 곳

 

작년엔 던밀스와

플스방 알바를 했지

Self disrespect

but 지노 call 던밀스 해냈지

그래 상황은 좋아질 거야

거울은 나에게 말해줘

너가 본 것들을 믿어

내일에 닿게

혼자서 깬 아침

저녁은 team 과 함께

what's up how you doing man

요즘은 좀 어때

오랜만에 본 Animato 형은

결혼 얘기를 하고

둘째 누난 둘째 아이를 가졌대

아직도 내가 rap 을 하고 있네

아직도 걔가 rap 을 하고 있대

자의든 타의든 세상이 돌 때

우리도 그 기차를 타고

함께 갈 수밖에 없어

난 그 중에 가사를 파는 일을 하고

누군 사무실 누군가는

밖 혹은 학교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그건 중요치 않아

열심히 사는 너와 난 하나

여긴

god the god of small things

 

함부로 동정하지 않아

누군가를 감히 용서하지 않아

생각보다 굳건히 지켜온

너 자신은 누군가의 pride

자리는 작을 수 있지만

널 여기까지 잘 몰고 왔어

눈물을 닦아

혼자서 울지 않아본 이는

이걸 몰라 그저 아파

청춘이 아니라도

믿는 신이 없더라도

두 손 모아 바래 본 이들은

역시 나와 같아

잡초처럼 살아가는

내 친구들 나 가족

닿기 쉽지 않겠지

만족하지만 나아가 계속 나아가

 

듣지 않던 기도들이

점점 하늘에 닿아가

god the god of small things



 

 

계기 없는 유희에서 비롯된 열정일 수 있다. 그런 열정이라도 욕심을 동반한다. 욕심만큼 성취하려면 스스로를 포장하고 기만하고 같은 선상의 누군가를 배제해야 한다. 열정은 적의가 된다. 열정만큼의 능력이 수반되지 못한 ‘나’를 발견해서다. ‘나’는 열정과 욕심이 기묘하게 얽힌 상태지만 그걸 감당할 수 없다. 그럴 능력이 없다.


그리고 열정은 퇴색된다. 잘난 ‘나’가 세계에 즐비하고 넉살과 우리도 잘나고 싶다. 내 잘남을 증명하는 삶만이 삶다운 삶이 되는 것도 아닌데 거기에 혈안이 된다. 타인에게 등급을 매기고 우위를 갈라서 내가 서 있는 지점을 되뇐다. 그게 다 구차하다. ‘구차하게 살아남았는가 나란 건’ 자문한다.


적의가 된 열정은 자기혐오가 돼 나를 겨냥하여 좀먹는다. 거울을 보면 초라한 내가 서 있다. ‘하수구 냄새를 맡으며 마우스를 건드리는’ 구차한 나. 이런 종류의 인간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정확히 그렇게 돼버린 사람이 있다. 그게 자신임을 도무지 인정하기가 싫다. 여전히 변한 게 없다. ‘아직도’란 말이 가래처럼 목구멍에서 끓는다. 타인이 나를 언급할 때 ‘아직도 걔가’라고 거론되는 것 같다.


‘상황은 좋아질 거’란 말은 그럼 체념 섞인 자조일까. 그것보다 위안이다. 그리고 믿음이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초라한 내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내가 ‘본 것들’ 중엔 열심히 했던 내가 있다. ‘아직도’는 진즉 포기했어야 됐다고 말하는 질타의 언어인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거기 끈기 있게 붙어있다는 증언인 셈이다. 그리고 ‘아직도 해야 한다’는 언어다. 그래서 위안이다. 위안이라고 여긴다.


넉살의 의식은 타인의 세계로까지 확장된다. 당신과 나는 무엇이든 하고 있다. 무엇이든 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무엇이든 하고 있다’는 문장은 주어진 과업을 이행하고 도중에 쉬고 그 과정에서 부대끼는 무수한 일상을 망라하는 문장이다. ‘무엇이든 하고 있다’는 문장은 ‘삶’의 다른 표현이다. 넉살은 ‘그 중에 가사를 파는 일을 하는’ 삶이다. 당신과 나는 ‘사무실 혹은 바깥 혹은 학교’에서 무엇을 하는 삶이다. 거기 값을 매길 수 없다. 위계를 매길 수 없다. 가사를 팔고 사무실에서 일하고 학교에서 공부하고 나랏일을 돌보고 아르바이트하여 노동하는 삶에 서열을 매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것들을 하는 주체는 각자 맡은 바 열심이다. 열심히 하는 개인이 모여 삶이란 기차를 작동시킨다. 그래서 우리가 ‘작은 것들의 신(god of small things)’이다.


(누군가를) 함부로 동정하지 않고 감히 용서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이 삶에 대한 무례여서다. 동정과 용서엔 위계의식이 내포돼 있다. 상대보다 나은 처지에 있다는 위안의 감각이다. 누가 누구보다 나은 삶, 같은 건 없다. 각자가 감당할 만큼의 노력으로 순간을 임하는 우리니까. 모두 열심히 삶을 산다. 함부로 동정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고 평가할 수 없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고 있는 나는 왜, 라고 누구나 자문해 본 경험이 있을 거다. 비관과 자기혐오의 나락으로 빠지기 십상이다. 마침내 넉살은 위로한다. 넉살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로이면서 여전히 거기서 자문하고 있을 이들에게 전하는 위로다. 눈물 흘리는 나 혹은 너지만, 정체돼 있는 것 같지만, 눈물 흘리는 건 여전히 성장하고 싶다는 의식의 발로고, 정체됐다는 건 그 자리를 유지했다는 증명이니까. 그리고 너를 아끼는 누군가에겐 네 존재는 자부심이다. 그러니 ‘눈물을 닦’고, ‘듣지 않던 기도들이 하늘에 닿’을 때까지 ‘잡초처럼 살아’가자. 잡초가 뭐 어때서. 농부의 가치에 의해 잡초인지 아닌지 판단되는 것뿐이다. 잡초는 강하고, 질기고, 금방 다시 싹이 돋는다. 부끄러워 할 필요 없다. 무엇이든 하는 삶은 그 자체로 빛나는 삶이다.


노래 하나가 인생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작은 것들의 신>엔 넉살의 서사와 청자의 서사가 중첩되는 지점이 많다. 그의 말대로 만족할만한 지점 까지 ‘닿기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계속 나아가’는 그처럼 나도 나아갈 테고 나는 이 노래에서 작은 위안을 얻는다.

 

 

 

문화리뷰단 박성빈.jpg

 

 

[박성빈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0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