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베르테르와 게츠비, 사랑의 두 이름 [문학]

글 입력 2016.12.29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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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한다. 사랑의 대상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에리히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빌려 말하자면 사랑의 유형에는 여러 가지의 유형이 있는데, 먼저 모든 인간을 사랑하며 어떠한 배타성도 없는 형제애, 어린아이의 생명과 욕구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을 가지는 모성애, 나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다른 존재 역시 사랑할 수 있는 자기애, 분리상태를 극복하고 합일 상태를 지향하는 신에 대한 사랑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겪지 않을 수 없는 유형도 있다. 바로 성애이다.

 성애는 다른 사람과 갈망하고자 하는 갈망, 즉 완전한 융합을 지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해보면 손에 꼽히던 문학이나 시들 역시 ‘성애’ 결국 ‘사랑’에 대해 말해왔다. 대표적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러했고, 플라톤의 『향연』 역시 넓게는 에로스(사랑)에 대해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본 칼럼의 핵심적인 두 인물의 이야기 역시 그렇다. 바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베르테르와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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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베르테르의 슬픔. 오른쪽 미국판 게츠비 표지. 출처 네이버_)
 

 로테를 사랑한 베르테르는 끝내 자살을 택해야 했다. 데이지를 사랑한 개츠비는 그녀를 위해 죽음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인물이자 전혀 다른 배경을 살아가면서도 비슷한 결말을 맞이해야 했다. 궁극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 베르테르와 개츠비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 받는 것이 없어도 만족할 수 있는 사랑이었을까?

 내게 있어 사랑이라는 존재는 파괴에 가까운 것이었다. 모든 것을 끝내 파괴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사랑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두 책을 읽으면서 사랑이 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파괴라는 이름을 가지고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사랑이라는 정의를 갖는다.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 받지 못해도 그 자체로 사랑을 한다. 사랑은 보편적이지만 개개인에게 가장 특별한 것으로 여겨진다. 모두가 사랑을 하지만 모두의 사랑이 다르기 때문이다.  

 베르테르와 개츠비는 어쩌면 사랑 받던 로테나 데이지보다 더 큰 사랑을 가졌을 지도 모른다. 단순히 사랑의 무게를 넘어(사실 사랑의 무게를 어떻게 가늠할지 정할 수는 없겠지만)그들이 한 사랑이 얼마나 진지했고, 또 상대를 사랑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두 사람은 사랑 받던 두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로테나 데이지에게 받는 사랑이 아니라 두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자신 스스로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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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시케와 에로스. 출처 네이버 이미지_)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두 사람의 희생을 모두 이해하기란 힘들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을 정도라니, 어쩌면 우리는 평생을 살아도 두 사람 같은 사랑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문득 프시케와 에로스의 신화가 떠오른다. 프시케는 자신의 남편이 아름다운 그리스의 신 에로스인 줄 모르고 결혼을 하는데, 프시케가 에로스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오로지 밤. 그 밤 조차도 아무 것도 볼 수 없으니 프시케는 자신의 남편을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타고난 아름다움이나 다정한 목소리에 이끌려 프시케는 사랑에 빠진다. 얼굴을 보여달라고 애원해도 에로스는 끝내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계속해서 얼굴을 보여달라고 하는 프시케에게 에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내 얼굴을 본다면
아마 나를 두려워하거나 숭배할 거요.
그러나 내가 진정 그대에게 바라는 것은 사랑. 
신으로 숭배 받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보다
같은 인간으로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흰 천으로 눈을 가린 상태로, 상대의 어떠한 정보조차 알지 못한다면 나는 상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에 빠져서 오로지 상대를 위해 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을까? 사랑은 어쩌면 가장 흥미로운 동시에 답을 내릴 수 없는 철학일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철학은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답이라 믿었던 것이 사실은 정답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 사랑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른다. 그저 막연하게 사랑을 떠올릴 뿐이다. 어쩌면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 사랑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랑은 아름답다"고 추상적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철학이나 수학의 난제와 같은 선상의 오르는 물음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사랑이란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것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문득 플라톤의 『향연』에 나왔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구절을 적으며 오늘 밤은, 누군가를 사랑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자는
자기 안에 신을 품고 있는 것과 같아서, 
사실 사랑 받는 자보다 신과 더 가깝다.
-플라톤, 향연 中


[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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