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애매한 반항아 [기타]

철없어 보이지만 그냥 저를 믿고 지켜봐 주세요
글 입력 2018.09.2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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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고향을 사랑한다. 딱히 볼 것도 별 것도 없고 심심한 동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말을 달리 보면 잔잔하며 과잉된 자극 또한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고향은 자극적이지 않다. 평화롭고 고요하다. 그런 깊은 편안함을 사랑한다.


한없이 복잡했던 마음도 고향에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고향에 왔다는 사실만으로 한결 편안해진다. 그러나 이는 보통 때에 시간을 내어 고향에 내려갈 때의 이야기다. 명절에 고향에 내려가는 것은 또 이야기가 다르다. 편안한 마음 반, 불편한 마음 반이다.


친가는 우리 가족끼리 소박하게 아침 예배를 보는 것으로 제사를 대신하고 있다. 한편 밤이 되면 많은 가족들이 외가에 모여 신나게 먹고 마시고 놀고 대화한다. 마치 명절 뒤풀이처럼.  그 악명 높은 명절 제사상을 차릴 일도 없고, 며칠 내내 모여앉은 자리에서 돌아가며 싫은 소리를 들을 일도 없다. 그런데도 왜 나는 이토록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가.


문제는 외가에서 명절 뒤풀이의 대화에서 벌어진다. 고작 3-4시간 이어지는 외가 모임인데, 신나게 먹고 마시고 놀고 대화하는데, 왜 나는 스트레스를 받는 걸까. 나도 참 의아했는데 이유를 생각해보니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말의 폭격을 받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제 나는 곧 대학 졸업을 앞뒀고 따라서 먼저 사회생활을 해본 친척 어른들의 ‘사회 후배’가 될 터였다. 외가 어른들은 내가 대학 졸업을 앞뒀다 싶을 즈음부터 나의 외모, 교우관계, 연애 사업부터 미래 진로와 취업 준비에 대해 부쩍 더 많이 묻고 더 노골적으로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내가 행여 어리고 짧은 생각으로 잘못된 길을 가 고생할까 싶어 이것저것 당신들께서 아는 지식이나 소문이나 소식들을 끊임없이 전달해주셨으며 뿐만 아니라 직접 도와주려고 발 벗고 나서는 분도 계셨다. 내가 현재 처한 상황을 살펴보지 않는 무지막지한 추진력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젓고 말리기까지 해야 했다.


“진짜 감사드려요. 하지만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 당장은 그러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다음에 꼭 부탁드릴게요.”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오잉? 떨떠름한 얼굴을 바라보시기에 나도 덩달아 떨떠름해졌다. ‘도와준다고 하는데도. 얘가 아주 배가 불렀어. 요즘 인턴이 금턴이라던데!’ 라는 농담조로 핀잔을 듣게 되었다. 뼈 있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이모들마저도 다를 바 없었다. “연애를 안 하긴 뭘 안 해. 네가 아직 제 짝을 못 만나서 그런 소리나 하고 있는 거다. 결혼은 언제 할 생각이냐, 여자애 치고는 발 크기가 어쩌고, 살이 올랐네 내렸네, 여자애가 왜 그렇게 짧은 머리를 하고 다니냐, 예전처럼 화장도 예쁘게 좀 하고 다녀라, 내 주변을 보니까 결혼 안 한다고 말하던 애들이 제일 빨리 결혼하더라…….”



걱정은유료로.jpg



즐거운 명절, 오랜만에 다같이 모인 자리에서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깨고 싶진 않았다.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서 나는 나의 정신적인 스트레스라는 비용을 감수하고 가만히 듣고만 있기도 해봤다. 하지만 걱정, 호의, 사랑을 명목으로 경계선을 함부로 넘으려는 시도들이 잦아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는 사람의 경계가 다른 사람에 의해 흐트러질 것만 같았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는 적당히 거절하고 또 거절했다. 독선적인 호의가 넘치는 상황은 나를 난처하게 만들고 이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낯으로, 호의에 빗겨 선 채로, 딱딱하게 자르는 목소리로, 그렇게 애매한 반항을 해왔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제가 알아서 해볼게요.”


친척들이 걱정이 된다는 명목으로 나에게 슬쩍 던져보는 한두 마디의 말들. 술김에 그래서 기억에서 쉽게 휘발될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 진지함으로 슥 던져보는 말들. 그걸 견뎌내는 한 사람에게는 열 마디가 되고 스무 마디가 된다. 여러 사람이 던지는 걱정의 무게가 지나치게 무겁다. 부담스럽다.


어서 호의를 받거라~ 아니오 괜찮습니다~ 마치 박을 타는 것처럼 옥신각신하는 명절 매치…….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얼굴로라도 정중히 거절하는 것은 ‘나를 걱정하시는 거라면 나를 믿고 그저 내버려 두고 지켜봐 달라’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서로의 적정 거리를 지켜달라’는 간곡한 메시지다.


나의 애매한 반항은 명절마다, 앞으로 향후 몇 년 동안은 이어지리라는 예상이다. 우리 존재, 모두 모두 화이팅.



[심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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