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조개껍데기는 어디에나 있다 : 나의 산티아고 순례기 #2 [여행]

가지지 못한 것들로부터 초연해지는 방법
글 입력 2019.10.28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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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지 못한 것들로부터 초연해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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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모험 없이 첫날의 여정을 마쳤다. 도로 옆으로 난 흙길만 졸졸 따라서 21km를 걷는 일은 싱겁게 끝나버려, 앞으로 마주칠 길을 기대할 정도로 제법 용기가 생기고 말았다. 아니, 이렇게 평탄한 길만 나온다면 어떤 실망감마저 느낄지도 모르겠다. ‘내 다리가 생각보다 튼튼한가 보다’, ‘길 위에는 인정이 가득하구나’ 따위의 호기로운 생각을 가득 쥐고서 첫 마을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에 당도했다.

 

아주 조그만 마을이었다. 초입에서 마을 끄트머리가 곧바로 보일뿐더러 자동차도 채 몇 대 지나가지 않았다. 순례자를 환영해주듯 이 작은 마을은 가장 앞쪽에 알베르게를 내놓고 다정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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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직한 문을 제외하면 보통 양옥처럼 생긴 알베르게에 들어서자, 푸근한 인상의 할아버지가 나를 맞아주셨다. 영어를 거의 할 줄 모르셨지만 신원을 확인받고,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찍고, 환영과 고마움을 주고받는 데는 내가 아는 몇 가지 스페인어 단어와 여러 번의 웃음을 나누는 것으로 충분했다.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했던 걸까. 넓은 알베르게 안은 사물 그림자로만 가득하다. 그 덕에 샤워실을 전세 내고, 할아버지의 특별 건조기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었다.

 

하루를 마칠 모든 준비를 하고도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거실에서 활활 타고 있는 모닥불과 창가 사이로 들어오는 노을빛에 몸을 녹였다. 잔뜩 긴장했던 몸이 사르르 풀린다. 낡을대로 낡아 삐걱대는 소리를 내는 의자도 그저 반갑기만 하다. 그다지 고단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의자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갓 건조기에서 나온 향긋한 빨래를 잘 개어두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쉴까, 잠시 생각했다.

 

여태껏 할일 목록을 잔뜩 썼다가 다음 날 하나도 지우지 못하는 일상을 반복해왔는데, 이번엔 그 목록이 저녁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모두 지워져버린 느낌이다. 어차피 안 할 거면서 이런저런 일에 중압감을 느끼곤 공연히 스트레스 받는, 나쁜 습관은 이곳에서 마침내 희미해진다. 게다가 늘 당연히 여겨왔던 따뜻한 공간과 편히 쉴 의자가 이토록 달디 달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아무래도 나는 정말 순례길에 오른 게 맞는가보다.

 

“성당은 어디에 있어요?”

 

오늘의 할일 목록이 더 이상 없다면 이제 즉흥적으로 몸을 움직일 때다. 비야당고스의 성당에 가 보는 거다. 거의 유일하게 알다시피 하는 스페인어 문장으로 할아버지께 이곳 지리를 물었다. 할아버지는 약간 당황하시더니 이 마을엔 까떼드랄(Catehedral)은 없고 이글레시아(iglesia)가 있다고 하신다. 성당은 다 까떼드랄인 줄 알았지만, 작은 성당은 이글레시아라고 부르나보다. 기도하는 시늉을 하며 미사가 곧 시작된다고 빙그레 웃어주시는 할아버지 덕분에 서둘러 교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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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탑을 발견하자마자 작은 마을에 뎅, 뎅, 종소리가 크게 울려퍼진다. 허둥지둥 교회로 달려갔는데 문은 아직 굳게 닫혀있었다. 교회 현관을 구경할 새도 없이 비가 쏟아져 내려, 처마 밑으로 아마도 미사를 드리러 왔을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 중 한 할머니가 스페인어로 말을 건네셨는데, 전혀 못 알아듣기 때문에 노 아블라 에스빠뇰, 하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통하지 않는 말로 무언가를 계속 설명하신다. 이러라고 21세기 문명이 존재하는 것이리라. 음성번역기를 켜서 입가에 대 드렸더니 할머니는 이번에 휴대폰에 열심히 설명하신다. 할머니의 말씀은 이러했다. “길에는 위험한 것들이 많아. 혼자 걸으면 안돼.”

 

분명 순례길 위의 마을에 살면서 수천 수만의 순례자들을 마주치셨을 것이고, 순례길에서 벌어졌다고 하는 사건들도 줄줄이 꿰고 계셨을 것이다. 우리 할머니로 미루어볼 때, 할머니란 존재는 나쁜 사건들을 특히나 생생히 기억하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매일 기도드리는 분들이다. 그리고 여기 스페인 할머니 역시 생전 처음보는 데다가 생김새도 당신과 너무도 다른 나를 그토록 열심히 걱정해주고 계신다. 마치 8시간 시차 거리에 떨어진 우리 할머니의 애정어린 꾸지람을 듣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할머니께 보답할 수 있는 길은 연신 “고맙습니다” 하고 마음에 퍼진 웃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는 것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더 모이고, 더 복작대며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 모습에 미사를 드리고 하루를 마무리하려던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할머니의 말씀을 받들어 해가 지기 전에 알베르게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았고, 마을사람들의 복작대는 분위기의 미사를 한낱 이방인이 방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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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로 돌아와 슈퍼마켓에서 산 코울슬로와 과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들어가려는데, 한국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공용 식탁에 앉으셔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순례길의 첫 마을인 생장 피드 포르에서 순례를 시작했다고 하셨다. 이미 400km도 넘게 걸어오신 셈이다. 순례길에 한국인이 많다곤 익히 들었지만 사실 이렇게나 빨리, 그리고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알고보니 고향도 머지 않은 곳이어서 더욱 반갑게, 어떤 연유로 오게 되셨냐고 여쭈었다. 노부부는 서로 “가볼까?” 하고 얘기가 오간 뒤 3일 만에 스페인행 비행기를 탔다고 하신다. 게다가 어떤 가이드북도 가져오지 않은 채, 걷다가 지치면 쉬고, 웬만큼 왔다고 생각하면 알베르게로 들어가신다고. 스스로 꽤 즉흥적으로 길에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선 명함도 못 내밀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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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께서 소금과 와인, 후추와 마늘로 간을 한 고기 요리를 해주셨는데, 왜인지 한국의 맛이 났다. 노부부가 마련해주신 저녁식사로 배도 마음도 든든하게 채워졌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60대 초반정도로 짐작했는데, 할아버지는 올해로 70살이라고 하셔서 깜짝 놀랐다. 조심스럽게, 여태 걸어오면서 뭘 느끼셨는지 물었다. 재미없는 질문에 할머니는 재미있는 대답을 해 주신다. "중간까지는 가지고 있던 욕심들을 버렸다면, 그 이후부터는 비워낸 마음을 채우는 중이에요."

 

할머니는 이 대답을 조금 더 설명하기 위해 땅에 관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살아오며 뜻대로 되는 일이 없어 신을 원망한 적도 많았지만, 여기 와서 이 드넓은 땅들을 보니 신도 바쁘셨겠구나 하는 생각에 집착을 버린 이야기. 그리고 한국에선 땅이 좁다보니 자연히 땅을 위해 살아가는 순간도 있었는데, 이곳에선 널린 게 땅이므로 조급해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여유를 얻은 이야기.

 

땅에 집착해본 적이 있었던가, 싶어서 온전히 할머니의 말씀을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한 때는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 조금만 더 다가가면 내 것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것. 이것이 모두 허상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상실감은 늘상 큰 타격으로 다가온다. 놓아주어야 하는데 그러면 마음에 빈 공간이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차지하고 있던 공간의 무게가 다르더라도,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 빈 공간을 채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미련을 버릴 용기가 조금쯤 생길지도 모르겠다. 마음 속 빈 공간에 적응이 안 되는 것일 뿐, 사실은 너무 무거워져버린 집착들을 가장 버리고 싶어하는 건 나일 수도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지난 20여일간 집착들을 버려왔지만, 나의 시간은 통틀어서 10일 남짓이다. 과연 꽉 붙들고 있는 아집들을 빠르게 버려낼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특별한 행복, 갖고 있는 줄도 몰랐던 온전한 나만의 시간, 그리고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온기가 담뿍 담긴 인정까지, 마음을 채워넣을 명분들은 온갖 도처에 가득하다는 것이다. 비우기만 하면, 언제든 닿을 곳에 이것들은 끝없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창 밖의 저 길처럼 말이다.


 

[최예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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