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알기 전 까진 누군가를 마음에 들이는 일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냥 힘들었습니다. 온 마음을 내어주는 일은 곧 나를 갉아먹으니까요.
저는 시작점에서 서서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는 사람이니 무엇이든 쉽게 시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주는 일도, 마음을 받기 위해 애쓰는 일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잘 압니다. 그래서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지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습니다.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면서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습니다. 내 몸과 마음이 나도 모르는 새에 이미 그곳에 가 있더군요.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당신을 보자마자 이미 당신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하필 당신은 이맘때 태어나 나는 당신의 생일을 축하할 수 있었습니다. 올해 당신의 생일날 바로 직전에는 비가 내렸고, 저는 당신에게 첫 편지를 보냈습니다. 막상 당신의 생일날엔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뚝 그치고 봄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더군요. 얄궂은 봄 날씨에 태어나 봄을 부르는 사람이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조금 웃음이 나면서도 안타깝습니다.
며칠 새 당신이 없는 삶을 떠올리기 어려워졌습니다. 하필 이때 당신은 제게 너무도 익숙한 그 공간에 찾아왔고, 저는 당신을 또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만남은 오직 제 의지만으로 성사된 것이고, 그날 저는 당신이 여전히 반짝이며 이 땅에 존재한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아직도 그 밤의 제가 기억납니다. 짙은 밤하늘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그날. 그 밤의 온도와 냄새. 거기에 서 있던 나. 그 땅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저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요. 처음으로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감각을 잊지 않고 싶어 시작한 편지이지만, 솔직히 글을 쓰는 지금도 참 답답합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어떠한 것도 말이나 문장으로 표현하려 하면 그 원래의 형태가 왜곡되고 맙니다. 아무리 좋은 단어를 골라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당신을 마음에 들이게 된 이유를 말하자면 하루 종일 말해도 부족하겠지요. 게다가 어떤 식으로 설명해도 원래의 감각에 딱 맞는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어딘가 투박하고 정제되지 않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말로 표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뭐, 말하자면 깁니다. 당신의 이름 받침에 이응이 두 개나 들어가는 것도 좋습니다. 입술을 오므린 상태로 당신의 이름을 발음하면 입안의 공기가 동그랗게 모여 울리는 게 좋습니다. 체격에 비해 먹성이 좋은 것도, 손윗사람을 대하는 게 서툰 것도, 나름의 규칙과 기준 속에서 사는 것도, 억지로 거짓을 말하지 않는 성격도, 파란색을 좋아하는 것도 전부 좋습니다. 당신은 기계처럼 다정해서 종종 알쏭달쏭한 기분을 느끼게 하지만, 그런 점마저 좋습니다.
동시에 저는 당신을 보며 아주 깊은 우울을 맛봅니다. 이런 연약하고 말랑한 기분에 휩싸이는 게 싫습니다. 나를 잃은 채 당신을 생각하는 내가 싫습니다. 이 마음을 언제든지 소유와 집착으로 연결할 수 있는 제가 싫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저는 오직 이런 방식의 사랑만 사랑이라고 배웠으니까요. 내 사랑은 늘 깨끗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언제든 미움과 증오를 동반합니다. 저는 제가 배운 범위 내에서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누군가는 사랑에서 충족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 말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 사랑은 늘 어딘가 구멍이 뚫려 텅 비어있는 공간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랑할수록 구멍이 한두 개씩 늘어나는 기분을 당신은 아실까요?
쇠는 자신을 갈고닦으면 불을 이길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불이 아주 조금씩 쇠를 녹이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참 아리송합니다. 그렇게 되면 전 오래도록 당신을 이길 수 없겠지요. 억울합니다. 전 당신을 영원히 함락시킬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 해도 미래를 약속할 순 없습니다. 전 언젠가 또 당신을 떠나겠지요. 지금은 이렇게 편지를 쓰며 당신과 나 사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안간힘쓰지만, 어느 날엔가 갑자기 훌쩍 떠나면서 영영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제 사랑은 늘 그런 식이니까요.
그러니 매 순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가 있는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낼게요. 당신은 80살까지 거기에 꼼짝없이 서 있을 테니 말입니다. 당신을 만나게 되어 정말로 기쁩니다.
2025년 04월 13일
호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