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름에는 러시아 음악을 듣자 (1) [음악]

프로코피예프, 러시아로 돌아가다.
글 입력 2019.07.30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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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정말 덥다. 연일 30도를 넘나드는 온도와 100%에 가까운 습도까지 겹치니 외출 한 번 때마다 마음을 단단히 먹게 된다. 매년 찾아오는 여름이지만 갈수록 여름 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이럴수록 지치지 않고 여름을 나는 방법이 필요하다.


각자 자신만의 피서법을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휴가지로 훌쩍 떠나기.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책을 읽다가 낮잠 자기. 공포영화 보기. 그중에서 나는 조금 특별한 방법을 추천하고 싶다. 바로 러시아 음악 듣기이다.


이 방법에는 상상력이 조금 필요하다. 눈을 감고 러시아 하면 떠오르는 풍경을 연상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겨울이 떠오를 것이다. 물론 그냥 겨울이 아니다. 아주, 아주 추운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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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겨울이 러시아의 전부는 아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30도의 무더위를 잊기 위한 상상력이다. 머릿속에서 러시아의 추운 겨울 풍경을 그려내는데 성공했다면 이제 러시아 출신 작곡가들의 음악을 들어보자. 그런데 도대체 누구의 음악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 이 글은 바로 여름 더위도 잊게 해줄 러시아 작곡가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해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바로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이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미국과 유럽, 그리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온 작곡가 프로코피예프. 20세기 역사와도 촘촘히 얽혀있는 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더위를 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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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1918



1. 작곡가의 시작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1891년 현재 우크라이나 지역인 손초프카에서 태어났다.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그는 5살 무렵부터 작곡을 시작해 8살에는 오페라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13살이 된 1904년, 프로코피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은 1862년 안톤 루빈시테인이 설립하여 차이코프스키가 이곳을 졸업했고, 프로코피예프가 입학할 당시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글라주노프가 교수로 있었다. 프로코피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10년 동안 피아노, 작곡, 지휘 공부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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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등이
졸업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음악원 시절 프로코피예프는 다소 오만한 학생으로 교수들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그는 이곳에서 평생의 친구를 만난다. 바로 작곡가 니콜라이 미야스코프스키(Nikolai Myaskovsky)이다. 프로코피예프가 음악원에서 가장 어린 학생이었다면, 그보다 열 살 위인 미야스코프스키는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 축에 속했다. 두 사람은 성격이나 음악적 지향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였지만, 이 우정은 미야스코프스키가 사망하는 1950년까지 40년 넘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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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니콜라이 미야스코프스키(1881-1950)


음악원 시절 프로코피예프가 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피아노 협주곡 1번>이다. 프로코피예프는 1914년 음악원에서 열린 피아노 경연에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우승한다. 그는 부상으로 그랜드 피아노를 받는다.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1번> 연주 영상
피아노 다닐 트리포노프, 발레리 게르기예프 지휘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음악원을 졸업한 프로코피예프는 유럽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에서 그는 앞으로 중요한 협업자가 될 사람을 정식으로 만난다. 바로 '발레 뤼스'를 창립한 디아길레프이다.

1909년 황실 발레단(현 마린스키 발레단)의 여름휴가 시즌을 이용해 파리에서 선보인 '러시아 시즌'으로 시작된 발레 뤼스는 러시아 출신 무용수뿐만 아니라 당시 유명한 예술가와의 협업을 통해 수많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발레 뤼스의 대표작 중에는 1913년 초연된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봄의 제전>이 있다.

프로코피예프 역시 발레 뤼스의 위촉을 받아 작곡하기 시작한다. 그가 처음 발레 뤼스를 위해 쓴 <알라와 롤리>는 결국 발레로는 제작되지 못하고 대신 <스키타이 모음곡>으로 완성된다. 프로코피예프가 발레 뤼스와 협업해 첫 번째로 완성한 발레는 바로 1921년 초연된 <어릿광대>이다. 이후에도 프로코피예프는 발레 뤼스와 1927년 <강철의 걸음>, 1929년 <탕자>의 두 작품을 더 만든다.


프로코피예프 발레 <어릿광대> 중



2. 혁명과 미국행

1917년, 러시아에서는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하는 2월 혁명과 볼셰비키가 집권하게 되는 10월 혁명이 일어난다. 러시아의 운명을 뒤흔든 이 혁명은 당연히 프로코피예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2월 혁명 직전, 프로코피예프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페라 <도박사>의 리허설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2월 혁명이 발발하고 <도박사>의 공연은 무기한 연기된다.

10월 혁명이 발발하고 볼셰비키가 집권하자 수많은 예술가들이 러시아를 떠나 망명한다. 작곡가 중에서는 대표적으로 라흐마니노프와 스트라빈스키가 망명했다. 프로코피예프 역시 1918년 러시아를 떠나 미국으로 향한다. 앞의 두 사람과 다른 점은 프로코피예프는 러시아 정부에서 정식으로 서류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교육인민위원인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로부터 '건강과 예술적 필요성'을 이유로 미국행을 허가받는다. 정식 서류를 받은 프로코피예프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일본을 거쳐, 1918년 8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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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미국에서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고 투어 공연을 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프로코피예프는 무엇보다 자신을 작곡가로 인식했다. 곧 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가 될 오페라를 작곡한다. 바로 18세기 이탈리아의 극작가 카를로 고치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이다.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은 심기증에 걸린 왕자가 파티에 초대된 마녀를 보고 웃었다가 세 개의 오렌지와 사랑에 빠지는 저주에 걸린다는 내용이다. 가장 대표적인 곡으로는 심기증에 걸린 왕자를 웃기기 위해 열린 파티의 시작 장면에 등장하는 '행진곡'이 있다.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은 1921년 12월 시카고에서 초연되지만 반응은 다소 냉담했다. 같은 12월 초연된 프로코피예프의 또 다른 작품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미국 방문에 다소 가려진다. 그러나 두 곡 모두 지금까지 프로코피예프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프로코피예프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공연 영상
리옹 오페라



3. 유럽에서 러시아로

1922년 프로코피예프는 뜻밖의 장소로 이사한다. 바로 독일 남쪽 에탈이라는 작은 도시였다. 이곳에서 그는 미국에서 만나기 시작한 스페인 국적의 가수 카롤리나 코디나(리나)와 결혼식을 올린다.

에탈에서 프로코피예프는 새 오페라 <불의 천사>를 작곡하는 한편, 파리와 런던에서 <피아노 협주곡 3번>을 공연한다. 그러나 유럽 무대에서 입지를 확실히 다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곡들이 필요했고, 프로코피예프는 자연스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두고 온 곡(<피아노 협주곡 2번>, 오페라 <도박사> 등)을 떠올린다.

내전이 끝나고 러시아 정세가 점차 안정되자 러시아와 유럽 간 교류가 재개된다. 프로코피예프는 미야스코프스키 등 러시아에 사는 지인들과 다시 편지를 주고받게 되고, 이 과정에서 <피아노 협주곡 2번> 악보가 소실됨을 알게 된다.

다시 쓴 <피아노 협주곡 2번>은 특히 프로코피예프가 '오직 나만이 연주할 수 있다.'라고 말하기까지 한 극악의 카덴차로 유명하다. 이 곡은 1924년 파리에서 초연된다. 이무렵 프로코피예프는 에탈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파리로 이사해 1936년 러시아로 영구 귀국할 때까지 이곳에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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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코피예프가 1922년부터 2년간 거주했던
현 독일 바이에른주 에탈


그러나 이 당시 프로코피예프의 유럽 활동 전망은 불투명했다. 순탄하지 않은 초연 과정, 스트라빈스키와의 묘한 라이벌 구도와 호평과 혹평의 교차, 그리고 <교향곡 2번>과 같이 새로운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겹쳤다. 반면 1926년, 프로코피예프의 귀에 모스크바에서 <스키타이 모음곡>과 발레 <어릿광대> 등의 공연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곧이어 모스크바에서 프로코피예프의 곡을 성공적으로 공연한 페르짐판스 오케스트라는 프로코피예프에게 공연을 위해 러시아에 방문할 것을 제안한다. 그 이전부터 러시아행을 고민하고 있던 프로코피예프는 이 제안을 승낙하여 1927년 초, 9년 만에 러시아를 방문하게 된다.



4. 9년 만의 러시아

1927년 프로코피예프의 러시아 방문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었다. 프로코피예프는 모스크바,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예정된 공연에서 연주하는 한편,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척과 동료들을 만난다. 특히 레닌그라드 마린스키 극장에서 이루어진 세르게이 라들로프 감독의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공연은 프로코피예프가 미국과 독일에서 이전에 보았던 그 어떤 공연보다도 만족스러웠다고 평한다.

한편 프로코피예프는 모교인 레닌그라드 음악원을 방문하고, 레닌그라드 음악가들의 모임에서 이 음악원을 막 졸업한 젊은 작곡가 한 명을 만나게 된다. 바로 프로코피예프와 함께 20세기 러시아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 꼽히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였다. 이외에도 프로코피예프는 키예프, 오데사를 순회하며 공연한다. 특히 오데사에서는 당시 19살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를 만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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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성공적이었던 러시아 방문을 뒤로하고 다시 유럽에 돌아온 프로코피예프는 유럽과 미국 무대에서의 활동을 이어간다. 발레 뤼스와의 협업은 계속되어 1929년에는 성경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바탕으로 발레 <탕자>를 제작, 초연하게 된다.

그러나 발레 <탕자>는 프로코피예프와 발레 뤼스의 마지막 협업임과 동시에 발레 뤼스의 마지막 작품이 된다. 1929년 8월 발레 뤼스의 창립자 디아길레프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디아길레프의 사망으로 발레 뤼스에서 활동했던 수많은 예술가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프로코피예프는 유럽 활동의 중요한 기반 하나를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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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뤼스를 설립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한편 1927년 러시아 방문 이후 프로코피예프는 주기적으로 러시아를 방문한다. 또한 그는 러시아에서 곡 위촉을 받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34년 개봉한 유성영화 <키제 중위>가 있다. 영화 <키제 중위>는 철자 실수로 만들어진 '키제 중위'라는 가상의 인물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고, 진급하고, 심지어 결혼도 하는 내용으로 유리 티냐노프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프로코피예프의 첫 영화음악 작품이기도 한 <키제 중위>는 모음곡으로도 만들어져 지금까지도 많이 연주된다.


알렉산드르 파인침머 감독, 영화 <키제 중위>



5. 다시 러시아로

1934년, 프로코피예프는 레닌그라드 마린스키 극장과 중요한 작품 하나를 계약한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원작으로 발레를 쓰기로 한 것이다.

시작은 마린스키 극장에서 였지만 복잡한 내부 사정으로 인해 <로미오와 줄리엣> 프로젝트는 볼쇼이 극장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1935년 여름, 프로코피예프는 처음으로 온 가족이 함께 러시아에 방문한다. 그들은 오카 강 근처의 볼쇼이 극장 소유 별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프로코피예프는 이곳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작곡한다. 그러나 발레의 초연은 미루고 미루어져 1938년 볼쇼이 극장이 아닌, 체코슬로바키아 국립 브루노 극장에서 극의 일부만 초연된다.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 러시아 초연은 1940년 레닌그라드 마린스키 극장의 공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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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갈리나 울라노바와 유리 즈다노프
갈리나 울라노바는 1940년
레닌그라드 마린스키 극장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에서 줄리엣 역을 맡았다.


그 사이 1936년 봄, 프로코피예프는 오랜 고민 끝에 러시아로 영구 귀국한다. 프로코피예프가 왜 러시아로 돌아갔는지에 대한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은 프로코피예프의 러시아 귀국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많은 약속을 했다. 그 약속에는 새 작품의 출판 및 공연 보장, 정기적인 해외 공연 투어 등 작곡가로서 경력을 위한 것부터 주거, 별장, 자동차, 자녀들의 교육에 관한 것까지 포함되었다.

확실히 이 제안은 프로코피예프의 귀에 솔깃했던 듯하다. 1937년 미국에서 프로코피예프를 만난 러시아 출신 작곡가 버넌 듀크(Vernon Duke)의 회고를 보면 프로코피예프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어떻게 소련과 같은 전제주의 국가에서 살고 작곡할 수 있냐는 듀크의 질문에 프로코피예프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정치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네. 나는 무엇보다 작곡가니까. 평화롭게 곡을 쓰게 놔두고, 작곡한 것은 무엇이든 잉크가 마르기 전에 출판해주고, 내 펜으로부터 나온 모든 음을 공연하게 해준다면 어느 정부든 괜찮네. 유럽에서 우리는 공연 기회를 잡으러 다녀야 하고, 작곡가와 음악 감독들을 설득하러 다녀야 하지. 러시아에서는 그들이 내게로 온다네."


- 버넌 듀크, <Passport to Paris>, 344-345



러시아로의 귀국을 염두해서일까. 프로코피예프는 음악적으로도 새로운 지향점을 찾는다. 1934년 러시아 일간지 <이즈베스티야>와의 인터뷰에서 프로코피예프는 선율의 중요성과 '새로운 단순성'을 언급한다. 이는 이후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의 중요한 특징이 된다.

그렇다면 돌아온 프로코피예프에게 러시아 당국은 약속했던 것들을 지켰을까? 러시아로 돌아간 이후 프로코피예프의 음악과 삶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을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다음 글에서 계속 이어나가기로 한다.


[홍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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