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판소리가 들려주는 남미 문학, '이방인의 노래' [공연예술]

제15회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추천공연②
글 입력 2015.07.17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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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추천공연②


판소리가 들려주는 남미문학
‘이방인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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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흑백다방에 이어, 이번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추천작품은 바로 창작 판소리극인 ‘이방인의 노래(작/이자람, 연출/박지혜)‘이다. 지난 5월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판소리 단편선2-이방인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올라왔던 이 작품은 극중 소리꾼으로서 일인다역의 연기를 펼치는 이자람이 작/작창/음악감독을 맡았다. ‘이자람의 판소리 단편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그녀가 4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었다. 이전에 이미 브레히트의 서사극 <사천의 선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 그녀의 손을 거쳐 각각 <사천가>와 <억척가>의 이름으로 재탄생되었다면, 이번 공연에서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단편소설, <대통령 각하, 즐거운 여행을!(Bon Voyage, Mr. president!)>이 <이방인의 노래>로써 그 뒤를 잇게 되었다.
 
 

“……<사천가>와 <억척가>이후 많은 창작 판소리가 만들어졌는데 대부분이 판소리의 극성과 그로테스크함이 부각되는 작품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그런 판소리에 지쳤고, 판소리가 편할 수는 없을까, 울고 짜거나 신명나지 않아도 되는,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장르가 될 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게 됐다.”

 (이자람, Scene Play Bill 7월호 인터뷰에서 발췌)
 


   사실 판소리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공연 장르가 아니다. 그동안 연극과 뮤지컬에 익숙해져 있어서일까, 판소리 특유의 신명남은 둘째 치고, 보는 것 자체가 버겁고 어려운 일이라는 느낌에 쉽게 선택하지 못한다. ‘판소리‘하면 세련된 느낌보다는, 고전적인 소재와 구성진 가락이 주는 예스러운 느낌이 먼저 떠오른다. 중간 중간 흥을 돋우는 추임새들 또한 아직까지는 낯설다.
 
   하지만 이자람의 <이방인의 노래>는 달랐다. “머나먼 콜롬비아에서 온 작가의 글을 읽다 낮잠에 들었는데, 깨어난 뒤에도 그 이야기가 잔잔히 가슴을 아려오더라”며 보따리를 풀어나가는 이 젊은 소리꾼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남미의 카리브해에서 스위스 제네바로 온 세 사람의 일상이다. 한 나라의 전직 대통령이었지만 이제는 중대한 수술을 앞둔 노인과, 그런 대통령을 알아보는 앰뷸런스 운전사 오메로, 오메로의 아내이자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혈)인 라사라가 있다. 노인은 한 때 대통령이라는 권위를 가졌던 사람이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저 거리를 떠도는 이방인일 뿐이다. 오메로는 비록 가난한 집안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지만, 전직 대통령을 누추한 집으로 초대해 한 끼 식사를 대접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생각한다. 그런 오메로를 탓하며 노인을 원망하는 라사라는 각박해 보이지만, 여전히 인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노인이 초대받은 그들의 집은 어느 외딴 시골동네. 힘겹게 계단을 걸어 올라간 집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감자스프와 새우볶음밥을 먹는 이들의 모습.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보석을 전당포에 맡기려는 노인과 돈을 조금이라도 보태려는 이들 부부의 애틋한 마음씨. 이렇듯 <이방인의 노래>는 별 것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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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소리와 연극 사이의 어드메에 있는 이 극의 매력은 원작을 판소리에 맞게 재구성한 데 있다. 남미문학을 우리 소리로 이야기하는 것도 새롭지만, 판소리로만 이루어지는 극이 이렇게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특히나 대통령과 오메로, 라사라, 해설자라는 4인의 역을 동시에 해내며 순간순간의 동작과 표정, 말투들을 상황에 맞게 잘 잡아내 절묘하게 보여주는 이자람의 표현력이 돋보인다.
   한편 원작에서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장면에서 해학성을 찾아내는 것 또한 극 중 빠뜨릴 수 없는 묘미이다. 가령, 대통령과 함께 식사를 하는 오메로가 ‘오랜만에 맛보는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는‘ 이국적인 장면을 정말 절묘하고도 익살맞게 살려냈다. 육즙이 입안에 퍼지는 그 순간을 현장에서 휘몰아치듯 연기하며 노래할 뿐만 아니라, 맛깔나는 우리말 표현들을 양념으로 맛있게 버무린 이자람의 소리였다.
   라사라가 부르는 ‘물라토의 노래’, 물라토로 살아가며 녹록치 않은 삶 속에서 부르는 한의 정서가 판소리가 아닌, 온전한 그녀만의 노래를 통해 흘러나온다.


  “우리들은 흙을 먹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 우리들은 흙을 먹고 옛 기억에 빠져들어……주머니에 넣은 흙을 한 줌 한 줌 꺼내먹지……그 발로 밟은 흙, 그 흙을 삼키면 온갖 피가 섞이어 마음에는 평화가……”


  이렇듯 작품에 담긴 남미의 정서와 문화를 그대로 가져와 우리의 것을 자연스럽게 녹여내었다는 점, 판소리 고유의 창과 북 장단 이외에 노래와 기타 반주를 함께 사용한 점은 판소리극의 또 다른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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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극의 원작이 담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단편집, <이방의 순례자들>
 

   이 작은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원작과는 달리 대통령의 편지로 대신해 전달하며 애틋함과 진한 여운을 남긴 점도 인상적이었다. 시계와 결혼반지를 두 부부에게 남기고 간 편지 속 대통령이 “그대들을 만나 행복했다”는 마지막 말에 눈시울이 붉어진 건, 이 극에서만 얻을 수 있는, 별 것 아닌 소소한 것들에 대한 울림과 행복이다.
극 중에서나, 우리에게나 모두 먼 나라의 ‘이방인’인 이들의 이야기는 마치 어제 일어난 일인 것처럼, 어제 만났던 사람들인 것처럼 소박하고 친근하다. 또 서로가 서로에게 이방인일 수 있는 우리에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갖는 소중한 순간과 그 안에서 느껴지는 정감을 들려준다. 그렇기에 극이 막을 내린 뒤에도, 마치 소리꾼이 이야기를 처음 읽고 잠에 들어 느꼈던 바로 그 순간처럼, 잔잔하게 가슴 속에 스며드는 것이 아닐까. 한 번의 붓놀림으로 물감이 서서히 번져가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말이다.
 
 
   이번 여름, 밀양으로의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면, 혹은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들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다면, 자연이 어우러진 야외무대 ‘숲의 극장’에서 다시 한 번 울려퍼지는 <이방인의 노래>로 마음의 쉼표를 가지는 것은 어떨까.



[심한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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