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고전발레 속 여성의 위치 < 백조의 호수 >

글 입력 2017.11.21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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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키 발레단4.jpg
 

가장 먼저 공연의 서막을 연 것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었다.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연주가 흐르자 뒤를 이어 무대를 가리던 장막이 걷혔다. 환한 무대 위엔 로코코 시대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복식 차림의 무용수들이 가득했다. 그 광경을 명당 좌석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마치 궁정 무도회에 초대된 거만하고 권위 있는 귀족이 된 기분이었다. 이 아름다운 무용수들은 1막과 3막에서 디베르티스망에 해당되는 춤을 선보였는데 이는 고전발레가 지닌 엄격한 형식주의 즉 대칭, 질서, 조화를 담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발끝을 세워 종종걸음으로 백조의 모습을 표현하는 파 드 부레, 한 쪽 다리를 90도 이상 뒤로 들어 올리는 아라베스크, 공중에서의 점프, 발레리나의 32회전 푸에떼 등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기교의 향연이 펼쳐졌다. 나는 그저 정신없이 그들의 동작과 음악에 몰입하기 여념 없었다. 이와 같은 백조들의 질서 정연한 움직임, 재빠르게 움직이는 하체와 달리 느릿하고 기품 있는 상체의 표현력, 오데트와 왕자의 파드되는 고전발레의 우아함과 완벽함을 여실히 드러냈으나 무용수들에게는 상당히 고난도의 안무 수행을 요구하고 있음을 짐작게 했다.

이제 작품의 스토리라인과 그 외적인 부분을 이야기해보자. 백조의 호수는 사랑을 주제로 삼은 작품으로서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러하다. 악마의 마법에 걸려 백조가 된 오데트와 그런 오데트를 사랑으로 구명해주는 왕자의 러브스토리로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구조를 담고 있다. 작품을 아무런 고찰 없이 그대로 해석하면 해피엔딩이나 약간의 비판의식을 더한다면 우리는 이 과정에서 성별에 따라 부여된 고정관념이 강력하게 작동함을 알 수 있다. 무도회에서 왕자의 간택을 기다리던 여섯 명의 신부 후보들, 타인(남성)의 구원 없인 자신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해결할 수 없던 오데트, 백조들과 같은 여성 캐릭터에는 수동성, 연약함이 부여된 반면, 왕자와 악마 로트바르트에겐 힘(마법)과 권력으로 여성을 선택할 수 있고, 여성들의 삶을 원하는 대로 설정할 수 있는 주체성, 능동성이 존재한다. 왕자를 유혹하는 역할의 오딜 또한 아버지인 악마의 지배하에 명령을 수행하는 수동적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는 작품이 완성된 당시의 사회가 성별에 따라 명확한 위계구조로 이루어진 사회임을 은밀하게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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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여성 무용수들이 착용하는 포인트 슈즈 역시 발레에서 성 역할이 엄격하게 구분되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2막과 4막에서 백조들과 오데트가 보여줬던 군무들을 예로 들어보자. 순백색의 튀튀를 입고 인간의 육체가 지닌 한계를 넘어서는 동작을 표현하던 여성 무용수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선 무언가로 보였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오히려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연출처럼 느껴졌다. 왜 내게는 아름답지만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다가왔을까. 그것은 쿵쿵대며 바닥과 마찰하는 토슈즈의 소음이 나를 지독하고 가혹한 현실의 세계로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남성 무용수들과 달리 왜 여성 무용수들은 신체를 변형시키는 토슈즈를 착용한 채 묘기에 가까운 기교를 선보여야 하는가? 포인트 슈즈는 여성 무용수들에게 뿌엥뜨 동작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더욱 아름답고, 가볍고, 연약한 초현실적 존재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이사도라 덩컨의 말처럼 이것은 여성의 육체를 속박하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첫 발레 공연을 관람한 뒤 비로소 현대무용을 이해하게 되었다. 왜 이사도라 덩컨이 튀튀와 토슈즈를 벗어던지고 맨발로 무대에 섰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원했던 자유와 자연에 대한 동경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감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공연에서 보여준 무용수들의 실력과 발레에 대한 헌신에는 깊은 존경을 표하고 싶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나에게 고전발레는 남성의 시각으로 전유된 예술임을 확인한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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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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