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람답게 살 '권력'이 부족합니다 - 레라미 프로젝트 [공연]

글 입력 2019.07.24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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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행복한 도시 레라미’로 시작되었다. 레라미 사람들은 소규모 공동체로서 마을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이 있었다. “레라미는 어떤 곳인가요?”라는 질문에 주민들은 레라미를 바람, 햇빛, 친절이 넘쳐나는 좋은 곳이라 소개했다. 인터뷰만 들어보면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레라미로 떠나고 싶을 만큼 레라미는 아름답고 좋은 도시였다.

그러나, 메튜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주민들을 대화를 꺼렸다.


레라미 사람들은 다 그래.
게이건 아니건 상관 안 해.
직접적으로 해만 안 끼치면
절대 차별 같은 거 안 해.

사건 직후 레라미 사람들은 ‘그들이 그 사건과 얼마나 관련이 없는지’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자신들은 동성애자를 차별하지 않는다며 레라미는 차별이 없는 도시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레라미에 거주 중인 동성애자는 말했다. 레라미는 성소수자로 살 수 없는 곳이라고.


레라미 주민
"우리는 다 함께 살아간다.
단, 그들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조건."

*

성소수자
"레라미는 차별의 도시이다.
게이로서 살 수 없다."



레라미인과 레라미의 성소수자의 입장 차이. 도대체 이것이 의미하는 게 무엇일까?





소수자 혐오에 있어서 ‘혐오’의 의미는 사전적 의미와는 다르다.

‘싫어하고 미워함’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 사회적 권력을 가진 집단이 특정 대상에게 차별적 행위와 불평등한 대우를 하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그 집단이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에 ‘혐오’라는 표현을 쓴다.

레라미인들이 성소수자들에게 보이는 태도는 ‘혐오’에 해당할까? 레라미 성소수자의 말을 통해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게이들이 다가오거나
건드리지 않으면 때리지 않겠다.
그러니까 우리 보고 감사하라는 거에요.
때리지 않는 걸 고마워하라는 뜻이에요.

성소수자들은 레라미 내에게 주민들에게 ‘다가가면 안 되는’ 존재이다. 그들을 혹여나 잘못 오해를 받아서 위협을 당할까 늘 ‘공포감’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레라미 사람들은 쉽게 “우리는 관심 없다.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 차별 안 한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 말에도 그들의 권력이 드러난다. 개인의 성정체성은 타인이 좋고 싫어할 문제가 아니다. 좋다, 싫다의 입장을 내세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레라미 주민들이 성소수자에게 어떠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성소수자들은 레라미 주민을 상대로 눈치를 봐야 했다.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좋고 싫고의 판단권을 한 집단이 가지고 있는 순간부터 혐오는 시작된다.

레라미는 혐오의 도시이다.





1년 후 다시 찾은 레라미는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사람들은 외지인에게 한층 더 예민해져 있었다. 메튜 셰퍼드 사건이 퍼진 후, 기자들과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시달렸던 탓이었다. 그들은 많이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분노의 핵심은 ‘레라미’였다. ‘레라미’전체가 메튜 셰퍼드 사건으로 화두에 올랐다는 사실이 화가 났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 마을은 ‘그런’ 마을이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좋은’ 마을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마을이 되는 것이다. 레라미는 확실히 ‘좋은’ 마을이다. 그러나 그 사실에 너무 심취했던 레라미 사람들은 진실을 외면했다. 레라미가 메튜와 성소수자에게 가했을 폭력을 외면 하기 위해 좋은 마을이라는 포장지를 강조했다.

메튜가 게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주목을 받았겠어요?
게이들이 작당하고 달려드는 겁니다.
레라미 사건을 이용해
게이들이 목소리를 내는 거라고요.

한 사람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폭행을 당해 죽었다. 다른 성소수자들은 이 사건을 듣고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사건을 계기로 사회에 생기는 변화는 ‘이때다 싶어서 뒤집어진’ 사회가 아니다. 이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한 ‘생존 운동’이다. 물론 레라미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일 수도 있지만, 단 한 번도 소수자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 그들에게 또다시 모든 것을 뒤집어씌어서는 안 된다.

레라미인들에게는 ‘체면’의 문제이지만, 성소수자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이다. 한 집단의 ‘생존’ 문제가 다른 집단의 ‘체면’ 문제라는 점에서 또 한 번 권력차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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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슬로의 욕구단계설


매슬로의 욕구단계설을 통해 권력차를 시각화할 수 있다. 레라미 주민들의 욕구는 ‘존경 (Esteem)’ 욕구에 해당한다. 성소수자들의 욕구는 ‘안전 (Safety)’에 해당한다. 레라미 주민들은 이미 생리적 (Physiological), 안전, 소속 (Love & Belongings) 욕구가 모두 채워졌기 때문에 그 위 단계인 존경 욕구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소수자들은 여전히 안전 욕구를 위해 ‘투쟁’을 해야 한다. 차별의 구조가 아닐 수 없다.






보고 들으신 대로 자알~ 써주세요.
우리 레라미가 얼마나 좋은
마을인지 아시잖아요.

마지막으로 떠나는 극단에게 레라미 사람들이 한 말이다. 하지만, 레라미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보고 들은 게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레라미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다양한 폭력과 차별이 존재해왔다. 드러나지 않던 것들이 메튜 셰퍼드 사건으로 수면 위로 떠 올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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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우리가 어떻게 했느냐에 달려 있겠지…

아마 그들도 알았을 것이다. 단지 ‘좋은’ 레라미를 너무도 되찾고 싶은 마음에 인정하지 않았을 뿐, 조금씩 직면하고 인정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도 넘쳐나는 차별들이 있다. 그리고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한 권력차를 나타내는 구조들도 많다. 혐오 범죄가 발생했을 때,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나는 관심 없었어요.”, “몰랐어요.”는 절대 면죄부가 될 수 없다. 모를 수 있는 것도 권력이다.


나도 한때는 차별의 구조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비겁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고 모든 집단에서 ‘다수’이며 ‘권력층’일까? 절대 아니다. 다수와 소수는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에 상황이 변하면 나의 권력 위치도 바뀔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누구에게 그 권력을 사용하고 있는가?


잊지 말자. 나도, 우리도, 누구도,

어딘가에서는 소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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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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