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공연이 가진 스토리텔링의 힘 [공연예술]

우란문화재단의 목소리 프로젝트 1탄, 음악극 '태일'
글 입력 2018.07.17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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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story)와 텔링(telling)을 합성한 말인 스토리텔링은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행위를 말한다.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는 것과 이야기로 풀어서 보여주는 것. 가지고 있는 알맹이는 같아도 사람들의 마음에 전달되는 파장의 크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나 드라마가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을 받거나 실존 인물의 실제 삶을 더욱 주목받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은 이러한 차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교과서 속 몇 줄의 문장으로 적혀있던 인물의 삶은 그의 삶의 기록들을 잘 엮어 당시를 추측하며 써 내려간 작가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소설이나 시나리오, 극본의 형태로 재구성된다. 그리고 일부 장르에서 인물의 생애는 텍스트에서 그치지 않고 배우의 목소리, 표정, 몸짓의 힘을 빌려 살아 움직이기도 한다. 보는 사람들은 이를 통해 당시 그 인물이 느꼈을 감정이나 겪었을 사건에 더 쉽게 몰입하고 공감한다. 관객과 무척 가까운 거리에서 배우가 라이브로 말하고 움직이는 공연예술에서 이러한 효과는 더욱 극대화되곤 한다.



목소리 프로젝트

'목소리 프로젝트'는 역사 속 실존 인물의 삶을 그가 남긴 어문 자료(말과 글을 남긴 기록)를 바탕으로 공연으로 되살리는 작업으로, 우란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전태일 열사의 생을 다룬 음악극 '태일'의 본공연을 첫 번째로 올린 바 있다. 목소리 프로젝트는 실존 인물을 다뤘던 기존의 다른 작품들처럼 사건을 나열하여 인물의 연대기를 극화하기보다는 인물의 목소리와 사상을 재현하고 삶을 복원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음악극 '태일' 역시 전태일 평전을 바탕으로 가사 대부분을 전태일이 직접 쓴 수기나 그가 했던 말에 대한 증언을 통해 만들었다고 한다.

전태일. 그에 대해서는 교과서 속의 몇 가지 문장을 통해 아는 것이 다였다. 1970년,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젊은 나이에 분신 자살해 한국 노동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 된 청년. 노동운동을 위해 자신의 몸에 스스로 불을 지르다니.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젊은 나이에 대단하다. 정도의 생각과 한국인이라면 어느 정도 상식으로 알고 있는, 적어도 한 번쯤 들어본 적은 있을 인물이라는 생각이 다였던 것 같다. 기존에 전태일이라는 인물에 대해 가지고 있던 느낌은 그가 나와는 다른 대단한 역사적 위인이라는 일종의 경외심이나 존경심이 주였다. 사실 크게 관심이 없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청년 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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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에 대한 여러 가지 수식어가 존재한다. 전태일 '열사', '노동운동가' 전태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등.... 그의 노동운동에 대한 헌신과 아름다운 희생, 경이로운 결단 등은 앞서 말한 여러 수식어와 함께 익히 알려져 왔다. 음악극 '태일'은 전태일의 업적을 강조하기보다는 가난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평범한 청년 태일의 일화들을 보여준다.


내일이 되면 행복해질거야
내일이 되면 우린 부자될거야
내일이 되면 내일이 되면


어서 돈을 벌어 동생들과 어머니를 부양하겠노라 다짐하던 태일,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다니며 영어와 수학을 싫어하던 태일, 좋아하던 여학생이 있던 태일, 자신은 배를 곪고 차비가 없어 걸어 다니면서도 어린 소녀들을 위해 풀빵을 사다주던 태일, 왜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지 사회의 불합리에 의문을 품던 태일...

태일이 먹고 자고 일하던 1960년대의 평화시장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공연장 안에서 관객들은 평범한 청년 태일의 모습을 마주한다. 주변에 있을 법한 평범한 어린 청년 태일의 모습은 그가 분신이라는 선택을 하기까지 겪은 고통과 좌절의 크기가 얼마나 크게 다가왔을지, 그러한 결심이 얼마나 주저되고 힘든 것이었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바로 잡아야 된다"는 말을 내뱉기까지, 그리고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웠을지 깊숙이 느끼게 한다.



태일의 목소리를 전달하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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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극 '태일'은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여러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집어넣는다. 대부분의 극에서는 주요 인물들은 그 역할을 맡은 배우가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한다. 등장인물에 비해 배우가 적은 경우 소위 '멀티맨'이라 부르는 배우가 여러 역할을 소화하기는 하지만, 이 경우에도 주인공 역할의 배우는 시작부터 끝까지 한 역할을 맡기 마련이다. 하지만 '태일'에서는 단 두 명의 배우만 등장하기 때문에 주인공 태일 역의 배우 또한 몇 가지 역할을 겸하며, 태일 외의 인물을 맡은 여자 배우는 쉴 새 없이 역할을 바꿔가며 연기한다. 또한 극의 사이사이에 배우들이 배우 자기 자신으로 분해 관객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던 태일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자기 삶의 동력에 대해 자유롭게 논하기도 한다. 관객들에게 태일의 상황이나 시대적 배경에 대해 나레이션의 형식으로 설명하는 대사도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형식은 관객에게 '전태일'이라는 인물이 실존하는 인물이며, 눈앞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은 그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수시로 상기시킨다. 배우들은 1960년대 당시 태일이 써 내려갔던 심정과 그가 했던 말들을 2010년대의 관객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는 나레이터의 역할을 한다. (개인적으로는 초반 부분 부자가 되겠노라 동생과 약속하며 환하게 웃는 태일의 모습부터 눈물을 멈출 수 없었기에 중간중간 배우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감정을 진정시키도록 도와주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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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노동운동을 하다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인 사람이 있었다고 전해 듣는다면 무어라 반응했을까. 그의 삶을 기록한 문장들을 눈으로 읽는다면 당시 그의 심정을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었을까. 자신을 태워 빛을 밝히는 촛불처럼 살다 간 그의 삶을 보여주듯, 한겹 한겹 다짐을 쌓아가듯 극이 진행될수록 공연장 곳곳을 밝히던 크고 작은 초들을 눈앞에서 보는 것보다는 강렬하지 못한 체험이리라. 잊혀가던, 잊어가던 청년 태일의 삶을 되새겨 볼 기회를 부여받음에 감사함을 전하며 또 다른 이의 목소리를 전달받을 그날을 기다려본다.

*

※ 더 많은 분들에게 태일의 목소리가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017년 천공의 성에서 공연했을 당시 '태일' 측에서 대본을 공유했던 블로그의 링크를 남깁니다.


[박찬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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