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억을 버리는 연습 [기타]

‘훗날 노트북 정리를 하다 이 글을 발견’한 지금
글 입력 2018.11.28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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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 시대’라는 말조차 옛스러워진 요즘, 우리는 더 이상 의식조차 않은 채 자연스럽게 ‘정보’ 속에서 살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세상에 대한 정보를 얻고, SNS를 통해 타인에 대한 정보를 얻으며, 휴대폰을 통해 이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한다. 비록 많은 정보들이 부질없이 스쳐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무의식은 분명 그것을 ‘기억’하며 한때 유행했던 말처럼 ‘저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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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란 참으로 요상하다. 이처럼 의미 없이 지나친 정보를 오래 남기기도 하는 반면 정작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정보는 놓치게 만들기도 한다. 그뿐인가, 평소엔 떠오르지도 않던 기억이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오르기도 하고, 잊고 싶은 기억은 끝끝내 잊지 못하게 만들어 밤에 ‘이불킥’하게 만든다. 그래서 기억은 중간이 없다. 좋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가 된다.

 

우리는 이중 전자를 바란다. 좋은 기억만 남기기를 바라고, 기억을 하는 힘인 기억력이 좋기를 원한다. 시험이 다가올 때 다들 도라에몽의 암기빵이 존재하기를 바란 적 있지 않은가? 시중에 나와 있는 수많은 도서들이(특히 단어장 등이) ‘기억하기 쉬운~’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기억력을 높여준다는 훈련, 방법 등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학업에서든, 사회에서든, 심지어 일상에서도 기억을 잘하고,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이득을 본다.

 

 


기억력은 좋아야 할까?


  

나는 소위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학창시절 공부를 할 때도 교과서의 내용, 선생님의 말씀 등을 다른 친구들보다 더 잘 기억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고, 스쳐지나간 친구의 말을 기억해서 감동을 주기도 했으며, 인터넷 및 SNS에서 접한 사소한 정보들을 기억해서 혜택을 챙겼다. 기억력이 좋다는 것은 내게 무기였으며, 동시에 방패이기도 했다. 친구와 말다툼을 할 때도 그 애가 예전에 했던 말을 끄집어내곤 했으니(그 나이 땐 누구나 그러지 않았겠냐마는,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참 유치했다.).

 

그렇다. 다 옛날 얘기다. 요즘의 나는 스스로 기억력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주변 친구들은 내게 “기억 좀 해!”라는 말을 가끔 하곤 한다. 물론 시험이 다가올 때면 여전히 시험 범위를 외우기 위해 미친 듯이 기억력을 동원하지만 그 외 기억들은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면 잊어버린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 내 기억력을 믿지 않게 되었고, 중요한 일정 등은 꼭 메모를 한다. 어찌 보면 나의 가장 큰 무기 하나를 잃은 셈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점은 이러한 변화는 나 스스로 노력해서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이다.

 

변화의 계기를 말해보라면 안타깝게도 안 좋은 사건을 겪은 후였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기숙사 학교에 입학을 하는 등의 환경적 변화도 한 몫 했겠지만 어찌 됐든 내 인생에 있어 큰 변환점이 된 사건이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으로 살면서 별로 좋지 않았던 점이 있었다. 바로 사소한 것을 잘 기억하는 대신 그만큼 잘 잊지도 못한다는 것. 사소한 것도 그럴진대 그렇게 큰 사건이 잊힐 리가 없었다. 그날 밤 이불 속에서 펑펑 울었고, 인적 없는 밤거리는 내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다행히 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과 더불어 시간이 약이 되어 이제는 그 기억에 치를 떨지도 않고, 밤거리도 예전만큼 무섭지 않다. 사실 요즘은 잊고 산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대학 새내기 시절, 글쓰기 시간에 그 일을 털어놓는 글을 과제로 제출한 적이 있다. 최근 노트북 정리를 하다 우연히 그 글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때는 꽤나 용기를 필요로 한 글이었는데, 신기한 점은 그때와 지금의 기억의 농도가 또 달라졌다는 것이다.

 


밝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아파트 단지 입구로 들어섰다. 경비실 근처에 서 있는 낯선 검은 봉고차를 지나쳤다. 즐비하게 늘어선 주차된 차들 앞을 지나갔다. 가끔 고양이를 발견하곤 하는 쓰레기장 앞을 걸어갔다. 늦은 밤, 아파트 단지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겨울 밤의 주민들은 추운 날씨에 문을 꼭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고, 유일하게 불이 켜진 곳은 작은 슈퍼뿐이었다. 얼른 따뜻한 집에 들어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후 잠옷을 입고 소파에 눕고 싶었다. 패딩 앞섬을 더 꽉 여미며 걸음을 재촉했다. 순식간에 냄새나는 쓰레기장 앞을 지나쳐 집까지는 어느새 채 3분도 남지 않았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 스스로 놀랐다. 이때도 나름 3년이 지난 후였는데, 아직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지금은 애를 써도 희미한 기억인데.

 


하지만 슬프게도 난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했다. 그 일을 겪은 후 며칠간 해가 진 이후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고, 웬만하면 어두워지기 전까지 들어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당장 그 다음 월요일에는 학원을 마친 후 집 앞 신호등까지 마중을 나와 달라고 엄마에게 부탁했을 정도다. 그렇게 1년, 2년 시간이 지났고 다행히도 그때의 기억은 점점 잊히고 있다. 완벽하게 지우기는 힘들겠지만 예전만큼 심하지는 않은 것이 지금이다.


  

정말 심하지 않았던 건지 의문이다. 결국 남에게 보여지는 글이기에 나 자신을 조금 포장했던 건지도.



잊고 싶다고, 제발 잊게 해달라고 언제나 바랐지만 내 머리가 다치지 않는 한 절대 잊히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시간이 흘러 지금처럼 조금씩 옅어질 뿐. 그래서 큰일 없이 무탈하게 자라온 내게 하늘이 내린 시련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중략)⋯ 과제라는 이름 아래 이렇게 끼적여보니 괜찮아지는지 아직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을 노력의 한 걸음으로 생각해 보려고 한다. 다음에, 어쩌면 먼 훗날 노트북 정리를 하다 이 글을 발견하면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며 웃고 넘길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이다.



신기하다. ‘훗날 노트북 정리를 하다 이 글을 발견’한 지금, 난 지금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하며 웃고 넘기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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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열어본 폴더다)

 



잊어도 괜찮아!


 

기억을 버리는 연습의 시작을 혹독하게 치른 이후, 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짜증나는 기억은 시원하게 욕을 들이붓고 나서 지워버리며, 쪽팔린 기억은 딱 한 번 이불킥을 거하게 해준 이후 깔끔하게 돌아선다(물론 사람의 기억이란 게 삭제 기능처럼 되지는 않지만!). 사소한 일상 속 기억도 너무 많이 담아 두지는 않으려고 한다. 나의 뇌용량은 한계가 있고, 그것이 초과되면 결국 머리 아픈 사람은 내가 될 테니까.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들 한다. 격하게 동의하는 말이다. 모두는 기억력이 좋아지기를 바라지만 정작 그만큼 잘 잊어버리기를 바라지는 않는지 묻고 싶다. 물론 아니라고 말하면 할 말은 없다. 이는 결국 개인의 가치관과 가치판단에 따른 문제이니까.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기억해야 한다는 기억의 압박 속, 때로는 여유공간을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컴퓨터의 저장용량을 확보하기 위해 쓸모없는 파일을 지우는 것처럼, 기억의 용량 또한 마찬가지니까. 좋은 것만 기억해도 용량은 턱없이 모자라니 말이다.

 

당연히 사람의 기억은 손쉽게 ‘휴지통’으로 이동하지는 않는다. 그게 가능하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기억을 조금씩 ‘버리는’ 것,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물론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편리한 일상생활을 위해 필수적인 기억은 지녀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나를 아프게 하는 기억을 꼭 안고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잊고 싶다면, 버리면 된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절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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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혜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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