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행은 반드시 징벌돼야 한다 - 웹툰 "소년이여"

글 입력 2019.06.2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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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논리와 이분법을 싫어한다. 피해자가 승리하고 가해자가 징벌당하는 서사는 통속극에나 어울린다. 누구나 권선징악의 결말을 원하지만 삶은 통속극이 아니고 도식적인 흐름으로 흘러가는 서사는 더더욱 아니다.  삶의 세계에서 부스러기 없이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가름하기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삶의 영역에서 아주 협소한 일부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당신과 내가 시시각각 느끼고 대면하는 일상의 모든 체감들과 사사로운 관계 하나 하나를 좋음과 나쁨, 옳고 그름으로 명확히 규정해내기란 불가능하다. 삶은 서사가 아니다. 거기엔 애증과 분노와 체념과 열등감과 우월감과 단어를 붙이기에도 모호한 것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삶의 세계에서 작동하는 모든 일들은 선과 악같은 명확한 것들로 구성돼 있지 않다. 거기서 분명한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건 도무지 쉽지 않다.


그러나 버젓이 자행되는 악행들이 있다. 불투명한 삶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자취다. 악행의 주체가 어찌하여 악해졌는지를 가늠하기 쉽지 않은 공간이 삶일 테다. 다만, 주체의 의도가 어쨌느니를 따지는 건 차치하고, 명백히 부도덕한 '악'이 삶에서 종종 등장하는 순간을 목도한다.


불행한 일상의 연속일 뿐인 스스로와 그에 비해 미소 지으며 활보하는 타인들. 자신과 타인의 간극은 메워지지 않고 메워지긴커녕 더 불행해질거라는 비관이 스스로를 채운다. 비관은 체념이나 우울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분노로 변모한다. 왜 불행은 오롯이 나에게만 할당되는 건가. 불행이 제 몫을 다하고 소멸하는 순간은 대체 언제인가. 불행은 늘 왜 나를 겨냥하는가. 왜 나만 그런가. 왜 나만.


그래서 지나가는 타인을 벽돌로 내리찍고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쏴버리고 강간했다는 사람들. 그들이 어떤 풍경에서 성장했으며 지금 어떤 환경에 노출됐는지, 악행의 함의를 발견하는 건 중요하다. 내겐 애초부터 명확한 '악'이란 삶에서 등장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다. 악은 태초부터 잉태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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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행의 주체가 어찌하여 '악'해졌는지에 대한 궤적을 대충 그려보자. 비이성과 짜증섞인 고함, 폭행으로 즐비한 풍경을 목도하며 자란 개인. 그리하여 폭력을 세습하고 비이성과 광기를 재생산하는 군상으로 성장했다는 분석이 전형적일테다.


<소년이여>의 악은 학교폭력이다. 내가 너보다 낫다는 우월감을 드러내기위해 폭력을 동원하는 <소년이여>의 악인들은 살벌하다. 그들은 가벼운 악의만으로 악을 자행한다. 재미있어서 타인을 괴롭힌다. 그러한 악인들이 작품속에서가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활개하는 모습을 우리는 아주 버젓이, 꽤 자주 목격한다. 그래서 더 무섭다.


<소년이여>는 피해자의 복수극 따위같은 전형적 궤도를 이탈한다. 복수의 성공으로 귀결되는 극복의 서사를 충실히 이행하거나 주인공에 동조하지 않는다. 한껏 악함을 드러낸 인물들의 사연을 들춰내며 가해자를 미화하는 식도 아니다. 말하자면 <소년이여>의 서사는 악행은 반드시 징벌돼야 한다는 작가의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징벌을 집행하는 주체가 선이냐 악이냐 따위를 구태여 구별하지 않는다. 선과 악을 명확히 이분하는 권선징악의 서사가 여기엔 없다. 당연히, 악이 잉태된 사회적 배경에 대하여 치열한 문제제기나 나름의 문제의식을 던지는 것도 아니다. 독자가 이입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주인공이 몇화만이 뇌사상태에 빠지고, 정의가 어쨌다느니 윤리와 도덕이 어쨌다느니 궤변같은 설교를 늘어놓는 장면도 없다.


악행은 징벌돼야 한다는 명료한 주제는 결말에서 완성된다. 가해자의 성장환경을 다룬 플래시백이 동원되고, 가해자가 가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사연을 그제서야 펼쳐놓는다. 불우한 어린시절,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가해자의 서사가 잠시 등장한다. 구태의연한 서사가 으레 그렇듯 이것 역시 악인들에게 연민을 부여하는 건가 싶을 무렵에, 가해자는 비장하게 외친다. 내가 이렇게 된건 전부 사회 때문이야. 니들 같은 어른이 날 이렇게 만든거라고. 주인공은 한 방에 일갈한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넌 그저 내동생을 이렇게 만든데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 뿐이야.


말하자면, <소년이여>가 결말에 이르러 악인의 사연에 몇화를 할애한 건 본작의 주제와 상통하는 주인공의 일갈을 더 돋보이게 위해서다. 피식거리는 비소를 동반한 주인공의 일갈은 작가의 외침이 된다. 악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건 좋다. 그것이 어떻게 출생한건지에 대한 궤적을 가늠해 보는것도 좋다. 흑백논리와 이분법으로 악을 재단하는 것보다 악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게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쨌거나 악행은 반드시 징벌돼야 한다.



[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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