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성장은 절망에 대한 감각이다 [도서]

구병모가 그리는 세계
글 입력 2019.11.28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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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는 2008년에 등단했다. <위저드 베이커리>로 창비 청소문학상을 받으며였다. 2012년 청소년 소설 타이틀을 달고 <방주로 오세요>, <피그말리온 아이들>을 발표한다. 그 다음해 기성작가 6명과 함께 청소년 테마 소설집 <파란 아이>를 출간한다. 작년에도 독자를 청소년으로 상정한 <불안의 주파수>가 발간됐다.


미성년자는 사회의 보호에서 괴리된 이들이다. 주체성을 자각함에도 자기의 주체적 의지를 개진할 여력과 환경을 보장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기성세대는 미성년을 교화의 대상으로만 간주한다. 학교에 가두어 자신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으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구병모는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지속적으로 발표함으로써 사회가 미성년을 다루는 방식을 환기했다. 청소년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어떻게 성장하느냐고, 인물은 보통 비루하거나 절박해도 여전히 세계에 희망이 있음을 체감하는 것으로 성장한다. 구병모 소설 속 인물의 성장은 극복하거나 성취하는 차원이 아니다. 거기서 인물은 아무것도 바뀐 게 없고 바뀔 수 없다는 공허함을 감각함으로써 성장한다.


<방주로 오세요>의 학교 세계는 계층화 돼 있다.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외치지만 평등하다는 건 허상이다. 저 인간이 나보다 얼마나 높고 낮은지를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사회고, 학교는 이것이 아이의 언어로 번역된 공간이다. 구태여 예의를 지킬 필요 없다. 동급생의 신분을 조소하거나 무례하게 굴어도 어쩌지 못한다. 폭력도 용인된다. 주인공은 생존을 위해 변화를 모색한다. 혁명을 시도하는데 그의 혁명은 태생적으로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이 드러난다. 허탈하게 웃는 것으로 끝난다.

 

<피그말리온 아이들> 또한 유사하다. 다만 주인공이 청소년은 아니다. 주인공은 다큐멘터리 피디로 부모가 고아거나 범죄자인 아이들이 입학하는 로젠탈 스쿨을 취재한다. 로젠탈 스쿨은 너희들은 다르다며 변화의 가능성을 선전하지만 말 뿐인 선전이다. 학생들은 시시각각 통제 받는다. 아이는 어른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해선 안 된다. 어른은 오직 교화의 목적으로 자신들에게 봉사하는 절대 선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취재시간과 범주가 확장되자 교장과 선생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려 들지 않는다. 훼방놓는다. 변화는커녕 로젠탈 스쿨에서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졸업생이 다수임을 발견한 주인공은 이를 고발하기 위해 애쓰지만 학생들마저 비소할 뿐이다. 그 역시 아이들을 구해야겠다는 자각으로 마냥 움직이는 게 아니다. 정의로움을 집행하고 있다는 도취감에 함몰돼 행동하는 것이었다. 주인공을 기성세대로 설정함으로써 작가는 기성의 교육방식을 비판한다. 여기 나오는 어른은 모두 ‘교화’의 시선이 내재돼 있다. 교화란 언어 자체가 불편한 것임을 역설한다. 그것 자체가 청소년을 아랫사람으로 대상화하는 구도를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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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는 구병모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소설 중 하나다. 대중적으로 많이 언급됐다는 건 차치하고, 앞선 청소년문학들이 <위저드 베이커리>의 자장아래 있다.


주인공은 재혼 가정의 자녀로 집에서 쫓겨난다. 이복동생을 추행했다는 모함을 뒤집어썼다. 가족과 경찰의 추궁에서 달아나 그가 당도한 곳은 위저드 베이커리다. 빵집 주인은 며칠 있어도 되겠냐는 물음을 수락한다. 위저드 베이커리는 사람들의 욕망을 구체화 해주는 빵집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 또한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주는 프레첼부터 상대방을 물리적 아픔에 시달리게 하는 부두인형 모양의 빵 등 다양한 인간이 찾아와 자기 욕망이 실천될 수 있도록 돈을 지불한다. 주인은 빵이 완성되기 전에 의뢰한 이들에게 재차 묻는다. 책임질 수 있겠냐고.


주인공은 빵집에 있으며 책임지지 않는 군상을 목격한다. 어떤 결과가 수반되건 스스로는 감당할 수 있다고 쉽게 말했던 이들은 도로 찾아와 따진다. 주인은 일갈한다. 애당초 당신이 여기 찾아온 건 어렵게 노력하지 않고 자기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아닌가. 나는 분명 부작용이 있다고 말했고 당신은 감당하겠다고 했다.


<위저드 베이커리>는 선택과 책임에 관한 이야기다. 모든 선택의 주체는 ‘나’다. 우리는 내가 내린 선택이 반드시 꿈과 희망을 담보할거라는 착시에 현혹된다. 그러나 삶은 당신과 나를 절망으로 내몬다. 삶이 그렇게 내몰도록 기여한 데에 당신과 나의 ‘선택’이 있다. 그러니 책임지는 것 또한 ‘나’이어야 한다. 주인공은 기로에 선다. 무슨 선택을 하건 낙관적 전망을 기대할 수 없다. 최악과 차악 중에 하나를 겨우 고를 수 있다.


<위저드 베이커리>의 결말은 두 개다. 둘 다 행복한 결말은 아니다. 최악 혹은 차악이다. 의붓동생을 추행한건 주인공의 아버지였다. 어떤 선택을 했건 아버지가 추행했다는 사실은 같다. 그의 거취만 조금 달라진다. 주인공은 낙관하지 않는다. 절망하지도 않는다. 선택한 건 ‘나’지만 선택의 상황을 조장한 건 삶이었다. 주인공은 그것을 인지하고 순순히 살아간다.


구병모는 <위저드 베이커리> 작가의 말에서 “그저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틀릴 확률이 어쩌면 더 많은, 때로는 어이없는 주사위 놀음에 지배받기도 하는. 그래도 그 결과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고 했다. 그렇다면 소설은 선택과 책임을 넘어서 삶에 관한 언급을 하는 셈이다. 모든 선택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어쩔 수 없이, 어쩌다 보니 반드시 하나를 골라야 했다. 삶이 그렇게 만들었다. <위저드 베이커리>가 성장소설인 건 주인공이 이를 깨달아서다. 구병모는 다른 인터뷰에서 “일단 청소년문학에 냉소와 비관의 정서가 들어 있어선 안 된다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청소년에게 꿈과 희망을 주어야 한다고 정한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고 말한다. 그에게 청소년은 희망을 양분으로 삼아 성장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지 않은 시대고, 환경이다. 삶은 천박하여, 미성년이든 성인이든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성장은 결국 절망에 대한 감각이다.


구병모의 성장소설에서 가족은 인물에게 힘을 주거나 응원하는 이와 거리가 멀다.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거나 사건과 동떨어져 있고 오히려 인물을 곤경에 처하도록 만드는 장본인이다. 이는 “청소년에게 꿈과 희망을 주어야 한다고 정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맥락과 상통한다. 혈연관계는 단단한 사슬로 묶여 화목하고 어려움도 이겨낸다는 맥락은 청소년문학의 고정된 전제다. 고난이 와 붕괴될 위험에 직면해도 결국 가족이다, 란 식으로 쉽게 갈무리된다.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단단하긴커녕 작은 위기에도 욕설과 고함의 순간을 대면해야 하는 것이 가족이다. 혈연이라서 더 끊어내고 싶은 순간도 비일비재 하다. 구병모가 포착한 건 이지점이다. 가족이 너의 안위를 보장할거란 생각은 기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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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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