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유산진흥원] 민족시인 윤동주와 독립운동가

글 입력 2017.11.15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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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장 사랑한 시인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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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서시) 맑고 투명한 심안(心眼)으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현실을 고민했던 슬픈 천명(天命)의 시인 윤동주.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시를 쓰면서도 자기 성찰을 늦추지 않았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끝까지 우리 언어로 시를 써 그리움을 원고지에 담아냈습니다. 고통 받는 조국의 현실 속에서 별이 바람에 스치듯 짤게 스물일곱 해를 살다간 윤동주, 올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불행한 시대에 고뇌하고, 저항하면서 그가 남긴 시들을 우리는 너무 쉽게 교과서에서만 접한 건 아닌지요? 입시나 교과서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서 시대와 국경을 넘어 힐링이 담겨있는 그의 시를 통하여 인간의 따스한 마음과 깊은 정신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그는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했지만 항상 독립에 대한 염원을 품고 있었던 그의 마음만은 시를 통해 지금의 우리에게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윤동주의 삶과 문학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출생, 의대진학을 바라던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문과에 입학합니다.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시절 종로구 누상동 9번지에 위치한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하였으며 이 시기에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의 작품을 썼습니다. 그가 매일 올랐던 인왕산은 그의 시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윤동주는 1941년 11월, 연희전문학교의 졸업을 앞두고 자신이 써놓은 시 가운데 18편과 '서시'를 붙여《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엮었습니다.

일본의 민족문화말살정책을 겪으며 윤동주는 우리 민족의 미래는 문학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문학을 심도 깊게 공부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만 했던 창시계명을 받아들여 이름을 '히라노마 도쥬'로 개명합니다. 이때의 괴로움과 자괴감은 <참회록>이란 시에 잘 담겨 있습니다.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앞두고 윤동주는 사상범으로 검거 되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 수용됩니다. 윤동주는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28살의 꽃다운 나이에 생체실험의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했습니다.

윤동주는 자아성찰을 통한 내면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역사의식을 표현했습니다. 시대의 무게에 비해 소극적 태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문단사의 별로서 존재하는 이유는 현실의 어둠속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았고, 절망의 극한 속에서도 희망을 지속적으로 노래했던 그의 신념의 빛 때문입니다.



윤동주 문학관의 탄생

위치: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119,
2012년 7월 25일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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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시인의 언덕에서는 윤동주가 그토록 사랑했던 대한민국의 중심부가 보입니다. 땅 속 깊이 숨겨져 있던 물탱크는 별빛을 담은 윤동주 문학관으로 다시 태어났고 보잘 것 없던 건물 역시 아름다운 반전을 간직하고 재탄생하였습니다. 쌍둥이처럼 두 개가 나란히 있는 물탱크 하나는 천장을 열어 우물 안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하늘과 바람과 별, 그리고 사계의 변화를 볼 수 있게 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그가 생을 마감한 후꾸오카 감옥을 형상화하여 원형그대로 두었습니다. 사방이 꽉 막혀있는, 깊고 깜깜한 닫힌 우물의 한줄기 빛은 윤동주 시인이 간절히 원했던 광복입니다.



최초의 한옥 청운 도서관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어우러지는 풍경 속에 자리한 청운문학도서관은 우리 전통 건축양식인 '한옥'을 선택했습니다. 주변 환경만이라도 누구나 시인이 되고 작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도서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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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의 고즈녁한 자연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는, 한옥이 주는 평안함과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문학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도서관 지하 1층은 서양식으로, 지상 1층은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하 1층에는 일반열람실과 어린이 열람실, 카페, 전시실이 자리하고, 지상 1층에는 세미나실과 2개의 창작실, 정자가 위치해 있습니다.

도서관 1층 한옥의 지붕은 전통방식으로 제작된 수제기와를 사용했으며 담장 위에 얹은 기와는 돈의문 재개발 지역에서 철거되는 한옥의 기와 3000여장을 가져와 재사용하는 등 곳곳에 전통건축의 명맥을 잇고, 도시재생 성공사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문학특화도서관'에서 윤동주시인처럼 훌륭한 문학인의 꿈꿀 수 있습니다.



김가진 집터

김가진은 안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서자였기에 오랫동안 하위 관직을 맴돌다 갑오개혁으로 적서차별이 철폐되자 도쿄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개화파 관료로 활동하게 됩니다. 1884년에 문과에 급제, 1894년 갑오개혁에도 참여했으며 정부 고관 자격으로 독립협회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서자출신으로는 이례적인 고위직에 있다가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총독부로부터 남작작위가 주어졌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10월 70세가 넘은 노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김의한과 함께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상해로 떠나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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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가진 가족 사진, 우측 상단 김가진


상해 교민사회와 임시정부에 있어서 김가진은 구한말 고위 관료를 지내고 대한제국 대신을 지낸 인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인물이었으며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되어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김가진은 국내에서부터 대동단 총재로서 활동하였으며, 대동단은 의친왕을 망명시키려다 실패하고 국내조직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대동단 또한 상해로 본부를 옮겨 활동하게 됩니다. (대동단 사건)

당시 일제는 임시정부를 두고 "사회 하층민들이 만든 대수롭지 않은 모임"이라고 선전했으나, 김가진의 망명과 의친왕 망명 미수는 당대를 떠들썩하게 만든 대사건이었습니다. 저마다 애국했다고 주장하는 그 수많은 고관대작들 가운데 외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친 이는 김가진 밖에 없었습니다. 김가진은 임시정부의 고문과 백야 김좌진 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 고문을 맡다가 1922년 이국땅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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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가진 집터에 새겨진 김가진 글씨


그 후 독립운동은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가 임시정부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김가진은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였으나 남작 작위를 일제에 '공식적으로 반납하지 않았다는 석연찮은 이유'와 연로한 나이에 상하이로 망명하여 별다른 공적 없이 3년 뒤 사망하였기 때문에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보류했고, 아들인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게 됩니다.



우당 이회영 기념관

종로구에 위치한 우당기념관은 신민회 창립을 주도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선 이회영선생의 생애 기록과 유물이 전시된 곳입니다. 이회영선생(1867~1932)의 호가 '友堂' 즉 "벗들의 모임 터"이듯이 그분의 정신 또한 언제나 동지들과 더불어 생각을 가다듬고 투쟁의 삶을 같이 하셨습니다. 우당선생과 더불어 뜻있게 살며, 싸우다 가신 여러 어른들의 발자취도 함께 기리기 위하여 우당기념관을 설립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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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 이회영 그는 누구인가?

우당의 집안은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자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아들 이유원이 영의정을 지낼 정도의 대대로 벼슬을 한 가문입니다. 이항복 때부터 시작해 8대에 걸쳐 판서(조선시대 6조의 장관)를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였습니다. 정승 10명을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을 일컬음)에 만석지기 아들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이회영의 형제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살자는 넷째인 이회영의 말에 모두 동의했습니다.

나라의 운명을 바로 잡으려고 수만금의 전 재산을 써가며 만주로 독립하러 간 이회형 형제, 이회영 6형제 중 5명은 광복을 못보고 만주에서 비극적으로 사망했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가이자 당대 최고의 재산가가 전 재산(현 시세 600억원)을 처분하고 여섯 형제와 50명의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향한 이유는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급하게 처분하느라 제값을 받지 못한 것까지 계산하면 대략 2조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우당은 이 막대한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에 썼습니다. 서전서숙, 신민회,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 의열단 등 국외 항일운동의 전반에 관여 했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까지 30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이들은 곧 만주와 연해주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됐습니다.

1932년 11월 초,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만주로 향하던 우당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64세 나이로 감당하기 어려운 잔혹한 고문을 받고, 결국 같은 달 감옥에서 순국합니다. 일본경찰은 고문행위를 숨기려고 '노인이 유치장에서 목을 맨' 자살로 낭설을 퍼뜨렸지만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뒤늦게 밝혀집니다. 우리 역사상 다시 이런 분이 나올 수 있을까요?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독립을 위해 올인, 귀중한 생명과 전 재산, 모든 것을 다 바친 그의 열정과 비극은 독립을 더욱 숭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 입니다.





한국문화유산진흥원 엮음





[한국문화유산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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