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연극 "단편소설집"이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글 입력 2019.04.28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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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접한다. 그리고 모두 그 이야기들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어낸 작품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허구에 불과한 그들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이입하고 영향을 받기도 하는 걸까? 그건 이야기가 우리와 같이 기쁘고, 슬프고, 아프고 죽기도 하는 사람을 다루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야기는 만들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살아감으로써 이야기를 창작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도둑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도둑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녔다. 한 가지 삶밖에 살 수 없는 한 사람이 새로운 인생을 창조할 때, 실제 존재하는 사람을 참고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이야기를 창작하는 행위는 곧 다른 사람의 삶을 훔치는 행위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훔친 결과물을 향유한다.

 

그런데 그 훔쳐진 삶이 나의 삶이라면 어떨까? 나의 사생활이 타인에 의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만천하에 공개된다면 어떨까? 그런 상황에도 과연 태연하게 도둑질은 작가의 숙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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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단편소설집>


존경받는 단편소설 작가이자 문예창작과 교수 루스 스타이너에게는 그녀를 숭배하는 대학원생 리사 모리슨이라는 제자가 있다. 6년 동안 루스의 지도를 받으며 리사는 어엿한 작가로 성장한다. 단편소설집 출간 후 호평을 받은 리사는 자신의 스승 루스와 시인 델모어 슈워츠의 사적인 관계를 담은 장편소설을 발표한다. 자신의 인생이 소설 소재로 쓰인 것에 분노하는 루스와 예술가라면 마땅히 해야 했을 선택이라고 말하는 리사의 갈등은 깊어져만 가는데…


 

스승이란 본디 일방적으로 주는 존재고 제자는 일방적으로 받는 존재다. 그것이 지식일 수도 있고, 경험일 수도 있고,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인생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기, 제자로부터 삶을 도둑맞은 스승이 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이 제자에 의해 예술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스승이 있다. 이 스승 루스라는 인물은 기존에 항상 훔친 자의 시선에서 표현된 이야기만을 접한 우리에게 과연 타인의 삶을 소재로 쓰는 것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는 경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영감을 얻었다는 말로 포장되었던 수많은 작품들을 봐왔다.


그 작품에 그 소재를 제공한 실제 인물의 목소리는 없다. 그 목소리는 아예 드러나지 않거나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작품 외부에서 자신이 그 예술의 소재가 된 것에 대한 영광 혹은 자신의 삶을 허락 없이 왜곡했다는 주장을 담은 기사를 통해 나타난다. 그러니까 연극 <단편소설집>처럼 그 작품 속에서 실제 모티브가 된 인물이 그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떤 이야기가 예술의 범주 밖에 있을 때 우리는 냉정해진다. 그 말은 즉, 어떤 이야기가 예술의 범주 안에 들어있으면 우리는 객관성을 잃게 된다는 말과 같다. 한 예술 작품이 그에 따른 논란거리를 가지는 경우는 몹시 흔한 일이다.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했든, 그러지 않았든 보통 그 논란은 작품 속 내용이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때 불거진다. 그리고 그 논란을 접한 사람들은 예술은 예술로만 봐야 한다는 주장과 예술을 현실과 접목해서 봐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한다.


그런 점에서 한 작품 안에 예술가의 숙명을 주장하는 리사와 현실의 상도덕을 논하는 루스가 공존한다는 것은 충분히 흥미를 불러일으킬만한 지점이다. 나에게는 그 부분이 관객에게 과연 어디까지가 예술로 끝날 수 있는 경계인지에 대해 정면으로 물어보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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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덧붙여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연극이 여성 2인극이라는 것이다. 한국 예술에서 모녀 관계가 아닌 두 여성을 다룬 사례가 얼마나 있는가.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 활발한 이 시대에 연극 <단편소설집>은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정을 분출하며 대립하는 신선한 관계의 두 여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관객들에게 의미 있는 여성 서사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동안 남성주의적인 시각에서 여성을 지워왔던 수많은 예술가에게 이 연극은 곧 두 명의 여자만으로도 깊이 있는 작품이 완성될 수 있다는 걸 나타낼 수 있는 상징물인 셈이다.

 

또한, 이 연극은 매력적인 두 여성 캐릭터를 통해 스승 루스로 대변되는 기성세대와 제자 리사로 대변되는 젊은 세대의 갈등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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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이 쉴 새 없이 바뀌는 세상에서 예전의 가치관을 가진 기성세대와 지금의 가치관을 지닌 젊은 세대가 시시각각 충돌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리고 그 갈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관계는 단연 사제 관계일 것이다. 조상들의 기록 속 스승은 부모만큼 존경스러운 존재이고 사제 관계만큼 이상적인 관계도 없다. 하지만 그건 철저히 전통적인 가치관에 입각한 생각이다.


오늘날의 제자들에게는 스승이 전달하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지식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연극은 자신에게 예술을 가르쳐줬던 스승에게 본인만의 예술관으로 반박하는 제자 리사를 등장시켜 예술과 도덕의 딜레마를 곧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딜레마로 연결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사제 관계인 두 여성을 내세워 예술과 도덕의 딜레마에 대해 다뤘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나에겐 이 연극을 봐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나 외에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단편소설집

일시: 2019. 5. 3 ~ 5. 12
평일 7시 30분, 토 3시/7시, 일 3시

장소: SH아트홀

작: 도널드 마굴리스

연출: 이곤

번역: 드라마터그 마정화

출연 : 전국향, 김소진

관람료: 30,000원

관람연령: 13세 이상

소요시간: 150분
(인터미션 15분 포함)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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