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답이 없기에 완성될 수 있었던 연극, "단편소설집"

연극 <단편소설집> 리뷰
글 입력 2019.05.18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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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움직이는 연극이었다. 시작할 때와 끝날 때의 공기가 너무나 달랐지만, 톤이 일정치 않아서 어색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가볍고 유머러스하게 시작한 연극은 무겁고 날카로운 딜레마로 끝나는데, 그러한 변화는 극 중 인물 간의 관계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물들 역시 더욱 살아 숨 쉬는 작품이었다. 연극 전체가 하나의 역동적인 생명처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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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단편소설집>은 2000년 퓰리처상 수상작가인 도널드 마굴리스의 작품으로, 2016년 초연 당시 전회 매진을 기록했다. <단편소설집>은 ‘상실과 자아 찾기’라는 작가의 오랜 탐구가 응집된 작품이다. 표면적으로는 스승과 제자, 두 인물의 관계와 갈등을 그리지만 이면에는 각 인물의 내면과 자아의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인형의 집2>, <두 도시 이야기> 등의 작품으로 활약하며 각종 연기상을 수상한 대학로 대표배우 전국향 배우가 스승 루스 스타이너 역을 맡고, 최근 <미성년>으로 영화계에서도 활약하고 있는 김소진 배우가 제자 리사 모리슨 역을 맡았다. 김소진 배우는 영화에서와는 전혀 다른 인격을 완벽히 소화하며 몰입감 높은 연기력을 보여주었고, 전국향 배우는 대사 실수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역시 딜레마에 빠진 스승을 훌륭히 연기해냈다.

무거운 분위기일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연극의 처음 절반은 오히려 유머러스한 편이었다. 어리고 서툰 리사의 과장된 말과 행동, 그런 리사를 받아내는 연륜 있는 루스의 반응에 곳곳에서 웃음이 났다. 게다가 극의 마지막 2-30분 내내 이어지는 무거운 내용과 비교해봐도 이질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유머이기도 했다. 극이 너무 무거워지지 않도록 균형감을 잡으면서도 전체의 통일성을 지킨 각본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아는 한 작가는 다 작가야, 무슨 장르를 쓰든”

몰입감 있는 연기, 균형감을 잡는 유머, 그 중 깊은 울림을 주는 대사까지. 여러 면에서 매력적인 작품이었지만, 다른 점은 생략하고 대신 서사에 바로 다가가고자 한다.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 두 작가의 이야기, 연극이 끝날 때까지 답이 내려지지 않는, 루스와 리사의 딜레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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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초반에 리사가 스승 루스에 대해 보이는 존경심은 거의 종교적 숭배에 가깝다. 명성 높은 작가이자 인생의 멘토, 감수성 여린 고등학생 시절 자신에게 영감을 주고 삶의 방향을 정하게 해 준 사람. 언제나 갈망하고 동경하던 그런 사람을 눈앞에서 만나는 그 심정은, 내가 리사였어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리사에게 루스 역시 흥미를 느낀다. 리사가 써 온 작품은 거칠지만 반짝였고, 가능성이 보였다. 어쩌면 리사가 루스를 광적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 마음에 끌렸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루스 역시 리사를 조금씩 자신의 삶에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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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모든 것을 흡수할 듯이 덤벼들던 리사는, 스승을 통해 성장하면서 조금씩 스승에게 반문하고, 스승을 따라잡고, 스승을 능가한다. 그렇게 리사는 스승을 거쳐 스승에게서 조금씩 떨어져나간다. 반면 루스는 리사에게 자신의 지혜와 시간과 삶을 조금씩 내어 주면서 점점 리사에게 흡수되어 간다. 리사에게 자신의 애정을 쏟아 부으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조금씩 쇠약해져가는 것이다.

“나는 네 앞에 놓인 모든 삶들에 질투가 난다.”

제자의 첫 작품이 세상에 나오고 성공을 거뒀을 때, 루스는 온 마음으로 축하해주지 못한다. 아마 제자의 성공 자체가 질투난다기 보다는 과거에 자기도 겪었던, 그러나 이제 다시는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을 젊음과 영광과 그 모든 가능성들에 질투가 났을 것이다. 루스는 이제 자신과 동등한 동료 작가가 된 리사를 보며, 그리고 이제 성장할 일만 남은 리사와 점점 쇠약해지는 자신을 대조하며 복잡한 심정을 느낀다.

동시에 리사 역시 마음이 무거웠다. 뛰어난 첫 소설을 발표해도, 첫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 되어 세상에서 사라지는 작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리사는 자기 역시 그런 작가가 될까봐 첫 성공 앞에서도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안의 소재가 단 한 작품만에 고갈되었다고 느꼈다. 리사는 자신도 모르게 스승의 가장 은밀한 이야기를 캐내기 시작한다. 루스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 것도 모른 채 가장 사랑하는 제자에게 가장 사랑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결국 리사가 ‘루스와 시인 델모어 슈워츠의 사적인 관계’를 소재로 장편소설을 써서 발표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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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사라져버린, 그러나 그때는 한없이 반짝였던, 순수하고 끔찍했던 자신의 어릴 적 사랑과 상처가 온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것도 자식처럼 끔찍이 사랑했던 제자에 의해. 루스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은 무대 전체를 가득 메운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나 자신조차도 쓰지 않은, 그만큼 아프고 소중한 이야기를, 온 세상에 까발리다니, 어떻게 그렇게 배신하냐고 리사에게 소리 지른다.

“선생님,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저는 선생님이 화내시는 게 너무 무서워요….”

그러나 리사는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억울해하고 자기를 이해해달라 말한다. 선생님이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 나는 느꼈다고, 당신이 쓰지 못한 이야기를 나에게 쓰라고 주셨다는 것을,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그 이야기가 자신을 사로잡고 놔 주지 않아서, 쓸 수밖에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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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리사의 태도가 어이없기만 했다. 기만도 저런 기만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자신을 키워주고 믿어주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훔칠 수 있을까, 본인도 쓰지 못했을 만큼 아픈 이야기를. 루스가 ‘작가는 남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고 가르쳤다고 한들, 그 이야기가 꼭 루스의 이야기여야만 했을까? 그래놓고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고, 저런 식으로 변명을 하다니, 너무나 배은망덕한 제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갈등을 지켜보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리사에게 조금씩 수긍이 갔다. 물론 리사의 변명이 모두 거짓일 수도 있고, 오직 자신의 성공을 위해 스승의 이야기를 훔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 연극이 너무 시시해질 것이다. 나는 리사의 말이 거의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리사는 정말로 스승을 사랑해서 그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예전처럼 스승을 숭배하지는 않을 수도 있고, 또 후속작에 대한 압박과 불안 역시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루스를 존경하고 사랑했고, 스승을 사람들 앞에서 조롱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스승의 아픈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재창조하고 싶어 했을 뿐이다.

게다가 리사의 작품은 어쨌든 픽션이다. 사실 그대로도 아니며 그대로일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소설이고 예술 작품일 뿐이다. 리사는 허구에 대해 루스가 그토록 화를 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소설 속 창조된 세계를 현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 건 루스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리사는 모든 것을 스승에게서 배운 대로 했을 뿐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상식은 루스의 편을 들었지만, 나의 감정은 나도 모르게 리사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과연 누가 옳을까? 이 갈등에 답이 있을까? 결국 나는 끝까지 답을 내리지 못한 채로 극장을 나왔다. 집착적이다시피 딜레마를 파고드는 이 극은, 답을 내려주지 않아서 진정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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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남은 의문 하나. 이 작품의 제목은 왜 단편소설집일까? 단순히 극 중 인물이 작가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두 사람의 갈등이 폭발하는 계기는 단편소설집이 아니라 리사의 장편소설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한 건 어쩌면, 리사의 첫 작품인 단편소설집의 성공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또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의 관계와 서로에 대한 마음이 극과 극으로 변해가는 것을, 서로 다른 단편소설들에 빗댄 것은 아닐까? 조각 단편 같은 두 사람의 시간들로 이루어진 이 극은 두 시간 길이의 단편소설집이 되는 것이다. 이 단편소설집은 꼬이고 엉켜 결국 비극적으로 끝나지만, 그래서 더욱 훌륭한 작품이라고, 또 단지 끝만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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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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