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불안치료란, 서로의 불완전함을 이해하는 것 [도서]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인간들이다.
글 입력 2018.10.23 23:33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인간들이다."

최근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 중 내 뇌리에 가장 깊게 박힌 한 구절이다. 진리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구멍을 목격했을 때, 나 스스로의 구멍을 인지할 때 저 한 구절을 떠올리면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존재하지 말아야 할 것처럼 생긴 모든 구멍들이 사실 ‘원래’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 불완전하기에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받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즉시 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오래도록 곪아 결국 ‘불안’이라는 부동의 굳은살을 심장에 새긴다. <불안에서의 자유>에서는 이 불완전한 세상에 상처를 받고 불안의 고통에 시달렸던 내담자들의 사례가 소개된다. 이를 통해 내가 느낀 점은 이것이다. 불안은 상처를 준 당사자 역시 어디선가 상처를 받았던 연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함으로써 치유된다.


불안에서의 자유 표지-인쇄본2 .jpg
 

책에서 소개된 불안 사례들은 많은 부분 가정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어린 시절 가정에서 받은 부정적인 기억이 후에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온갖 콘텐츠와 SNS가 열심히 아름다운 가정의 이미지를 양산하고 있기에 가정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은 종종 ‘정 없고 예의 없는’ 의견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하지만 난 가정은 가장 가깝기에 가장 많은 상처를 남기는 집단임에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내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모님, 형제에게 받았던 상처와 트라우마를 아직까지 안고 살아간다. 나 역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빠는 나한테 항상 이야기 하셨어요.
‘너는 못생기고 뚱뚱하고 키도 작아서 몸에 걸치는 건 좋은걸 해야 한다.’라고요.
(P.71)

내가 부모님께 칭찬받을 수 있는 건 내가 공부 잘하는 것 밖에 없었어요.
내가 1등을 해오면 그 때가 유일하게 엄마 아빠께 칭찬을 들을 수 있었어요.
그 일이 아니면 나를 칭찬해주고 좋게 말해주는 경우가 전혀 없었어요.
(P.149)


내담자들은 본인이 가정에서 받았던 아픔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이러한 ‘고백’이 불안을 치료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단계가 된다.

나는 프리뷰에서 요즘은 불안하지 않다고 밝혔다. 내 불안을 유발하는 요소인 시나리오를 요즘은 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헌데 이 책을 읽으며 내 내면에 살고 있는 불안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보니 또 다른 불안의 종류가 생각났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성별을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마음에 들지 못할 것이 불안하다. 그리고 이 불안은, 앞전의 시나리오 불안과 다르게 현재진행형이다. 단지 내가 프리뷰를 쓸 때 이 불안을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치료가 필요한 셈일 테니 내담자들처럼 솔직한 상황을 고백해야하나 생각해본다. 사실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을 정도로 망설여지긴 하지만 나의 고백에 공감을 할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 같아 대충이라도 말해보려고 한다.


크기변환_anxiety-1535743_1280.png
 

나는 유독 어떤 사람들 앞에서 작아지는 성향이 있다. 쉽게 말하면 자신감이 없다는 말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내세울 정도는 아니어도 주눅들 이유는 없는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웬일인지 유독 어떤 사람들 앞에서는 주눅이 든다. 이미 가진 능력치까지 보잘 것 없어 보여 숨길 정도이다. 나 역시 불안의 뿌리는 아마 가정에 있을 듯하다. 나는 첫째가 으레 그러하듯 집안 어르신들의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해서 어릴 때부터 시험을 못 보면 꽤 험한 말을 듣거나 집에서 쫓겨나는 등의 일을 겪었더랬다.

한 번은 모 유명 어학원의 동네 분원으로 레벨테스트를 받으러 갔다. 생각보다 낮은 레벨이 나왔다. 부모님은 동네에 내 낮은 레벨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셨고, 하여 나는 집 앞 분원을 놔두고 멀리 떨어져있는 분원까지 셔틀을 타고 다녀야 했다. ‘나는 부모님이 숨겨야 하는 딸이구나.’ 대충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정도부터는 부모님께서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알아서 공부하는 착한 아이가 되었고, 돌이켜봐도 후회 없을 정도로 고등학생 때 꽤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창피해하지 않는 자식, 부모님이 마음껏 자랑할 수 있는 자식이 되고 싶은 욕구가 기저에 깔려있었던 것 같다.





아빠는 모르는 거였어요. 칭찬하는 방법을 몰라요. 자기가 칭찬을 받아봤어야 알지.
아빠는 나를 많이 사랑하셨지만 항상 표현을 그런 식으로 하신 거였어요.
(P.157)


불안을 치료하는 궁극의 단계는 ‘이해하는 것’이다. 불안에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들 역시 결국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세상을 살아가는 불완전한 인간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쁘게도 난 이 단계를 이미 예전에 통과한 듯하다. 과거 일련의 어떠한 사건들로 인해 부모님 역시 누군가에 의해 상처받았던, 나처럼 단점도 있고 두려움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대충 이해를 하게 되면, 비록 용서는 못할지라도 용인은 하게 되는 것 같다. 부모님이 주셨던 상처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결국 부모님과 나의 관계도 인간 대 인간의 관계이기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불안이 치료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그건 아직 아닌 것 같다. 주눅 들지 않기 위해선 나의 추가적인 노력이 꽤 오랜 시간동안 필요할 것 같다. 그래도 확실한 건, 멋모르고 불안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던 때보다 지금이 훨씬 희망차다. 불안에 맥없이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불안을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게 된 셈이니 말이다.

정리하자면 <불안에서의 자유>가 나에게 남겨준 생각은 다음과 같다.


1. 우리 모두는 불완전하다.
2. 그래서 결국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3. 그 상처에서 기인한 불안은, 힘들지언정 분명 치유될 수 있다.




에디터 박민재.jpg
 

[박민재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