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션에서 나의 정신분석가에게 '나의 편지에는 언제나 공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나는 나에 대해 사고할 수 없는 장애가 있다. 누군가는 내 글에서 어떤 자아도취를 읽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솔직히 내가 그런 글을 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않는다'라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 나는 그러지 '못한다.'. 이 무능감이야말로 내가 '나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힘의 원동력이다.
나 자신에게 삼켜지지 않기 위해 나는 언제나 다른 사물이나 사람이 우물거리는 것에 매우 날카로운 촉을 세워왔다. 그것을 빠르게 인용해서 나 자신의 감정을 붙여 흘려내기 위함이다. 내가 정신분석이나 현상 해석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원천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아무도 모르게 은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근본적으로 나는 나를 생각할 때, 타자에 기생한다. 해석 행위를 통해 일반적으로 유능감을 획득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만큼 무능감에 대한 자각에서 근원한다는 사실로 인해 치욕감을 느낀다. 그래서 나에게 편지를 쓰는 행위는 유능감과 무능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나는 내가 느낀 것을, 타인을 향해서 빌려올 때만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낱말들을 훔쳐 와서 문장을 만드는 꼭두각시를 상상해 보라. 꼭두각시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 모든 말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있을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이 행위는 고양감과 방향 없는 분노와 공격을 조금씩 내재하고 있다.
나는 서간문을 두 번 쓴 적이 있다. 모두 전 남자친구다. 나는 이들에게 평소에도 편지를 쓴 적이 많다. '서간문'이라는 카테고리로 발송되는 이 편지들은 그들에게 닿지 않을 글이다. 나는 그래서 좀 더 편하게 그들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읽지 않는다면, 내가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공격도 무효화되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충동과 공격이 아무런 피해도 없이 해결될 수 있는, 그야말로 마법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지각하지 않아 왔지만, 나는 이 방식을 몇 번 사용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왜 서간문을 쓰게 되었는가? 이번에는 쓸 사람이 없었다. 뭉툭한 분노를 대신 처리할 정신분석가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왜 쓸 생각이 들었는가? 여기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가설을 세워보자면, 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나는 나에 대한 글을 어딘가 전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편지를 쓰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고, 기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 나 자신에게 편지를 쓴다면, 공격의 형태를 취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얼마 전에 자기소개를 할 기회가 있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편지'의 형태를 고집했다. 여기까지 사고를 전개한 나는 나의 성향과 엮어 두 가지 가설을 다시 세워볼 수 있다. 첫째, 나는 내 자아의 기분에 취하는 것을 경멸한다. 나 자신이 경멸스러운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내 언어에 묻어나있는 가진 모순과 복잡한 감정을 꾸미는 행위를 진심으로 역겨워한다. 둘째, 첫 번째 이유로, 그리고 내가 가장 익숙한 방법으로 타자화된 시선을 가져오길 바란다.
이 글은, 일기가 아니다.
이 글은 나만 읽는 것이 아니고, 타자의 시선에 노출될 것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가설' 등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서 드러나는 대로, 나는 이 글이 현상 분석과 의미 생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 편지도, 일기도 될 수 없다. 나는 이 글을 읽을 사람들이 이 글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내 글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글은 논리를 구성하고 있지 않다.
이 글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이해되며 읽히길 거부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만이 나를 오래 들여다보고, 수많은 독자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여기서 나의 정체성을 마구 떠든다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더 나아가 오해할 것이다. 두 사람만이 아는 편지처럼, 나는 다른 사람이 이해할 것을 기대하지 않고 너에게 글을 쓴다.
이 글은 그래서, 아주 모순적이다.
표면에 드러나길 바라지만, 드러나기를 거부한다.
해석되길 원하지만, 해석되기를 거부한다.
내가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그랬고, 네가 네 자신과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 그렇다.
길거리에 떠돌아다니는 디오게네스를 동경하는 네가, 카프카의 분열적인 언어에 이해할 충동을 느끼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너와 나는 고상한 동시에 기생하는 정신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아마 내가 너를 성별도, 성격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든 이유는, 정체화를 거부하는 영원한 해석의 장을 남김으로써 이 모순과 긴장이 유지되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동거는 아마 평생토록 지속될 것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서로를 인지하지만, 영원히 접촉할 수 없는 존재로서 서로 존재할 것이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서로를 인지하지 못하고, 친해지지거나 멀어지지 못한 상태로, 우리는 서로에게 속한 상태로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