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미션] #4. 돈도 시간도 사랑도 있다, 그런데... - 뮤지컬 '사의찬미'

자리가 없습니다
글 입력 2019.09.29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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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여름, 예스24스테이지가 아직 대명문화공장이던 시절이었다. 이게 그렇게 재미있다더라, 하는 소문에 무작정 대학로로 향했다. 아주 아주 맑고 더운 여름날이었다. 햇볕이 무자비하게 살을 뚫었던 그날 이후, 나에게 대학로 대명문화공장(현 예스24스테이지)은 그날 관람했던 그 뮤지컬로 기억되었다.

바로 뮤지컬 ‘사의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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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사의찬미’는 조선 최초 소프라노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의 현해탄 정사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창작 뮤지컬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누던 둘은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 부산행 관부연락선에서 바다로 몸을 던졌고, 이 이야기는 조선 일대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윤심덕은 조선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국비 유학생 소프라노였고, 김우진은 엄청난 재산을 가진 집안의 아들이었다. 이 유명한 이야기가 백 년 뒤 한국 땅에서 뮤지컬로 재탄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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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윤심덕(1897~1926), 우: 김우진(1897~1926)


‘사의찬미’에서 독특한 점은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야기 속에 ‘사내’라는 신비로운 캐릭터를 추가했다는 것이다. 이름도 나이도 국적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인물인 사내는 한명운이라는 가명으로 김우진과 윤심덕 앞에 등장하는데, 그의 가명처럼 그는 사람들의 운명을 조종하여 결국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비극의 숭배자다.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할 결말을 고치기 위해 김우진과 윤심덕은 배 안에서 사투를 벌이게 된다.

비극적인 결말을 정해두고 자신의 틀 안에서 김우진과 윤심덕을 가두려는 한명운, 이를 거스르고 새로운 결말을 창조하려는 김우진, 그리고 자유와 사랑을 부르짖는 윤심덕 셋의 이야기가 바로 뮤지컬 ‘사의찬미’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사실 15년도에 이 뮤지컬을 보러 가게 된 건 순전히 후기 때문이었다. 재미있다는 이야기 하나만 읽고 대학로로 향했다. 혜화역 1번 출구에서 나와 극장으로 가는 길목에 유명한 과일 모찌 가게가 있는데, 그날 공연을 보기 전에 딸기 모찌를 사 먹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만큼 내 기억 속 그날은 선명하게 박혀 있다.

이토록 세세히 기억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다. 극이 독특했기 때문이다. 21년과 26년을 오가며 전개되는 구조도 신기했고 사내의 존재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사내는 인간인가, 신인가, 운명 그 자체인가, 죽음인가에 대해 극이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고민했던 것 같다. 극에서 답을 주지 않기 때문에 관객들 각자가 나름의 해석을 가지고 극을 해부해야한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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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유진 배우의 윤심덕 연기 역시 내 재관람을 이끈 동력이었다. 안유진 배우의 쩌렁한 성량과 선명한 음색으로 부른 ‘사의찬미’가 극장을 메웠을 때 나는 표를 하나 더 잡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내 운명은 내가 만들어.”라는 대사 역시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그날 심덕이라는 캐릭터와 안유진이라는 배우에게 동시에 반했던 것 같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그날 나는 이 뮤지컬에 반했다. 서늘한 분위기며, 어딘가 비밀로 꽁꽁 싸인 듯한 신비로움이며, 어느 곡 하나 좋지 않은 게 없었던 넘버, 그리고 배우들의 소름 돋는 연기까지, 작품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취미였던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 없던 작품이었다.



돈도, 시간도, 사랑도 있다, 그런데...


이제 슬슬 이 글의 주제를 밝힐 때가 된 것 같다. 사실 이 글은 ‘사의찬미’에 대한 글이 아니다. 내 애정을 뒷받침 해주지 못하는 슬픈 손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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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4년 전까지만 해도 이 뮤지컬 티켓팅은 비교적 어렵지 않았다. 적어도 티켓팅 날짜를 까먹어도 표를 가질 수는 있었다. 물론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은 예나 지금이나 피 튀기는 싸움이지만 애초에 좋은 자리 욕심이 별로 없었던 나에게는 남의 일이었다. 티켓팅에 참전하는 횟수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문득 ‘아, 오늘 사의찬미 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면 표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표에 대한 스트레스는 거의 없던 날들이었다.

2년 뒤 17년도에 ‘사의찬미’가 다시 무대에 올랐다. 나는 그때도 아주 나이브한 생각을 가진 채 ‘나중에 남는 자리 가지 뭐.’ 따위의 사고방식으로 티켓팅에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2년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티켓팅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 한바탕 눈발이 휘날린 건지, 남아있는 자리가 거의 없었다. 위기감을 느낀 나는 그제야 티켓팅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나의 ‘표 스트레스’가 시작된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그러니까 2019년 현재까지 나의 티켓팅 실력은 늘지 않았다는 게 비극이다. 아무리 사내가 비극을 좋아한다지만 그도 이 전쟁 같은 티켓팅에 참가했다면, 그리고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면 절대 웃을 수 없으리라. 첫 번째 티켓팅부터 전석매진이 이어져 양도조차 구하기 힘든 상황이 나에게는 ‘사의찬미’보다 큰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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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과 김우진의 사랑을 방해하는 존재가 운명이었다면, 뮤지컬을 향한 나의 짝사랑을 방해하는 존재는 내 손이다. 하필이면 이런 일회적인 장르와 사랑에 빠져서는, 티켓팅에 실패하면 아예 마주할 수조차 없는 비극을 만들어내 버렸다. 기적적으로 뒷자리 어드메에 있는 표를 구했다 하더라도, 오늘 이 공연이 아무리 좋아도 나는 이 캐스팅과 이 분위기를 다시는 느낄 수 없을지 모른다는 비애를 함께 느껴야 했다.



내 자리는 내가 결정해


이렇게나 티켓팅이 힘들어진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물론 발전 없는 내 손도 큰 문제겠지만 자꾸만 늘어나는 대리 티켓팅, 암표 거래도 꽤나 큰 문제 같다. 자동으로 빈자리를 인식해 클릭하는 ‘매크로 티켓팅’이 횡행하면서 앞자리 티켓에 추가적인 금액을 덧붙여 재판매하는 거래가 점점 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매크로를 이용해 티켓팅에 참가하는 것 자체는 불법이 아니지만 티켓에 웃돈을 주고 판매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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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서버 시간을 확인하고 와이파이 대신 데이터를 써 가며 티켓팅에 참가한다 해도 저런 방식으로 참여하는 암표 거래상을 내가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그런 생각을 하니 힘이 쭉 빠져버렸다. 티켓팅이 끝남과 동시에 여러 SNS에 ‘뮤지컬 000, 1열 정중앙 판매’, ‘뮤지컬 000 대리 티켓팅 성공’ 따위의 글이 올라올 때 느끼는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는 앞자리에 앉고 싶다는 욕심이 완전히 사라져버려 티켓팅에 실패해도 별다른 슬픔을 느끼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안 되면 안 보고, 되면 보자, 하는 마인드로 물 흐르듯 공연을 보는 바람에 15년도와 17년도를 합쳐 15번 이상 관람했던 ‘사의찬미’를 이번 시즌에는 세 번도 채 보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해버렸지만. 그래도 이미 충분히 많이 봤기에 미련은 없다. 지나간 애정을 돌아보지 말자는 것이 나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크로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또 웃돈을 주고 암표를 거래하지 않는다고 해서 티켓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결말이야말로 진정한 비극적 결말이 아닐까 싶다. 내 자리(운명)는 내가 결정해. 모든 것은 자기가 결정하는 거야. 심덕의 명대사를 되새기며, 오늘의 인터미션 넘버는 ‘사의찬미’입니다. 모두의 건승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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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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