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썰썰] 빠순이 청산기 EP1. 시작은 달콤하게

평범하게 너에게 끌려.
글 입력 2019.04.06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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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순이 : 연예인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따라다니는 여성팬을 비하하는 멸칭. 




#시작은 달콤하게 평범하게 


나의 찬란했던 22살 휴학 시절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계기부터 설명해야 하나, 결론부터 나열해야 하나. 펜을 잡은 손을 머뭇댄다. 일 년 남짓한 시간을 두어 장의 원고로 요약하기엔 그때 겪었던 복잡한 감정에 미안하다. 아무래도 이번 '썰'은 장기간 연재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오늘 제목에 숫자를 달아본다.


3년 전, 그저 쉬고 싶어서 휴학을 결정했다. 그 때문에 무척 시간이 널널해진 나는 우연히 갓 데뷔한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를 보았다. 덕통사고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고 입덕은 취향을 파괴하는 법이라더니 분명 내 취향과 거리가 멀었던 그 그룹의 메인 래퍼는 어느 순간 내 폰 사진첩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내친김에 나는 덕질의 성지, 트위터 계정을 파고 일명 트친이라 부르는 트위터 친구들을 만들며 본격적인 덕질을 시작했다.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고 당시 시급의 1.5배였던 알바 덕에 통장에 매달 큰돈이 꽂혔으니 시간과 금전이 여유로웠다.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파고들긴 최상의 조건이었다.



#진짜 덕후 


온종일 트위터를 붙들고 있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타임라인에 상주하던 트친들과 점차 개인적인 카톡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트친이 함께 공개 음악 방송에 참여하자고 권유했다. 그때부터 안방덕질을 넘어 본격적으로 발로 뛰는 덕질이 시작됐다. 내가 빠져있는 아이돌을 눈앞에서 생생히 움직이는 모습으로 본다는 건 정말 매혹적이었다. 자그마한 모니터가 절대 담지 못하는 숨결 하나까지 눈에 담았다. 그렇게 한 방송사의 음악방송이 끝나면 다음 방송사로 넘어가고 또 하염없이 기다렸다. 길게 늘어진 줄에서 자리를 지키느라 길바닥에 버린 시간은 두세시간이 기본이었다.


이렇게 음악방송이나 행사를 뛰는 덕질을 '오프'를 뛴다고 하는데 내가 좋아했던 그룹의 오프 체계는 무척 원시적인 방식인 선착순이었다. 그래서 한 번 오프를 뛰는 날이면 집에 가길 포기하고 근처 24시 카페에서 밤을 새곤 했다. 집에서 방송국이 있는 상암까진 왕복 세시간이 걸렸지만 일주일에 두번은 무조건 음악방송에 출석도장을 찍었다. 그래야만 진짜 '덕후' 소리를 들을 수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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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나는 트위터 팬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다고 생각한다. 모여봤자 한줌인 신인 팬덤이지만 그 안에서도 오프를 자주 뛰는 덕후는 '진정한 덕후'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우습지만 오프를 뛰지 않으면 트위터에서 '네임드'가 되기 어려웠다. 나는 내 삶을 버린 대신 닉네임을 얻었다. '내 새끼를 위해 내 삶을 포기한다!' 얼마나 바보같은 말인가.


그러나 나와 함께 길바닥에 시간을 버리던 덕후들은 정말 그랬다.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다신 오지 않겠다 다짐하며 줄을 서있다가도, 내 아이돌을 보고는 어찌나 좋은지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은 금세 잊고 다음 방송국으로 향하는 게 일상이었다. 한정된 수량의 공식 굿즈를 제일 먼저, 제일 많이 사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 아침의 시작이었다. 이쯤되면 이 글을 읽던 당신은 그런 생각을 하겠지. 덕질이 밥 먹여 주냐고? 응. 밥 먹을 힘은 나게 해주더라.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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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를 자주 뛰었던 이유엔 트친들과 만나기 위함도 있었다. 오프를 뛰며 한두 명씩 만나던 트친은 어느덧 7명으로 늘어났고 신기하게도 우리는 모두 동갑내기였다. '아이돌'이라는 하나의 관심사가 있으니 첫 만남에도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오랜 친구를 만나듯 편안하고 즐거웠다. 공통점이 많았던 우리는 더 자주 만나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 모임은 몸집을 불려 타임라인의 대부분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게 됐다. 즐거움은 매일 함께하며 더욱 커졌다. 우리는 각종 음악방송에 출석체크를 하는 것부터 공개 팬사인회, 음악행사 소식이 들려오면 여지없이 달려갔다. 그 와중에 방송사가 있는 상암과 가까운 곳에서 자취하던 트친의 집은 우리들의 아지트가 되기도 했다.


우리는 트위터라는 온라인 공간에서 만났지만 가족보다 더 자주 만나며 더 친해졌다. 덕질이란 한정된 공통사를 넘어 펜션을 잡아 여름 휴가를 다녀오기도 하고 아무 일 없이 맛집 투어를 다니곤 했다. 그들과 함께 하는 순간이 너무 매력적이고 흥미로울수록 원래 자주 보던 동네 친구나 대학 동기 모임은 점점 시들해졌다. 특히 대학 친구들은 성인인 내가 아이돌 덕질을 하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조언이랍시고 건넨 충고에 속이 상해서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내가 아이돌 덕질을 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충고를 들어야 하는 일인가, 하는 의문 속에서 상처를 받았다. 스포츠 팬, 뮤지컬 팬, 배우 팬 등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걔들은 너 몰라. 네가 그런다고 걔들이 알아줄 것 같니?"라는 소리를 듣는가? 세상에 다양한 팬들 중 가장 하대 받는 팬이 아이돌을 좋아하는 덕후라는 생각이 들어서 억울했다. 그런 무시를 듣고 난 뒤엔 항상 덕질 친구들을 찾았다. 그들은 '아이돌'의 팬인 나를 '빠순이'로 무시하지 않는 유일한 동지들이었다.



#덕질의 유효기간 


정말 행복했다. 이러려고 서울로 대학을 왔지 내가. 이렇게 자유롭게 덕질하려고 휴학을 했지. 팬사인회를 위한 앨범을 사는데 한 달 내내 번 돈을 꼬라박아도 허탈하지 않았다. 돈을 내 새끼에게 쓰는게 좋으니까. 무더운 여름날 잠깐 얼굴을 보려고 방송국 앞에서 하루 종일 대기하다가 일사병이 걸려도 괜찮았다. 오히려 머리가 아파서 오래 보지 못한 게 억울했으면 그랬지. 돈이든 시간이든 덕질을 위해 쓰는 게 아깝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쓰는 게 행복하니까.


팬사인회에 당첨되었다. 20만 원어치의 앨범과 맞바꾼 표 한 장이었다. 신인이니까 이렇게 싸게 먹힌 거라며 위안하며 돈을 썼단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팬사인회에 가기 앞서 그에게 줄 선물을 샀다. 평소에 비싸다고 생각해서 절대 사지 않던 브랜드의 티셔츠와 모자였다. 그 순간은 전혀 비싸게 느껴지지 않더라. 이 모든 게 사랑의 힘이라면 그렇다고 믿었다. 그에게 줄 편지도 썼다. 평소 걱정이 많다는 그에게 머리맡에 두면 밤새 걱정을 가져간다는 걱정인형을 줄 생각에 설레었다. 이걸 받으면 뭐라고 할까? 모자를 써줄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지.


드디어 팬사인회 당일.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내 아이돌이 기다리는 팬사인회 현장으로 향했다. 너무 두근거려서 밤잠도 설쳐 눈 밑이 다크서클로 뒤덮였지만 가장 예쁘게 보이고 싶어 차림새에 신경을 썼다. 혹시나 나를 알아봐 줄까? 그동안 무대 아래서 눈이 많이 마주쳤는데. 내가 저의 이름을 부르면 돌아봐 주었는데. 아니야. 그런 기대를 하면 할수록 실망만 커지지. 별의별 생각과 가정으로 속이 시끄러웠다. 이윽고 나의 차례다. 눈을 마주쳐 오는 그의 앞으로 떨리는 발을 내디딘다. 한 걸음. 두 걸음. 떨리는 손으로 앨범을 내민다. "어, 제 이름은 -고요. 이건 선물이에요. 이건 걱정이 많다고 해서 걱정을 없애주는 인형이래요." 그리고 편지를 내민다. 들려오는 소리는 "아 감사합니다".


...끝인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마치 처음 본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에게 내가 기억나지 않느냐 물으려고 입을 떼는 순간, "지나가세요". 다음 차례로 떠밀려 넘어갔다.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그런 노래 가사가 생각이 난다. 물론 변덕이 심한 내 마음이 영원할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 그러나 그렇게 열렬하게 사랑하던 이 마음이 고대하던 그를 만난 순간 한없이 초라하고 비참해질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서야 깨닫는 거다. 덕질에는 유효기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그날 유효기간이 만료된 마음을 맞딱드렸다.



[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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