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일상 속 차별의 모양 [문화 전반]

글 입력 2019.06.05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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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시작하기 앞서 필자는 오른손잡이이자, 20대 비장애인 여성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위와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아래와 같은 글을 쓰는 것 또한 하나의 권력임을 반성합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우리가 글을 읽을 때 무의식적으로 상정하게 되는 일반적인 화자, 즉 말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화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

얼마 전, 학교 앞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있었던 일이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이곳 신호등의 신호가 다른 장소보다 유난히 짧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 걸음이 느린 편이라 횡단보도를 건널 때에는 유난히 속도에 신경을 쓰는데, 평소보다 걸음을 빨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신호등에는 금방 빨간 불이 켜졌다. 유동 인구와 차량이 많은 장소라 그런지 신호등은 좀처럼 느림보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가볍게 뛰어 인도에 발을 디뎠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파란 불이 깜빡거릴 때 뛸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길을 건너야 할까? 지팡이를 짚은 노인들이 건널목을 바라볼 때 느끼는 막막함과 무력감을, 튼튼한 두 다리를 가진 20대의 내가 감히 상상해 볼 수 있을까? 이 넓은 사거리를 떼지어 다니는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는 소외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빠른 속도와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시스템을 과연 건강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 거대한 물레바퀴의 우레와 같은 물살에 목이 잠겨버린 개구리들을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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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질문을 던져 보고 나니, 이전에 주위 사람들이 말해주었던 많은 소외의 경험들을 자연스럽게 연상해 보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왼손잡이와 관련된 기억이었다. 언젠가 왼손잡이인 친구 중 한 명에게 왼손잡이여서 가장 불편한 점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해준 대답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터라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친구는 다름아닌, 문고리를 돌리는 것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보통의 원형 문고리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리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왼손을 자주 쓰는 자신은 그것이 때때로 불편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더 물어보지 않아도, 위에서 아래로 내리도록 설계된 문고리 또한 손잡이가 오른쪽으로 나 있기 때문에 왼손잡이가 사용하기 불편할 수 있다는 걸 금방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오른손잡이인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누려왔던 편의였다.

친구의 대답은 당시의 나에게 꽤나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문고리라니! 참신한 대답을 기대했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글씨를 쓸 때 손이 종이에 쓸려 잉크가 번진다’ 정도의 대답을 예상했던 나 자신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친구는 또한, 휴대전화의 전원 버튼을 누르는 것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오른쪽에 전원 버튼이 달려 있는, 아이폰을 포함한 많은 휴대전화 기기는 분명 왼손잡이가 사용하기에 불편할 것 같았다.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들로 휴대폰을 감싸쥐고, 상대적으로 짧은 엄지손가락으로는 전원 버튼을 누를 수 있도록 설계된 이 기기들은 당연히 오른손잡이가 사용하기 더 편할 것이었다. 친구는 이외에도, 어렸을 때 ‘ㄹ’과 같은 글자를 종종 반대로 쓰곤 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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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말해준 불편함들은 모두 평소에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것들인 동시에, 조금만 생각해 보면 바로 납득할 수 있는 단순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친구가 자라면서 왼손잡이로서의 불편함을 덜 느끼게 된 것은 다만 오른손잡이 위주의 시스템에 익숙해진 것일 뿐, 왼손잡이에 대한 사회의 보편적 인식이 개선되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친구가 지금 휴대전화를 잘 사용하고 있는 것은 전원 버튼을 왼손으로 누를 수 있는 나름의 노하우를 스스로 개발했기 때문이지, 왼손잡이가 사용하기 편한 제품이 시중에 출시되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 나름의 방법을 찾아 이래저래 적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왼손잡이 친구에 이어, 언젠가 유튜브 컨텐츠 크리에이터 박막례 할머니께서 영상에서 하신 말씀도 떠올랐다. 영화 리뷰를 소재로 한 영상이었는데, 특정 영화의 감상평을 말씀하시던 중에 할머니께서 영화 자막 크기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영화 자막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당신같이 시력이 좋지 않은 노인 분들은 영화를 봐도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었다. 외국 영화는 특히 언어와 소재도 친숙하지 않은데, 자막이 금세 다음으로 넘어가 버리면 할머니와 같은 노인 분들은 더더욱 영화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상에서 소수자가 소외되는 방식이 어떠한지,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여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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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블럭을 걸으며 이런저런 기억들을 떠올리다 새삼 ‘차별’이라는 것이 얼마나 일상 속에 깊게, 또 성실하게 침투해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또 그래서 이 차별에 대한 경계가 관념 속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되새기게 되었다. 차별에 대한 경계는 분명 일상 속의 구체적 실천이어야 한다. 그리고 경험해 보지 않으면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이 일상 속 소외의 경험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목소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겨우 건널 수 있는 횡단보도와 오른손잡이만을 위한 문고리, 누군가에게는 터무니없이 작은 영화 자막은 결코 사소한 문제들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의 이런 구멍들에 조금 더 예민하게, 또 집요하게 매달릴 필요가 있다. 냉정한 시장의 논리에 의해 당장은 보편화되지 못할, 큰 크기의 영화 자막을 모두가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러한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꽤 오랜 시간 논의되지만 여전히 미해결의 상태에 놓여있는 이 익숙한 문제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사회 곳곳에서 끈질기게 숨죽이며 살아 있었는지 새삼 되새겨 본다.


[이승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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