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논리의 그물을 확장하는 일, 예술을 읽다 -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위화의 시선을 따라서
글 입력 2019.10.03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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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내가 만난 위화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올해 초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이라는 책을 읽으며 중문학의 대가, 위화를 처음 접했다. 소설이 아닌 산문집에서 그의 문장은 글쓰는 행위에 대한 여러 인사이트를 던져주었다. 한평생 글을 쓰며 살아온 작가로서 글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했던 지난 책과 달리, 이번 산문집에선 청자로서 음악에 대한 (평론에 가까운) 감상을, 문학을 쓰는 한 작가로서의 철학을 보여주었다.


사실 책의 제목과 소개를 얼핏 보았을 때는 문학과 음악에 대한 통합적인 서술을 생각했다. 어쩌면 조금 더 음악에 대한 문학가의 견해를 많이 기대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음악에 대한 서술과 문학에 대한 통찰은 대략 4대 6의 비율을 이룬다. 글의 초반엔 문학사에 대한 서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전작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과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후반부에 가서야 음악에 대한 위화의 시선을 읽을 수 있었는데, 개인적으론 음악과 문학에 대한 서술을 2챕터로 분리해서 편집했다면 어떨까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어떤 산문집이건 마찬가지일테지만, 소분된 주제로 조각조각 나열된 작가의 글들을 읽는 행위는 독서를 통해 독자만의 독자적인 논리의 그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이번 위화의 책은 1) 문학의 소통방식 2) 예술가의 기능과 역할, 이렇게 두가지 인사이트를 던져주었다.



문학의 확장, 수용 그리고 재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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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는 문학의 확장성과 수용, 이로 인해 나타나는 재생산성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한다. 첫 번째로 드러나는 것은 끊임없이 변주되는 문학의 확장성이다. 그는 시공간을 초월해 하나의 작품이 다른 작가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며, 문학이란 인공적인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퍼져 나가는 인간의 소통방식임을 보여준다. 작품을 통해 교류하며 사람들은 독자인 동시에 작가로 거듭난다.



문학은 이렇게 계승된다. 프랑스인과 오스트리아인, 혹은 영국인과 러시아인으로 각자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이 다르고 언어와 옷차림이 달라도, 또 다른 여자와 남자를 사랑해도, 각자의 운명이 달라도 그렇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설령 함께 앉을 기회가 생겨도 그들이 서로를 알아볼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마 하나의 이유,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에 그들은 시공간을 초월하고 죽음과 편견을 넘어 상대의 가슴에서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때때로 문학은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을 하나로 만들기도 한다. (32)


나는 위대한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들에게 끌려들어간다. 겁많은 어린애처럼 조심스럽게 그들의 옷자락을 붙들고 그들의 걸음걸이를 따라 시간의 강을 천천히 걸어간다. 따스하면서 온갖 감정이 뒤섞이는 여정이다. 그들은 나를 이끌어준 뒤 돌아갈 때는 혼자 가라며 등을 떠민다. 돌아온 뒤에야 나는 그들이 영원히 나와 함께 있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56)


문학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공감의 범위를 넓히는 일이다. 사람들은 글을 통해 자신이 직접 겪지 못하는 세상의 일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된다. 문학을 통해 타인의 입장을 경험하는 일은 문학적 상상력이 독자에게 보내는 최고의 선물이다. 하물며 작가에게 이런 문학의 선물은 자신의 언어 세계를 확장하는 또다른 도구이다. 다른 이의 시선을 망원경을 통해 둘러봄으로써 작가로서 세상을 보는 시각을 더 넓힐 수 있다.



어떤 작가의 창작이 다른 작가의 창작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미 문학 속 글쓰기의 연속성으로 자리 잡아,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감정과 사상에 지속성을 부여한다. 여기에는 누가 이익을 얻는가의 문제도 없고 누가 가려지는가의 문제도 없다. 문학 속의 영향은 식물에게 쏟아지는 햇살 같다. 식물은 햇살을 필요로 하지만 스스로 햇살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33)



위화는 이런 문학적 교류를 ‘식물에게 쏟아지는 햇살’에 비유한다. 문학 세계에 교류에 있어서 다른 작품에 영감을 받고 다시 작품을 써내고, 또 다시 그 작품이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는 행위는 식물이 광합성을 하듯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 과정에선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식물은 작가이고, 작가들은 곧 자신의 작품으로 빛나길 바란다. 처음부터 햇살이 되어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 작품을 쓰는 작가는 없기 때문에 이 문학의 확장성은 창작의 부수적인 과정이 된다.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어떠한 이익싸움도 없이 문학의 확산이 가능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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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더 나아가 위화는 문학의 수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학의 수용은 문학의 확장에 선행되는 요소이기에 필수적으로 다뤄져야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작가의 입장과 문학사의 입장이 아닌, 독자의 독서경험을 바탕으로 문학의 수용이 이루어진다 이야기한다. 독자의 입장에선 어떤 작가가 무슨 글을 언제, 어떻게 쓰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그저 어떤 부분이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가 중요하다. 결국 자신에게 남은 문장 몇 가지, 단어 몇 가지가 하나의 작품, 한 명의 작가를 기억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문학작품이 널리 퍼질 수 있는가의 여부는 일부 중요하지 않거나 심지어 하찮아 보이기까지 하지만 절대 사라지지 않는 인상에 좌우될 때가 많다. 독자에게는 무엇이 기억에 남는가가 중요하지, 무엇을 읽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또한 뇌리에 박히는 것은 몇 마디 기묘한 대화나 강력한 장면, 심지어 절묘한 비유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것들 때문에 전체 작품을 잊을 수 없게 된다. (221)


이 부분에서 우리는 문학을 이루는 두 가지 주요 요소를 알 수 있게 된다. 하나의 작가 특유성 고유성, 다른 하나는 작가에 관계없이 공통적으로 작품에 필요한 ‘세계를 구성하는 서술 방식’이다. 문학에서의 문장은 눈앞에 풍경이 그려지듯 생생해야 하며, 반쯤은 현실이자 반쯤은 허구인 가상의 세계를 독자에게 제공해야한다. 그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치밀하게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이며, 이는 작가에 따라 특유의 개별성으로 인해 완성된다. 위화는 천일야화의 이야기를 언급하며 세헤라자데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녀의 목숨을 연장시킨 비법은 디테일에 있음을 강조하고, 다수의 작가들을 관통하는 글쓰기의 요소가 이 서술의 스타일임을 이야기한다.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는 화려한 글과 클라이맥스 및 결말의 글들이, 아름드리 거목도 작은 뿌리털에서 자라나는 것처럼 사실은 작고 담백한 디테일, 국왕의 손짓 같은 묘사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110)


많은 작가에게 평생의 글쓰기를 관통하는 무엇이 있다면 언어의 방식과 서술의 스타일일 것이다. 그것들은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인물 배경 속에서 때로는 분산으로, 때로는 암시로, 또 때로는 툭 불거진 선명함으로 반복해 등장한다. (117)


결국 문학은 반 허구, 반 실재의 세계를 그려낸다는 공통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작가에 따라, 즉 언어를 사용하는 서술자에 따라 서술이 그려지는 방식이 달라진다. 더불어 서술자의 시각을 고스란히 반영하여 세계를 보는 서술자의 시각을 대변하는 존재로서 기능한다. 문학은 이렇게 세계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언어’라는 옷을 통해 다른 이에게 전달되는 행위이다. 따라서 문학의 수용과 확산, 재생산을 통한 문학적 교류는 세상을 바라보는 수많은 다양한 시선들이 교차되는 일종의 소통 창구가 된다.




영감과 예술가의 역할




“언어는 제게 애매하고 모호하며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와 달리 진정한 음악은 수천수백 가지의 아름다운 사물을 마음으로 불어넣어 주니까 언어를 능가합니다.” (371)



책의 후반부에서 위화는 음악의 서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언어와 음악을 대하는 멘델스존의 발언이다. 음악가인 멘델스존은 음악보다 언어를 더욱 구체적인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보는 일반적인 견해와 달리, 자신에겐 음악이 더욱 구체적이며 언어는 구체성이 결여되어있다고 지적한다. 특정 음악가에 대한 평론이 대부분의 차지하는 후반부에서 멘델스존의 이 발언은 문학과 음악의 연결성을 지적하는 첫 번째 부분이었다. 위화는 멘델스존의 발언을 언급하며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사실 멘델스존이 추구했던 바는 호메로스와 단테가 펜을 들었을 때 추구했던 바와 같았다. 다시 말해 그들이 찾고자 했던 것은 음표도 아니고 어휘도 아니었다. 그것은 음표나 어휘로 이루어진 서술이었고 …(중략)… 멘델스존이 언어가 애매하고 모호하며 오해하기 쉽다고 느낀 이유는 그의 서술이 어휘가 아니라 음표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멘델스존의 곤혹은 호메로스와 단테에게는 해방과 같았다.



멘델스존이 언어 앞에서 곤혼스러웠던 것은 그저 그가 사용하는 서술의 도구가 음표였기 때문이다. 세상을 묘사하기 위해 작가들은 활자를 쓰고, 화가들은 붓을 들며, 음악가들은 음표를 만들어 낸다. 이는 그저 방식의 차이일 뿐,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유형의 결과물로 만들어낸다는 본질엔 변함이 없다. 예술가들은 세상에 존재하지만 명확하게 잡히는 않는 존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도구를, 자신의 특성에 맞게 선택할 뿐이다. 멘델스존에게 언어가 곤혹스러운 도구이듯이, 호메로스와 단테에게도 음표는 곤혹스러운 도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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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보수냐 급진이냐는 어떤 한 시대의 견해일 뿐, 애당초 음악의 견해가 아니다. 어떤 시대든 끝이 있기 때문에 시대와 관련된 견해 역시 소멸을 피할 수 없다. 음악에는 무슨 보수적 음악이나 급진적 음악이 존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 (중략)… 따라서 음악에는 서술의 존재만 있을 뿐 다른 존재는 없다. (268)
서술 작품이 완성된 뒤 존재하는 미완성성과 언제까지고 완성을 기다리는 자세는 한편으로는 서술 작품이 끊임없이 확장되는 풍부함을 드러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의견이 쉽게 갈리도록 부채질하기도 한다. (314)


음악과 언어는 분명 서술방식이 다르지만, 특정한 인상과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지점에 있어선 공통점을 지닌다. 위화는 책 곳곳에서 이러한 ‘전달 매체’의 특성을 강조하는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예술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시 한 번 도달하게 된다. ‘영감’이라는 글에서 위화는 예술가들이 ‘영감’에 대해 내리는 정의를 곳곳에 언급하면서 예술가의 정의까지 논의를 확장시킨다. 영감이란 신이 예술가들에게 내리는 ‘설명되지 않는 사랑’이며 예술가들은 이 ‘영감을 통해 끊임없이 세상에 존재하는 않는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예술적 행위를 위해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세상의 공허를 느끼는 이들이 되어야한다. 예술가가 예민하고 까다로우며, 감각을 날카롭게 유지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괴테의 경우, “내가 내면에서 얻는 느낌은 내 주동적 상상력보다 수천 가지 방면에서 더 미적이고 강력하며 화려하다”고 했다. 그 내면의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괴테는 그것을 신이 부여한 힘이라고 암시했다. 괴테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예술가가 영감 앞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스스로를 하인처럼 낮췄고, 그런 겸손함 때문에 그들의 성과는 영감이 그들을 사랑해서 얻은 행운처럼 보였다. 그리고 예술가의 소양과 기교, 통찰력이란 괴테의 말을 빌리자면, “심리적 관찰과 느낌이 예술적으로 성숙해져 생동적이 작품으로 복제되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328)


편지에 차이콥스키는 영감이 떠오를 때의 미묘한 느낌도 자세히 서술했다. “모든 것이 뇌리에서 사라지고 미친 듯 가슴이 떨립니다. 얼른 초고를 쓰면 또 다른 악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 떠오르고요.” (330)


“목표를 향해 몽유병자처럼 비틀비틀 걸어가지만 자신이 어떤 길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어쩌면 아찔하게 위험한 길일 수 있는데도) 멀리의 불빛을 향해 나아간다네. 그것이 영원한 별빛이든 매력적인 도깨비불이든 상관없이 말이지.” 말러는 여기서 예술가란 영원히 자신이 어떤 길을 가는지 알지 못하며 그들이 용감하게 전진하려면 영감의 신도가 되어야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지적했다. (334)


위에 언급된 예술가들은 공통적으로 영감은 정의되지 않는 특정한 느낌이며, 예술가는 영감에 따라 전율하고 더 나아가 영감을 구체적인 형태로 형상화하는 자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영감을 전적으로 느끼고 따라야하며, (영감은 빠르게 휘발되기에) 최대한의 속도로 영감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유형의 존재로 만들어 내야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시간의 속도를 거스르며 영감을 완벽하게 보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에 대해 위화는 차이콥스키의 발언을 덧붙이며 현실적인 타협안을 제시한다. 영감의 휘발을 대체하는 건, 바로 예술가의 고도로 훈련된 기교라고 말이다.



그렇게 위대한 작곡가들의 작품에 왜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겠는가? 왜 그들이 구멍 뚫린 중간 중간을 억지로 붙여놓은 듯한 작품을 썼겠는가? 차이콥스키는 작곡가들이 영감을 잃은 뒤 기교에 의지해 계속 작업한 탓이라고 여겼다. “무척 냉정하고 이성적이며 기교적인 작업으로 지탱하는 겁니다.” (331)


이상적이진 않지만, 이 방법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수많은 예술가가 갈고 닦아야 하는 자질이다. 삶에서 영감이 찾아오는 순간은 그리 흔하지 않으며, 그 영감을 고스란히 작품으로 녹여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감의 부재를 채우기 위해선 반복적인 창작 훈련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후 창작의 과정에서 서서히 기교는 줄이고 영감의 구체화 비중을 높여 나가는 것이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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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부터 마르케스까지 영감의 해석에 관한 역사는 창작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사실만 알려주는 듯하다. 그리고 대체 영감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변주되고 있다. 누군가 내게 “사람들이 영감을 해석하려는 이유는 그들이 영감을 알아서가 아니라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339)


위화는 끝까지 명확한 ‘영감의 정의’를 내리지는 않는다. 영감이란 존재는 구체적이지 않고 모호하며, 수많은 미지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에, 그저 끊임없이 변주된다는 메시지만을 전달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이 영감의 모호한 정의가 예술가의 본성과 연결된다는 데 있다. 예술가들은 모호한 영감을 쫓아 늘 새로운 것들을 갈구한다. 세상에 미처 나오지 않은 존재를 만들어내기 위해 기존 세상에 늘 의문을 품고 공허를 느낀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특성을, 시대/문화적으로는 그 시대가 가지지 못한 공백을 메워야 한다.



“목표를 향해 몽유병자처럼 비틀비틀 걸어가지만 자신이 어떤 길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어쩌면 아찔하게 위험한 길일 수 있는데도) 멀리의 불빛을 향해 나아간다네. 그것이 영원한 별빛이든 매력적인 도깨비불이든 상관없이 말이지.” 말러는 여기서 예술가란 영원히 자신이 어떤 길을 가는지 알지 못하며 그들이 용감하게 전진하려면 영감의 신도가 되어야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지적했다. (334)


… 이는 많은 예술가들의 공통된 특성으로, 그들은 자신의 성품과 상반되는 작품 스타일을 추구하곤 한다. 확실히 예술가들은 자기 주머니에 이미 들어 있는 물건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이 예술에서 추구하는 바는 인생에서 추구하는 바와 같으며, 당연하게도 여기에서 말하는 인생이란 허구의 사물로 현실 세계 속 지나치게 많은 공백을 메워야하는 예술가의 특성상 완전히 생소한 인생을 뜻한다.


예술가들은 이렇게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추구하며, 영감을 쫓아다닌다. 그들은 기존 세상에 공허를 느끼고 새로움을 갈망하고, 그를 통해 창조를 해내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예술가의 눈은 항상 어린 아이의 눈처럼 세상을 새롭게 들여다 보아야한다. 매번 마주하는 익숙한 세상을 비틀어 새로운 시선으로 마주하는 일에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예술가는 이렇게 끊임없이 기존의 세상과 기존의 자신으로부터 탈피하고 변화해야 한다.




생을 헐어 쓴 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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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삶이 끊임없이 암시를 보낸다고 느낀다. 내가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눈짓을 보내고, 나는 삶에서 별 의견이 없는 사람이라 매번 그 암시를 따라간다. (233)


위화가 문학과 음악을 조명하는 방식은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관점과 깊이 닿아 있다. ‘암시를 따라간다’는 그의 표현은 일종의 영감이라 느껴진다. 그는 자신만의 영감을 따라 펜을 들고 세상을 묘사한다. 자신의 시각과 자신의 언어를 통해서 말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위화의 글을 ‘생을 헐어 쓴 글’이라 표현한다. 영감을 대하는 태도와 영감의 휘발을 보존하는 훈련된 기교가 익숙해질 만큼, 오랜 기간 글을 쓴 작가를 직관적으로 잘 표현한 문장이다. 그의 글들은 오롯이 그의 시선을 담고 있다.

사실 나는 현학적인 문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좋은 글은 쉽게 읽히는 글이라 늘 생각한다. 위화의 글은 끊임없이 지적인 확장을 유도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고 나니, 무언가 내 안의 생각의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이다. 한 작가의 시선을 담은 글들을 통해 나만의 논리 그물을 짜는 행위는, 그래도 아직까지는 내게 의미있는 일이다.



[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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