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인생 가장 뜨거운 순간, 시 [영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리뷰
글 입력 2019.08.21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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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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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미자는 심해진 건망증으로 병원을 찾는다. 진료를 마치고 나오다가 응급실에서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학생의 어머니가 울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미자는 강 노인의 간병 일을 하며 손자인 종욱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시 창작 수업 포스터를 보고 문화원에 등록을 하게 된다. 그는 시에 몰두하며 주변 사물을 유심히 관찰한다. 그러던 중 기범의 아버지에게, 손자 종욱, 기범의 친구들이 자살한 소녀를 집단 강간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미자는 사건과 관련된 부모들을 만나 합의금 문제를 상의한다.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미자에게는 큰 금액의 부담이 느껴진다. 그 와중에도 미자는 문화원에서 ‘내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이라는 주제의 시 수업을 듣는다. 또한 간병 일을 하는 강 노인에게 성관계 요구를 듣고, 병원에서 자신의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으며 심적으로 힘들어진다. 합의금에 대한 압박 때문에 강 노인의 육체적 요구를 들어준다.

미자는 소녀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에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지고, 소녀의 어머니를 만나지만 정작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돌아온다. 미자가 식탁에 죽은 소녀의 사진을 올려놓았지만 손자 종욱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미자는 가해자의 부모들과 소녀의 어머니를 만난다. 강 노인을 찾아가 성관계에 대한 대가로 돈을 요구하고, 그것으로 합의금을 마련한다. 하지만 종욱은 미자와 배드민턴을 치다가 경찰에게 잡혀간다.

혼자 남아 자신의 시를 완성한 미자는, 문화원 마지막 수업에서 책상에 꽃다발을 올려놓고 사라진다. 미자가 쓴 시가 목소리로 깔리는 가운데 화면은 소녀가 죽은 강가로 바뀐다. 시를 읽는 미자의 목소리가 어느새 소녀의 목소리로 바뀌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줄거리는 '순수한 미자와 그렇지 못한 세상의 대립'이다. 그 사이 '시'라는 장치를 삽입함으로써 폭력적인 세계 앞에서 ‘아름다움', '창작'과 같은 순수의 영역은 설 자리가 없고 무력할 뿐임을 강조하여 보여준다.

 

 

 

감독이 바라보는 '시'



감독이 바라보는 시란 정신적인 순결함을 상징한다. 시작부터 미자가 점점 단어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은 알츠하이머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연출은 어린 소녀와 같이 순수하고 순결한 존재로 회귀하는 모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성당에 가는 장면, 시인에게 선물하는 흰 꽃다발, 시의 제목 등을 통해 미자는 성녀 아그네스와 의식적으로 겹쳐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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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는 기독교의 전설적인 순교 성녀로, 양(혹은 순결)을 뜻하며 처녀 정조의 수호자이다. 집정관 아들의 구혼을 이미 그리스도와의 약혼을 이유로 거절하고, 우상숭배를 거부하였다 하여 삭발한 채 나체로 사창굴에 보냈으나 즉시 머리가 자라서 전신을 싸고 천사도 흰천으로 나신을 감싸주었다. 결국 참수로 순교했다.

 

하지만 미자는 넉넉하지 않은 집안사정에, 속되고 부조리하며 유쾌하지 않은 일들과 상황에 둘러 쌓인다. 종욱의 성폭행 사건으로 인해 모인 아버지들의 대화는 남성적 권력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미자를 감성적인 도구로 이용해 피해자의 어머니를 달래보라고 한다. 또한 자상하던 강 노인은 성적 제안을 하고, 시 모임에서는 음담패설들이 오고 간다.


하지만 미자는 이렇게 순결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 시를 쓰기 위해 강의를 다니고 메모장을 손에 꼭 쥐고 다닌다. 시상이 떠오르지 않음을 고통스러워하며 시인에게, 주변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시 쓰는 법을 물어보기도 한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 어딜 가도 세속의 고통에서부터 달아날 수 없는 추악한 세상, 시가 죽어가는 세상에서 정신적인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 미자는 시를 쓰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강 노인과의 거래를 통해 그러한 신념은 무너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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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적으로 그러한 순결의 상실을 통해 미자는 시를 쓸 수 있게 되고, 종욱으로 인해 죽게 된 순수했던 희진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자살하는 듯한 암시로 영화는 끝이 난다. 순결의 상실, 시의 완성의 끝을 죽음으로 표현함으로써 순수함에 대한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를 극적으로 강조하여 보여준다.


순수함을 향한 보이지 않는 폭력들은 국내 뿐만 아니라 영화 초반에 병원에서 나오는 TV화면의 외국의 전쟁과 난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국제적으로 확장되어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감독이 묻고자 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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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독자들에게 남기고 간 질문은, '그래서, 시란 과연 무엇인가?'였다.

 

내가 생각하는 시는 건조한 무형의 것을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 생명을 불어넣고 색을 입히는 것이다. 계절, 평화, 사회의 부조리와 같이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들을 가상의 세계로 이끌어 살아있는 영상처럼 한 상황을 재생시키는 것이다. 그 세계에는 정해진 시간과 공간이 없다. 또한 그 세계는 정체성, 정해진 주제도 없다.


머릿속을 부유하는 것들 그 자체로 장면과 상황을 이루어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킨다. 그 다른 차원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조용히 관조할 수도, 뛰어들어 얻은 통찰을 몸소 실천할 수도 있다.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연결시켜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도 있다. 시는 우리에게 그러한 통찰과 경험을 주는 존재이다.


감독이 표현한 '순결'의 시도 이러한 차원의 경계를 넘나들어 완성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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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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