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린 왕자’가 들려주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 [도서]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 다시 읽기
글 입력 2019.04.05 00:5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141.jpg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

어린 왕자는 어쩜, 이름도 '어린 왕자'일까.

나는 생택쥐페리가 참 섬세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 책을 대학교를 다니며, 작년 2학기에 처음 읽었다. 교양 수업의 참고 교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수업의 핵심이 바로, 본 작품의 해석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현되는 ‘관계의 미(美)’를 확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로서는 원작을 이때 처음 읽었지만 그래도 줄거리가 어떻고, 결말은 어떠하다는 내용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독해하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을 줄 알았다. 실제로 그랬다, 처음에 나 혼자 책을 읽었을 때에는. 하지만 교수님의 해석을 듣고, ‘아 이거 뭔가 내가 너무 단편적으로 읽은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나는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비뚤어진 사람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한 발 빗겨나간 시점에서 어린 왕자를 만나보고자 결심했다. 오늘의 칼럼 주제는 이것이다. 그가 들려주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가 무엇인지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이는 것. 그리고, 지난 2학기에 열정적으로 레포트를 작성했었던 나 자신을 회고하는 것.

 

 

 

0. 조금은 비뚤어질 수도 있는 시각에서.


 

대중적인 통념에 따르면 어린 왕자는 소통의 단절과 관계의 부패로 물든 현대사회에서 순수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의 제목인 ‘어린 왕자’가, 제목 그 자체로 타락한 현대 사회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그저 작품의 소년이 스스로를 왕자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또 다른 해석을 말이다. 그리고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러한 소년을 작품에 그려낸 생택쥐페리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생택쥐페리가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 



ggilggil_com_0.jpg

정원의 수많은 장미들을 보며

'자신의 장미꽃'이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슬픔에 잠긴 어린 왕자.




1. 어린 왕자와 장미 ㅡ 단지 소년이 원했기에.


 

그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유일한 꽃, 장미를 가졌기 때문에 스스로가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인간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사막에서 자신은 하나뿐인 장미꽃과 ‘인간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본인이 가장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외모적으로 동일한 여러 장미꽃들을 발견하며 지금껏 자신이 단지 ‘흔한’ 장미꽃을 가져왔다며 좌절하고, 그토록 비난했던 어른들과 자신이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며 흐느낀다.

 

이후에 본 작품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여우와의 만남이 등장하는데, 이야기는 여우와의 만남을 통해 어린 왕자가 원래의 온전한 정신을 회복하고 다시금 고귀한 존재로 돌아가는 전개로 흘러간다. 다시 말해 『어린 왕자』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실현한 자기 자신을 왕자로 대우했던 소년이, 관계의 유일성을 물리적인 것에서 찾는 실수를 범했다가 ‘정신적인 측면’에서 진정한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깨닫고 다시 일어나 세상에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을 흩뿌리는 이야기이다.


이 과정에서 어린 왕자는 자신이 장미와의 관계를 물질의 관점으로 잘못 접근했듯이, 현대인들도 타인과 맺는 인간관계를 기능과 기능이 만나 하나의 생산라인을 이루는 것처럼 대한다고 밝힌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 후에 어린 왕자가 여우를 만나 정신을 회복하고 관계의 진정성을 깨우치는 장면을 보여주며, 삭막함으로 물든 현대인의 인간관계에 희망의 신호를 보낸다.



2163314F592E4C0035.jpg

어린 왕자와 여우.

드넓고 광활한 들판은

그들의 온기로 가득 찼다.



“하지만 네가 날 길들인다면 우린 서로를 필요로 하게 돼. 나에게는 네가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게 될 거고, 너에게는 내가 세상에 하나밖에 없게 될 거야……” / “아, 이제야 좀 알겠어.” 어린 왕자가 말했다. “나에겐 꽃 한 송이가 있는데…… 그 꽃이 날 길들였던 건가봐……”

 

“밀밭을 봐도 난 떠오르는 게 없어. 그건 슬픈 일이지! 하지만 넌 금빛 머리칼을 가졌어. 그러니 네가 날 길들인다면 정말 기막힐 거야! 밀밭도 금빛이니까 네 생각을 나게 할 거야. 그렇게 되면 난 밀밭을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좋아하게 될 거야……”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 중에서.


 

여우와의 만남이 소년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진정한 인간관계가 사람대 사람ㅡ 정신의 연결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자신과 타인의 관계 사이에 오고가는 금전이나 물질(=밀밭)이 형편없더라도 순수함이라는 쓸모없음의 영역에서 관계를 배양한다면 물질로 환원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가 깃듦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한 고귀함의 상징이 바로 작품의 소년, ‘어린 왕자’이다.


여우와의 관계를 형성한 이후에 그는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미덕을 깨달았으므로 자신의 장미꽃과 똑같은 외양을 한 꽃들을 보아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여우가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장미에게 책임을 다 하고자, 마음을 보내주기 위해 여우를 떠난다. 어린 왕자와 여우 일화는, 현대인이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실재하는 ‘관계’의 아름다움을 느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상대방과 맺은 관계에 끝까지 책임을 다 해야 함을, 자신의 사랑을 상대방에게 보여주어야 함을 강조한다.

 

 

 

2. 생택쥐페리의 걱정ㅡ이 책을 ‘건성’으로 읽는 것에 대하여.


 

본 작품에서 생택쥐페리는 사람들이 이 책을 ‘건성으로 읽을까봐’ 우려한다. 분명 이 책을 건성으로 읽을 것이라고, 확신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어린 왕자』가 어린이 동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사실 이 작품이 주된 독자로 설정한 연령대는 어른들이다. 생택쥐페리를 대변하는 인물인 조종사는 ‘아이들과는 달리 어른들은 보지 못한다’고 꾸준히 이야기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본 작품이 어른들ㅡ즉, 미친 현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였음을 알려준다. 즉, 이미지(image)를 리얼리티(reality) 자체로 해석하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단지 기능의 것으로 치부하는 현대인들을 비판하는 작품이 『어린 왕자』이다. 그러나 작품의 의도는 타락한 현대인과 ‘어린 왕자’를 대비시켜 그의 순수함을 부각하는 것이 아니다. 사막 같은 현대세계에서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관계의 아름다움을,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본 작품의 목표이다. 하지만 작품의 초반부에서 조종사가 말했듯이 현대인은 지나치게 이미지에 집착하기에 ‘건성으로’ 책을 읽곤 한다.

 

건성으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첫 번째로, 작품의 이미지를 리얼리티와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 속에서는 꾸준히 생택쥐페리가 그린 그림들이 등장한다. 어린 왕자의 그림부터 시작해서 그가 여행을 떠났던 여러 별들의 모습, 그리고 그 별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장미꽃의 형상까지 말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은 책을 읽고 난 후에 책에서 보았던 그림을 바탕으로 또다른 ‘이미지들’을 만들어낸다. 어린 왕자를 순수함으로 상징화하면서 그의 마음이 아니라 이미지가 담긴 창작물을 끝도 없이 생산하고, 심지어 이를 판매해서 수익을 얻기도 한다. 이는 어린 왕자가 그토록 회의를 느끼던 ‘기능’의 영역으로 작품을 끌고 간 것과 같다.


특히 작품의 에필로그를 읽으며 함정에 빠질 경우 이런 이미지화는 더욱 극심해진다. 사실 생택쥐페리가 쓴 에필로그는 독자로 하여금 이미지와 리얼리티를 혼동하지 말라는 경고와도 같은데, 책 내용의 전반을 단지 이미지의 관점에서 접근한 많은 독자들은 어린 왕자의 이미지가 사막에 존재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끊임없이 판타지를 양산한다.


 

1뉴스레터메인-생텍쥐페리.jpg
작가 생택쥐페리의 사진.
생전에 그는 파일럿이었다.



이미지와 리얼리티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서라는 것 외에도 이 책을 건성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는데, 이것은 현대인의 ‘자기중심성’에서 기인한다. 현대인은 타인을 상대할 때 자신이 상대방에게 사랑을 준다고 생각할 뿐 사랑을 동시에 받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기능으로 여길 뿐이라고 함부로 판단한 후에 ‘상처’를 받으며, 타인도 자신에게 똑같이 무언가를 주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이 본 작품을 감상할 때도 적용된다. 어린 왕자가 조종사를 포함해 장미꽃, 여우와 관계를 형성하는 모습을 보며 자기 자신을 어린 왕자의 상황에 극도로 ‘이입’시킨다. 그들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관계를 맺는 행위 자체에 주목하여, 타인에게 무언가를 주는 자신으로 어린 왕자를 동일시하게 된다.

 

이렇듯 관계의 내용이 아니라 관계가 형성되는 순간, 즉 자신의 입장에서 타인과 관계 맺는 상황 자체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어린 왕자에게 상처를 주는 여타 존재들을 악으로, 상처 받는 어린왕자는 선으로 이분화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어린 왕자를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존재로 격상시키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처만 얻는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자신처럼 어린 왕자도 관계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관계의 또 다른 주체인 타인을 가해자로 몰아갈 뿐이므로, 마찬가지로 작품을 건성으로 읽게 하는 주된 원인이 된다.

 

 

 

3. 에필로그 : 이미지(image)와 리얼리티(reality)의 경계


 

00rtiow88p74f1bwjw6x.jpg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어린 왕자>

사실 우리는 사막에 서 있는 어린 왕자를

기억하지 말아야 하는 걸지도.


  

그런 의미에서 본 작품의 에필로그는 독자를 향한 생택쥐페리의 시험(test)이다. 에필로그의 초반부에서 조종사는 ‘바로 앞 페이지의 풍경과 같은 것’이라며 사막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독자는 여기에서 이 문장이 함정임을 알아채야 한다. 『어린 왕자』 이야기는 이미지(image)와 리얼리티(reality)를 혼동하는 현대인들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구절을 읽고 ‘어린 왕자가 실제로 존재했구나.’ ‘사막에 가면 어린 왕자의 모습이 떠오르겠구나.’ 와 같이 어린 왕자의 이미지를 생각하게 되면, 독자는 작품을 잘못 감상한 격이 된다.

 

그러므로 사막을 여행할 때 확실히 이곳을 알아볼 수 있도록 이미지를 ‘주의 깊게’ 감상하라는 조종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오히려 이것이 역설적으로, 마지막까지 이미지와 리얼리티를 동일시하지 말라는 작가의 당부로 받아들여야 적절하다. 우리가 이 작품에서 얻어야 할 것은 ‘어린 왕자’의 마음일 뿐 그의 이미지가 아니다. 에필로그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조종사는 ‘한 아이’, ‘그가 웃는다면,’ ‘금빛 머리칼’과 같은 수식어를 동원해서 어린 왕자의 이미지를 서술한다.


하지만 에필로그에서 독자가 실질적으로 되새겨야 할 문장은 마지막 문장, ‘나에게 곧 편지를 보내주오.’이다. 이 문장이야말로 에필로그에서 생택쥐페리가 독자를 향해 내놓은 테스트의 결정판인데, 이미지에 사로잡힌 독자들이라면 이 문장과 바로 그 다음 문장인 ‘그가 돌아 왔노라고……’를 읽고 어린 왕자가 다시 사막에 나타났음을 전해달라는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이 전달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한 독자라면 조종사가 말하는 ‘편지’란 인간성이 이 세계에 도래했다는 소식이 담긴 글임을 눈치 챌 것이다.

 

이처럼 에필로그는 이야기의 의도를 올바르게 이해했는지 던지는 중요한 질문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현대에서 이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이 얼마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작가가 역설한 ‘관계의 아름다움’이 아닌, 『어린 왕자』라는 동화 이미지만 널리 퍼지게 된 게 아닐까.


 

 

4. 그렇지만 어린 왕자는 너무나도 따뜻하기에



2d6427c7-de31-44d0-8a4e-79ca5b722162.jpg

디자이너들은 굉장하다.

솔직히 저렇게 예쁜 (!!) 굿즈들을 보며,

어떻게 사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겠는가.


  

역시 한 발 비뚤어진 관점에서 칼럼을 작성하기 시작하면, 그대로 비뚤어진ㅡ칼럼이 나오는 것 같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일탈(?)도 해 보아야, 글을 쓸 때 스트레스를 덜 받아서. 그리고 순수함과 어린 시절의 상징으로서 소년의 이미지가 굳혀지는 건 다소 슬프다고 생각했기에, 고민 끝에 글을 기고했다ㅡ이전에 작성했던 레포트를 참고하면서.

 

하지만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필자 역시 어린 왕자라는 이미지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않다. 길을 지나가다 그의 모습이 담긴 핸드폰 케이스, 접시, 머그컵, 스티커 등등... 그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수많은 물건들을 보며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되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해석에 동의한다는 의미라기보다, 그러한 의미들은 다 제쳐두고, 그저 그를 그려놓은 이미지 자체가 ‘좋아서.’ 왠지 소년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져서 지금도 이따금씩 책의 표지를 가만히 들여다볼 때도 있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어쨌든 이 에디터도 어린 왕자를 좋아하긴 하네.’ 라는 생각을 해 주셨으면 좋겠다. 사춘기에 이른 철부지 딸내미(!!)를 보는 시선으로 본 글을 감상해주셨으면 한다. 웬만하면 이런 주석도 잘 덧붙이지 않는데, 유독 이 글을 쓰며 조심스러워져서. 나름대로의 변명을 붙여본다.

 

 

 

5. 번외 : 조종사의 박스 그림


 

조종사를 처음 만났을 때, 어린 왕자는 그에게 양 그림을 그려달라고 말한다. 굉장히 황당한 부탁이다. 그래서 조종사는 당황스러워 한다. 어린 왕자는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양을 그려달라고. 양 그림은 어린 왕자의 ‘시험’이다. 처음에 어린 왕자가 조종사에게 양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하는 이유는 조종사를 시험하기 위해서인데, 바로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이미지에 매몰되어 있는지 보려고 한 것이다.

 

처음에 조종사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일반적인’ 양의 이미지대로 양을 그려서 몇 번이고 어린 왕자에게 건넨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당연히 현대 사회가 자의적으로 설정한 이미지에 따른 그림을 거부한다. 그의 태도는 리얼리티(reality)와 이미지(image)를 혼동하는, 즉 이미지가 곧 리얼리티라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의 사고 체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양 그림은 어린 왕자의 시험인 동시에 리얼리티와 이미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현대 사회를 상징하기도 한다. 초반에 세 번 가까이 그렸던 조종사의 양 그림을 보다보면, 조종사가 처음에 양이라는 소리를 듣고 머릿속에 양이라 불리는 형태와 이미지를 떠올렸음을 추측할 수 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술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를 아무 생각 없이 정해 놓고, 의도적으로 형태를 일그러뜨리거나 부자연스러운 색감을 조합한 작품을 보며 “저게 무슨 예술 작품이야!” 라고 자주들 이야기하니 말이다.

 

 

i16405728155.jpg
 
그 문제의 '박스' 그림.
양을 그리고 그리다 지친 조종사는,
아예 박스를 그려주었다.
네가 원하는 양은 이 안에 있다며.
어린 왕자는, 이 그림을 받고나서야 비로소 기뻐했다.


몇 번이고 양의 그림을 거절당한 조종사는 이내 박스 그림을 그려서 어린 왕자에게 주며, 어린 왕자가 원하는 양은 이 안에 있다고 말한다. 즉, 어린 왕자가 원하는 양을 그려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마음으로라도 양 한 마리를 전달하겠다는 뜻이다. 이때 어린 왕자는 조종사가 자신의 시험에 통과하여 굉장히 기뻐한다. 여타 어른들과 달리 조종사가 양의 이미지 계열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스 그림이란, 어린 왕자의 마음에 완전히 드는 양을 ‘이미지대로’ 그려줄 수는 없지만 그의 양을 그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담긴 그림이자, 어린 왕자의 입장에서 조종사가 기능의 언어가 아닌 마음을 통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임을 알려주는 징표이다. 하지만 이 박스 그림은 조종사가 의도하고 그린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이미지에 들어맞는 양을 그리다가 사고의 한계에 직면한 후에 ‘어쩌다가’ 내놓은 그림이다. 즉, 여전히 물질문명의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이지만 어쩌다 어린 왕자의 마음에 들게 그림을 그려서 그에게 ‘진정한 인간관계를 가능케 할’ 존재로 인정받는다.


이는 머지않아 둘 사이에 기능적인 언어와 관련된 사건이나 물체를 두고 갈등이 생길 것임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미지를 벗어난 관계를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박스 그림'이 탄생한 게 아닐까ㅡ하고, 추측해본다.





[이소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91322
 
 
 
 

등록번호 : 경기, 아52475   |   E-Mail : artinsight@naver.com
발행인/기사배열책임자 : 박형주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형주
Copyright ⓒ 2013-2020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