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는 볼 수 없었던 세상을,
그들의 시선과 역사를 빌려 완성합니다.
그렇게 그들의 마스터피스를 이해합니다.
낭만의 의인화, 눈꽃씨 작가를 소개합니다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삶 속의 티끌 같은 순간들을 낭만화하는 작가 눈꽃씨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삶 속의 티끌 같은 순간을 낭만화’한다니, 정말 낭만적인 소개 문구네요. 어떻게 해당 소개를 정하게 되었나요?
저는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버스를 타고 창밖을
바라볼 때도, 산책을 할 때도, ‘내가 뭘 그릴 때 즐거울까?’, ‘어떤 걸 그리고 싶어 할까?’ 같은 질문들을 자주 떠올려요.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번뜩일 때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날의
날씨를 볼 때나, 길가에 버려진 무언가를 볼 때, 영감이
작은 폭죽처럼 저의 머릿속에 확 떠오르는 거죠. 그렇게 떠올린 영감들을 휴대폰 메모장이나 종이에 짧게
기록해두고, 나중에 기록된 것들을 정제해서 작품으로 만들면 저 자신도 어떠한 향수를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생각보다 많은 분들께서 저의 그림을 보고 같은
포인트에서 향수를 느껴주신다는 것이에요. 작품 활동을 하면서 이런 점을 점점 깨닫게 되어 ‘티끌 같은 순간들을 낭만화한다’는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어요.
- 작가님의 작품을 보고 사람들이 향수를 느낀다고 느끼셨던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대학에 입학한 지 갓 1년 된 꼬꼬마 작가 시절, 처음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에 나갈 때 정말 고민이 많았어요. 직접
사람들한테 제 그림을 선보이는 오프라인 공간이었으니까요. 많이 와주실지에 대한 걱정은 물론이고,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의 그림을 그려야 할지, 아니면 정말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도 될지, 머릿속이 복잡했죠. 결국에는 깊은 고민 끝에, 그냥 제 그림을 들고 무작정 나갔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정말 놀라웠던 건, 제 그림이 ‘연령을 타지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유치원 꼬마 아이들부터 따님이 작가님이셔서 같이 오신 어머님들까지, 나이불문 모두 저의 그림을 좋아해 주셨거든요. 특히 어머님들께서는 "학생인데 어떻게 우리 세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림을 그릴 수 있냐"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죠. 그걸 들으면서 ‘아, 내가 직접 겪지 않은 것을 그리더라도,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전달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동시에 '나는 살지도 않았던 시대, 내가 실제로 가지고 놀았던 것도 아닌 물건들인데 나는 왜 이런 것들에서 향수를 느끼지?'에 대한 의문도 갖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찾아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아네모이아’를 공감하고 있더라고요. 그걸 알게 되면서,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한 그리움’이 나만의 특별한 감정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최근에는 이러한 저의 아네모이아에
대한 진심이 그림에 녹아 타인에게도 전달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 작가님께서 처음 일러스트를 그렸을 때가 궁금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 중학생 때부터 혼자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그때부터 그림을 그려서 돈을 벌었거든요. 친구 소개로 개인 문구점을
하시는 사장님들을 알게 되어서 노트북과 펜으로 그림을 그려서 팔고는 했었죠. 그래서 저는 용돈을 많이 받지 않는 학생이었지만, 생각보다 금전적으로 풍족한 학생이었어요. 그렇게 돈을 벌고 나면 저는 그 돈을 들고 무작정 지하철을 타고 교통카드를 찍어서 소품샵 구경을 다니는
걸 정말 좋아했어요. 그 과정에서 또 저의 취향이 확장되기도 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하며 자연스럽게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그리기 시작한 것 같아요.
애니메이션과 일러스트레이션, 그 사이의 눈꽃씨 작가
- 현재 애니메이션 학과에 다니고 계시죠. 소품샵에서
일러스트를 판매하며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셨음에도 애니메이션 학과에 재학 중이신 것이 무척 놀라워요.
저는 그래도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야기가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을 타인에게 공유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영화 미술 감독이 되어, 이야기 있는 콘텐츠를 함께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생각할수록 저는 타인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보다, 제 안에 있는 이야기를 직접 풀어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내가 직접 감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할 수 있는 나만의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그렇게 만화라는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요.
하지만 고등학생 시절 어느 날, 제가 만화보다 좀 더
생동감 있고, 음악이 어우러진 '움직이는 영상'을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순간이 있었어요.
그날은 제가 ‘오리’라고 부르던 단짝 친구와 함께 [인디애니페스트]라는 독립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다녀온 날이었어요. 마지막 폐막식 시상식은 입장료 없이 관람할 수 있었거든요. 관객석에는 상을 받으러 온 감독님들과 그 가족, 지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일반 관객은 거의 없었지만, 친구와 저는 조용히 그 사이에 앉아 상영작들을 감상했죠.
친구와 함께 상을 받은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전부 감상하는데 그때 처음으로 독립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대해 강렬하고도 긍정적인 충격을 받았어요. 상업적인 애니메이션도 물론 좋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한 공간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 자체가 너무 인상 깊게 다가오더라고요.
특히 한 애니메이션 감독님께서 무대에 서서 소감을 이야기를 하시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애니메이션은
정말 힘든 작업이다. 이번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도 ‘다시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나의 애니메이션을 상영하고, 나의 작품을 봐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왜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어 했는지 다시금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씀 하셨었죠.
이후 인디애니페스트가 끝나자마자 친구와 남산
케이블카로 달려갔어요. 케이블카 운영이 끝나기 직전에 간신히 케이블카에 탔고, 가쁜 숨을 고르며 남산 정상에 올라갔죠. 그리고 남산 정상에서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나 애니메이션 감독이 될 거야"라고
소리치며 다짐했던 기억이 나요. 그 순간이 제가 ‘애니메이션’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던 때였어요. 그 결심에 자연스럽게 대학교도 애니메이션 학과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 너무 낭만적이 이야기네요.
그렇다면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게 된 이유가 궁금해지는데.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에 나가기로 결심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장기간 애니메이션을 준비하면서도 주기적으로 페어를 준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잖아요.
제가 작품을 만들 때 인간을 큐브에 빗대어 표현할 때가 종종 있어요. 큐브는 조금만 돌려도 전혀 다른 면이 보이잖아요. 사람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요. 저 또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성격이 크게 달라지는 편이고요. 하하. 그만큼 저는 저 스스로가 굉장히 다각적인 면모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는 만큼 하나의 방식으로만 저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애니메이션은 서사가 있고, 시청각적으로 즐길 수 있는 강점이 있지만, 그 안에 제가 가진 다양한 면모를 모두 담기에는 한계가 분명하게 있다고 느꼈거든요. 하지만 일러스트는 정적인 작품만이 담아낼 수 있는 방식으로 저의 세계를 보여주며 그 한계를 보완해 줄 수 있죠. 저는 그렇게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 모두 활용해서 저 스스로를 온전히 표현하고
싶었어요.
- 작가님께서 느끼시는 애니메이션의 매력이란 무엇인가요?
안 그래도 마침 오늘 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의 정의에 대해 배웠어요.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애니메이션은 무엇인가요?" 그래서 제가 용기를 내서 대답했어요. "정적인 것을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것입니다."라고요. 하지만 사실 이건 사전적인 정의잖아요. 제가 생각하는 애니메이션은 결국, 정말 해야 할 말이 있는 사람들이 "이 말을 하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 "나는 이 이야기를 꼭 해야겠다."라는 마음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싶어요.
- 그렇다면 작가님께서는 애니메이션과 일러스트레이션, 각각에 어떤 이야기들을 주로 나눠서 담아내는 편이세요?
일러스트에서는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향수’라는 감정을 그리고 있어요.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향수’를 일러스트 안에서 함축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표현하려고 하고 있죠.
반면, 애니메이션은 ‘결핍’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가진 결핍, 사람들의 결핍, 그리고 그 결핍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담고
싶었어요. 김이나 작사가님이 “사람의 매력은 잘 다듬어진
결핍에서 온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저도 애니메이션을
통해 제 결핍을 다듬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느끼는 어려움이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아픔들을 애니메이션에서 풀어내고 있어요.
- 작가님께서는 스스로를 '표현하고 싶다'고 해주셨어요. 그렇다면 그림을 그릴 때도, 그리고 그리고 나서도 작품을 관람하는 이에 대해서도 고려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은데.
맞아요. 제가 그린 그림들이 하나둘 쌓여가면서, 자연스럽게 작품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단순히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어떤 마음으로 그렸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사람들과 마주 보며 나누고 싶었어요. 그림을 그리는 일은 대부분 혼자서 하는 작업이다 보니, 그 과정에서 타인과 대화할 기회는 많지 않잖아요.
특히 애니메이션은 제작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장기 프로젝트라,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몇 년 동안 품고 있어야 하죠. 그렇다고 그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생각만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작업 중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고, 그리고 싶은 것도 달라지니까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금의 이야기를 지금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던 것 같아요.
제가 그린 그림들을 [품(POOM) 시리즈]라고 부르는데, ‘물건 품(品)’ 자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그런데 ‘품다’라는 말은 동시에 누군가를 안아주는 마음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잖아요. 저는 이 그림들이 무엇을 품고 있는지, 어떤 마음을 담고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프라인 페어에 참여하기로 마음먹고,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에 나가게 되었죠.
그런 이유로 일러스트는 제게 아주 중요한 소통의 창구가 되었어요. 애니메이션보다 작업 시간이 짧고, 한 장의 그림에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으니까요. 덕분에 장기 프로젝트를 이어가는 동안에도 틈틈이 제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었고, 마라톤처럼 긴 애니메이션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되어주었어요.
- 작가님께서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과, 그림이 완성된 순간의 타인과의 소통을 무척이나 중요시 여기고 계시네요.
저는 그림을 ‘타인과의 대화’라고 생각해요. 봐주는 사람이 없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림을 그리는 의미도 사라진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림은 “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애니메이션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요. 마치 우주로 신호를 보냈다가 몇 년 뒤에야 응답을 받는 것처럼요. 반면, 일러스트는 좀 더 즉각적인 대화가 가능해요. 그리고 제가 가끔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죠. A라는 주제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B로 넘어가도, 보는 분들이 “A도 흥미롭고, B도 재미있네요”라며 반응해 주시는 것이 무척이나 큰 일러스트의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일러스트는 저에게 ‘지금의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나눌 수 있는 도구가 되었고, 동시에 애니메이션이라는 긴 여정을 이어갈 수 있는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었습니다.
모든 세대의 향수가 담겨있는, 눈꽃씨의 일러스트레이션
- 어째서 일러스트는 ‘향수’라는 키워드에 집중하는 것일까요?
제가 향수 덕분에 살아가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제 기억 속에서, 아마 5살, 6살 때부터 시작된 그 순간부터, 정말 티끌 같은 기억들이 많이 남아있거든요.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기억들도 있고, 이미 재개발로 사라진 저의 예전 집이나, 어린 시절 동생과 함께 손을 잡고 갔던 문구점 같은 곳이 아직도 저의 마음속에서는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죠. 지금은 아파트들이 꽉 들어찬 자리가 그 당시에는 허허벌판이었고, 그 위에 크레인들이 10개쯤 서 있었던 광경은 지금의 저에게도 생생하게 남아있어요. 사소하게는 부모님과 함께 눈사람을 만들던 순간들까지, 그 모든 순간들이 저에게는 짙은 향수로 남아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제가 간직하고 있는 향수들이 저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해요. 영화나 음악을 들을 때, 그 순간 제가 갖고 있었던 과거의 이미지나 장면이 스쳐 지나가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함께 떠오를 때가 있잖아요. 저는 힘들 때 그런 작은 향수들로 버티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상하게도, 오래된 물건들이 유독 향수를 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물건들을 바라보면 저절로 이야기가 떠오르고,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 작가님의 SNS에 가장 처음 올라온 그림은 [제멋대로 구는 씨리얼 컵]이에요. 해당 그림에 대해 소개를 해주신다면.
고등학생이 되고 처음 미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을 때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요. 무조건 주인공이 있어야 하고, 내러티브가 있어야 하고, 기승전결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그때 새로 오신 그림 선생님께서 제가 너무 그 고정관념에 매몰되어 있다고 느끼셨는지, "그냥 네가 좋아하는 것을 그려 보라"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서 그때 선생님의 말처럼 제가 좋아하는 것만 그린 첫 그림이 바로 [제멋대로 구는 씨리얼 컵]이에요.
처음에는 이미 존재하는 상품들을 자주 그렸기 때문에 오마주 형식의 작업이 많았어요. 예를 들어 제가 그린 [제멋대로 구는 씨리얼 컵]에 등장하는 컵은 실제로 ‘베일리스 컵’을 모티프로 한 것이에요. 이 컵은 고등학생 때 제가 처음으로 직구한 빈티지 컵이기도 해서, 저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고, [제멋대로 구는 씨리얼 컵]은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그린 오마주였죠. 시간이 지나면서 저만의 생각이 조금씩 확장되자 그림 속 소품들도 직접 구상하거나 기존의 것들을 변형해 표현하는 식으로 점점 변주를 주기 시작했어요. 그렇지만 지금도 ‘컵’을 주제로 작업할 때면, 저의 첫사랑 같은 존재인 [제멋대로 구는 씨리얼 컵]에 대한 오마주는 여전히 계속 이어나가고 있어요.
- 고정관념이 있는 상태에서 일부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아요.
맞아요, 그때는 정말 많이 어려웠던 것 같아요. 사실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건 제 전공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그림이기도 해서, ‘어떻게 그리는 게 좋을까’에 대해 고민이 많았죠. 당시에는 일러스트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었고, 그냥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무작정 그리곤 했어요. 예를 들면 시리얼 같은 경우도, 빈티지 잡지에서 우연히 보고 “와, 이거 진짜 예쁘다.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게 된 거였어요. 하하. 평소에 갖고 싶었던 소품들을 스크랩해두고, 그걸 그림에 담았던 기억도 나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림에 제 이야기를 담는 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예를 들어 [제멋대로 구는 씨리얼 컵]에 적힌 시리얼 넘버는 사실 제 생일이에요. 또, 프리지아 꽃을 꽂은 소녀 그림은 제가 평소에 식물을 머리에 꽂은 사물을 그리는 걸 좋아해서, 그런 식으로 표현하면 재밌겠다 싶어서 넣은 거고요. 한쪽에 그려진 토끼와 오리는, 앞서 이야기했던 저와 단짝 친구를 담은 요소예요. 제가 그 친구를 ‘오리’라고 부르듯, 그 친구는 저를 ‘토끼’라고 부르거든요.
이제는 오히려 제 이야기가 담기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는 게 어렵게 느껴지기도 해요. 하하. 그래서 요즘엔, 직접 겪지 못한 향수 속에서도 제 자신을 최대한 담아내려 노력하고 있어요.
- 일러스트의 대표 작품을 하나 소개해 주시겠어요?
많은 분들이 특히 좋아해 주시는 저의 작품은 아마 [담는 것] 시리즈인 것 같아요. [제멋대로 구는 씨리얼 컵]은 물론이고, 최근에 그린 [취향의 정제] 역시 많은 사랑을 받았거든요.
[화정]이라는 그림은 저의 본명인 ‘화정’에서 착안해, 저 자신을 깊이 탐구하며 그렸던 작업이에요. 또 [winter aesthetics]는 제가 겨울에 태어난 사람이라서, ‘겨울의 아름다움을 담아보자’는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었어요.
그렇게 하나하나 작업을 이어오다 보니, [담는 것] 시리즈는 저의 그림들 중에서도 일종의 ‘랜드마크’ 같은 시리즈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에 찾아와 주시는 분들 중에는 이 시리즈를 보고 저를 알아봐 주시는 분들도 계시니까요. 그럴 때마다 정말 큰 힘이 되고, 저 역시도 다음 페어에서는 ‘이번엔 어떤 걸 담아볼까?’ 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돼요.
- [담는 것] 시리즈를
대표 작품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해당 시리즈를 이어오며 가장 공통적으로 신경 썼던 것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꼭 얼굴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무엇을 담아야
하는 거였어요.
저는 [담는 것] 시리즈에서
주로 꽃을 많이 담는데, 그 꽃을 그릴 때마다 꽃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해 많이 조사를 하는 편이에요. 꽃이 갖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꽃의 역사는 무엇인지, 혹은 꽃의 이미지 자체는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 등이요.
[화정] 시리즈 같은 경우에는
그림이 풍족해 보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사계절의 꽃을 4분할해서 다 담기도 하고, [Eternal childhood]에서는 제가 어릴 적 봉선화가 핀 마당에서 지내며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이던
추억을 녹여내 봉선화를 담기도 했죠.
[취향의 정제]에는 제가 실제로 길렀던 파리지옥을 담았어요. 파리지옥은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강인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척 여리고 섬세한 생물이에요. 파리를 잡기 위해 큰 힘을 들여 입을 닫고 나면, 그 이파리는 며칠 동안 시름시름 앓곤 하죠.
사실 이렇게 다양한 것들을 그림 속에 담아내는 일은, 곧 제가 많은 것을 좋아한다는 뜻이기도 해요. 그래서 한동안은 그게 저 자신에 대한 고민이 되기도 했어요. 작가로서는 한 우물만 우직하게 파야 한다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너무 다양한 것에 관심이 많고, 좋아하는 게 너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의 그림을 봐주시는 분들 또한 ‘이 작가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하고 혼란스러워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고요. 하고 싶은 말이 많고, 표현 방식도 계속 달라지는 제 모습이 한편으로는 저를 더 풍성하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과연 나는 작가로서 자질이 있는 걸까?’ 하는 의심으로 이어지기도 했어요.
그런 고민을 계속하던 어느 순간, 그런 저의 모습이 파리지옥이 파리를 먹는 과정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간절히 원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것을 삼키기 위해 쓰는 에너지와 그 후의 고요한 회복이 함께 있는 모습이요. 그때부터 조금 더 단단한 방향성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탄생한 그림이 바로 [취향의 정제]예요.
- 앞서 작가님의 일러스트가 작가님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고 하셨어요. 작가님의 시리즈 중 가장 작가님의 향수가 짙게 맡아지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가장 최근에 그린 [Eternal childhood]인 것 같아요.
그 그림에는 정말 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았어요. 그림 속 선반은 실제로 저희 집에 있는 집 모양의 선반이에요. 그 작은 칸칸마다 제가 직접 겪었던 일들, 실제로 가지고 있었던 물건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인형들, 제가 키웠던 병아리들, 그리고 떠나보낸 물고기들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아 넣은 그림이죠. 더 넣고 싶은 것들도 정말 많았지만, 하나하나 신중하게 추리고 또 추렸어요.
[Eternal childhood]의 중심에 놓인 눈사람 모양의 그릇도 그냥 그린 것이 아니에요. 제가 눈사람을 유독 좋아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아버지께서 산에서 일하시는데, 어릴 적 어느 겨울, 산 아래 주차장에서 부모님과 함께 눈사람을 만들었던 기억이 제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눈이 내리면, 자연스레 그날이 떠오르고, 그때 만들었던 작고 귀여운 눈사람이 생각나요. 아마 많은 딸들이 비슷한 감정을 겪지 않을까 생각해요. 자라면서 부모님의 삶과 아픔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을 배워가잖아요. 그런데 저에게는, 그 눈사람을 만들던 그 한 장면이 모든 걸 괜찮게 만들어주는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그래서 최근에 그린 [Eternal childhood]는 제게 단순한 작품이 아니에요. "이게 바로 나야"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제 정서와 향수를 깊이 담고 있는 그림이에요. 어린 시절의 기억, 가족의 온기, 사라졌지만 마음 안에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들이 모두 이 한 장면 안에 담겨 있어요.
– 정말 작가님의 모든 그림은 작가님으로부터 시작하네요. 일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저는 사실 그게 저의 단점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제가 겪어보지 않은 것을 형상화하는 데는 어려움을 느끼거든요. 그래서 가끔은 ‘언젠가 내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요. 제 친구는 “나는 과거에 얻었던 영감을 파먹으며 살아. 이 영감이 다 떨어지는 날이 내 작가 인생의 끝일지도 몰라”라고 말하기도 했고요. 하하.
최근에 출판사에서 일을 했는데,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일상이 반복되고 단조로워지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제가 예전에는 자주 경험했던 ‘번뜩이는 폭죽 같은 순간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저는 의도적으로라도 ‘낭만 있게 살자’고 다짐하게 됐어요. 구태여 일을 만들기도 하고, 삶의 밀도를 높이려고 노력하면서요.
- 이렇게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긴 그림을 대중들에게 공개하는 것은 어떤 느낌이세요? '자신을 온전히 보여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을까요?
저는 사실 그 부분이 정말 무서워요. ‘내가 나의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했을 때,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늘 있거든요. 그리고 저는 그것이 제 숙제라고 생각해요. 좀 더 솔직해지기, 좀 더 진실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기가 작가로서 살아가면서 제가 계속해서 풀어나가야 할 숙제인 거죠.
그래서 저는 글을 쓰시는 작가님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글이라는 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되잖아요. 숨길 수도 없고, 애매하게 흐려놓을 수도 없죠. 사실 저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항상 글을 먼저 적기 때문에 저도 혼자 적어놓은 글들이 많아요. 그렇게 적어놓은 저의 사적인 글들 중에서도 "이건 말해도 되겠다" 싶은 것들은 그림을 올릴 때 함께 올리죠. 하지만 정말로 "이거 보여주면 큰일 나겠다" 싶은 것들은 제 일기장에만 남아 있어요. 하하.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신의 삶을 대입해서 그림을 본다는 거예요. 아무리 제 이야기를 담아도,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투영해서 해석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그림으로 이루어지는 대화’가 조금 더 수월해지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일러스트는 결국 ‘예쁜 포장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친구들에게도 "나는 진짜 포장을 많이 하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자주 하거든요. 그림 속에 제 이야기를 숨겨 담다 보면, ‘제가 너무 많이 드러날 걱정’ 없이 오히려 조금 더 편하게 저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 ‘너무 많은 것을 좋아하는 것’과 ‘스스로의 영감이 떨어질까 봐 걱정되는 것’이 함께 공존하는 고민이라는 것도 흥미로워요. 앞서서 '파리지옥'을 '너무 많은 것을 좋아하는 작가님'으로 비유하기도 하셨으니까요. 저는 오히려 그 둘이 서로서로를 보완해 줄 수도 있지는 않을까 싶은데.
그런 말씀을 들으니까 저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하게 돼요. 제가 왜 이렇게 많은 것을 좋아하면서도 영감에 대해 불안해하는 걸까? 아마도, 좋아하는 걸 바로 작품 소재로 쓸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에게는 ‘좋아함’과 ‘작업으로 연결됨’ 사이에 간극이 있어요. 그걸 어떻게 잘 정제하고, 저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낼지 떠오르는 순간이 바로 ‘영감’인 것 같아요. 비유하자면, 좋아하는 것들은 요리 재료고, 영감은 그걸 맛있게 조리해내는 레시피 같은 거죠. 말씀처럼,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진다면, 영감이라는 레시피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 앞서 그림은 하나의 '대화'라고 해주셨어요. 일러스트레이션에서 작품을 통해 대화를 나눈 경험이 있다면 공유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제가 처음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에 나가기 전, 대학교를 휴학하고 제 그림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제주에서 한 달 살이를 했던 적이 있어요.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영감을 충전하고, 책도 실컷 읽고 싶어서 떠났죠. 매일 그림을 그리고,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단순한 일상을 보내던 중, 어느 날 가져간 책을 다 읽어버렸어요. 그래서 근처 서점을 찾아 지도를 켰고, 그렇게 도착한 곳이 [몽캐는 책고팡]이라는 작은 독립서점이었어요. 구옥을 개조한 따뜻한 공간이었는데, 저는 그저 관광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반갑게 맞아주시고, 제주에 대한 이야기, 서점이 자리한 집의 역사, 그 안에 있는 물건들에 담긴 기억들까지 차근히 들려주셨어요. 심지어는 안쪽 방에 누워 그 집의 기운을 느껴보라고 하시기도 했죠.
그 친절하고 정다운 순간이 너무 고마워서,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그 서점을 그림으로 담았어요. 서점 주인분이 이 그림을 보실지 아닐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마음을 꼭 기록해두고 싶었거든요. 그림을 간이 스캐너로 스캔해 SNS에 올렸고, 며칠 뒤 정말로 서점 주인분에게 연락이 왔어요. 우리는 전화로 오래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림이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저와, 서점에 담긴 진심이 사람들에게 닿길 바라던 그분의 마음이, 어딘가에서 정확히 맞닿은 거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그림을 액자에 담아 다시 제주로 돌아갔어요. 어쩐지 그 그림은 그곳에 있어야 할 것 같았거든요.
육지로 돌아온 뒤에도 우리는 종종 연락을 주고받으며 제 그림에 대한 이야기, 제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요. 지금도 여전히 여름이 오면 그때 그 서점의 천장과 주인 분이 내어주셨던 시원한 하귤차가 생각나요.
또, 최근에 정말 흐뭇했던 에피소드가 있어요. 제 작품은 연령을 가리지 않아요. 어느 날, 어린 형제와 어머님이 같이 제 부스를 방문해 주셨어요. 형제 둘이
함께 오늘 쓰기로 한 금액을 정해 놓고 왔나 봐요. 너무 귀엽죠? 그런데
제 그 현제가 제 키 링을 너무도 사고 싶어 하더라고요. 하지만 키 링이 오늘 쓰기로 정해뒀던 그 금액에
딱 들어맞아서, 그걸 사면 다른 곳에서 아무것도 못 사게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계속 고민을 하고 어쩔 줄 몰라 하길래, 대신 제가 그 두
친구에게 "책 많이 읽어요"라고 말하면서
책갈피 두 개를 선물로 줬어요.
그런데 나중에 어머님이 DM을 보내주셨어요. "아이가 집에 와서 계속 그 키링을 찾고 있어요, 혹시
택배로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라고요. 아이가 정말
원했나 봐요. 하하. 사실 저에게는 하나의 키 링만을 말씀하셨는데
그때 형제가 함께 왔다는 것이 떠올라 두 개를 동일하게 보내드리고, 손 편지를 함께 넣었어요. "늦은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라고 말이에요.
그 뒤로 한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서, "바쁘신가 보다" 싶었는데 어느 날 인스타그램을 확인해 보니, 아기가 환하게
웃으며 그 키링을 들고 있는 사진을 올려주셨더라고요. 아이가 칭찬 스티커를 모두 채우면 저의 키 링을
받기로 했고, 드디어 칭찬 스티커를 모두 채워서 키 링을 받았다는 글과 함께 말이에요. 그 친구는 그동안 오직 저의 키링을 받겠다는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내고 있었던 거예요. 그걸 듣고 저는 오히려 제가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들었어요. 서로가
서로의 하루를 더욱 열심히 보낼 수 있도록 해준 이 순간도 그림을 통해 대화를 나눈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또, 매년 같은 분들이 찾아주실 때,
SNS 활동이 자주 없는데도 눈꽃씨를 기억해 주고 다시 오시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해요. 제가 3년에서 4년 동안
부스를 운영하며 이제는 저도 얼굴도 기억날 정도로 자주 오시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어떤 분은 미국에서도
찾아와 주셔서 저의 작품을 보며 "이 작품을 크게 보고 싶었다"라고 말씀해 주시기도 했죠. 사실 저는 제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찾아주시나 싶지만, 그런 순간들이 저에게 큰 의미가 되고, 제가
일러스트를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느끼게 돼요. 앞서 말씀드렸듯 저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은 사람이에요. 그것을
모아서 작품에 담고, 사람들이 그걸 보고 "너는
이런 얘기를 하고 있구나", “이 작품이 나에게는 이런 느낌이야”라고 피드백을 주는 과정 모두가 저에게는 정말 소중하고 감사한 소통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점이 있다면.
요즘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건데, 최근에도 다시 느끼는 게 있어요. 저는 결국, 제가 설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거예요. 아무리 어떤 것이 유행하고, 사람들 눈에 많이 띄는 스타일이 있더라도, 제가 그렸을 때 행복하고 좋은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그 그림이 실제로 사람들에게도 그런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척’ 하는
그림을 그려본 적이 있어요. "이런 그림이면 사람들이 좋아해 주겠지" 하면서, 유행을 따르는 척, 대중들에게 예쁜 그림을 그리는 척했었죠. 그런데 그게 다 티가 나나
봐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주시는 그림들을 보면
확실히 차이가 느껴지거든요. 제가 정말 마음을 담아서, 하나하나
이야기를 덧붙여서 그린 그림들은 사람들이 많이 봐주시고, 찾아주시고,
또 그림을 보고 한마디씩 이야기해 주시기도 해요. 그런데 그냥 예뻐 보여서 그린 그림들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결국, 제 마음이 움직여야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요즘 더 많이 깨닫고 있어요.
결핍을 정제합니다, 눈꽃씨의 애니메이션 [유영의 끝]
- [유영의 끝]은
어떻게 제작하게 되었나요? 특히 앞서 애니메이션에서 '결핍'을 담아낸다고 하셨기 때문에 해당 애니메이션에는 어떤 결핍이 담겨있을지 궁금해요.
이번에 준비한 [유영의 끝]은, 제가 지닌 결핍 중에서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요즘 우리는 멸망해 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잖아요. 저는 그런 분위기에 유난히 예민한 편이라, 뉴스 하나에도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그럴 때면 조용히 속앓이를 하듯 시름시름 앓게 돼요. 그래서 저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어요.
이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한 건 코로나 시기였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부정적인 뉴스가 쏟아졌고, 저는 과학 서적이나 다큐멘터리를 자주 보는데, 그 시기엔 진짜로 ‘지구가 곧 멸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뉴스에 집착하게 되고, 생각도 점점 비관적으로 변해갔죠. 그러면서 어느 순간부터 ‘죽음’이라는 개념이 정말 무섭게 다가왔어요. 누구도 그 이후의 세계를 알 수 없고, 그렇기에 더 불확실하고 막연한 공포가 있었어요. 그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유영의 끝]이에요.
이 주제는 그림 한 장으로 다 담기엔 너무 섬세하고 복잡했어요. 그래서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택했죠. 조심스러운 이야기이기에, 더욱더 신중하게 다가가고 싶었고,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는 그 감정의 결을 천천히, 깊게 전달할 수 있는 도구라고 느꼈거든요.
- 애니메이션 [유영의 끝]을 직접 설명해 주신다면.
홍유라는 캐릭터는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태어난 맞춤아기예요. 오직 좋은
유전자만 선택된 채 태어난 존재죠. 하지만 홍유의 아버지는 그런 세상에 반항하는 인물이었고, "나는 맞춤아기를 키울 생각이 없어."라며 홍유를
버리게 돼요.
무는 고장 나서 폐기된 로봇이에요. 하지만 쓰레기 줍는 걸 좋아하죠. 뭔가 "이건 쓸 만한데?"
싶으면 자기 보금자리로 가져오는 성향이 있어요. 그러다 홍유를 ‘주워 와서’ 함께 살게 돼요. 그렇게
둘이 살아가다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지구가 멸망하고, 세상에
인간이 전혀 남지 않게 돼요. 그 속에서 무가 혼자 깨어나고, 무는 홍유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바다로 떠나는 여정을 떠나게 돼요.
무는 TV 모양의 홀로그램 로봇인데, 그래서 그가
가지고 있는 홍유의 모습을 홀로그램으로 띄워요. 그러면서 홍유의 대사들이 나오죠. "나는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까?" "과거의
지구는 어떤 상태였을까?" "우리는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런 철학적인 이야기들이 계속 흘러가는 애니메이션이에요.
- [유영의 끝]의 로그 라인은 무엇일까요?
이 작업을 하면서 장자 사상에 대해 많이 찾아봤는데, 읽다가 느낀 것은 결국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내
우주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존재한다."라는 관점이요. 세상이
말하는 것보다, 내가 직접 느끼고 만들어가는 세계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결국 [유영의 끝]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우주, 나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마음을 중점적으로 갖고 제작한 애니메이션이에요.
그래서 [유영의 끝]의 로그 라인은 한마디로 "당신의 우주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요?"인 것 같아요.
요즘 저는 현대 과학이 이야기하는 많은 사실들이, 오히려 마법보다 더 마법 같다고 느껴요. 정말 놀라운 것들이 계속해서 탄생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되도록이면 제 세계에 한계를 두지 않으려 해요. 가능한 한 더 낙관적으로, 더 희망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노력해요. 그리고 결국, 내가 더 많이 집중하고, 애정을 기울이는 것들이 내 세계를 이루는 것이라고 믿어요. 그런 마음으로, ‘조금 더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집중하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 우주를 그려보자’는 생각으로 [유영의 끝]을 만들게 되었어요.
- 코로나 시기에 구성했다는 것은 2년 반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만든 애니메이션이라는 거네요. 그렇게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만큼, 해당 작품을 제작할 때 가장 신경 썼던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무와 홍유라는 캐릭터가 단순히 틀에 박힌 인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이 작품은 중간에 스토리도 굉장히 많이 바뀌었고, 연출도 거의 완성된
상태에서 아예 갈아엎기도 했어요. 그래서 마지막 즈음에는 정말 ‘저
두 캐릭터가 이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마치
제가 얘네들에게 끌려다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하하. 그만큼
정말 존재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작품 속 등장인물 1, 2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 어딘가에 실제로 살아 있는 존재처럼 느껴지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 저도 이야기를 만들어본 사람이라 스토리와 연출을 갈아엎는다는
것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한 일임을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경을 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처음에는 딱 1년 반만 작업하고 바로 졸업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만들다 보니 너무 아쉬운 거예요. 그렇게 하려면 우리가 하려던
이야기들을 너무 많이 덜어내야 했거든요.
원래 이 작품은 그냥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는 구조였어요. 과거에서부터 미래까지, 직선적인 흐름으로 진행되었죠. 그런데 만들면서 "이 모든 것들이 동시간대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면 더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이미 미래는 정해져 있고, 캐릭터들이 그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방식이 더 맞겠다고 판단하게 된 거죠.
아마 영화를 제작해 보셨다면 공감하실 것 같은데, 겉보기에는 불필요해
보이는 인서트 컷이나 장면도 감독이 이야기의 완결성을 위해 반드시 넣어야 하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굳이 이 장면을 러닝타임을 잡아먹으면서까지 넣어야 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감독 입장에서는 그게 없으면 이야기의 흐름이 끊겨버리거나, 감정적으로 완전한 결을 만들 수 없다고 느끼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장면들은 남기되, 너무 설명적으로 흐르는 부분들은 과감하게 덜어내는 과정을
거쳤어요. 특히 무라는 캐릭터가 기억을 띄엄띄엄 되찾는 설정이 있다 보니, 그 관점에서 서사를 풀어나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컷 편집을 할 때도 이야기를 단순히 시간 순으로 배치하는 게 아니라, 무가 기억하는 방식대로 편집하는 방식을 택했죠.
결과적으로
그렇게 연출했을 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훨씬 더 잘 전달되더라고요. 말씀해 주신 것처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제작 기간도 길어졌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수정한 것이 결국 이 작품의 정답이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담아낼 수 있었거든요.
- 틀에 박힌 캐릭터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러면 캐릭터 구성에서 가장 신경 쓴 점이 있다면.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 중에 굉장히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었어요. 제가
미처 캐치하지 못했던 포인트였는데, "이 로봇과 아이가 하나의 인물을 분리해 놓은 것 같다."라는 말씀이었어요. 사실 저도 이 둘의 캐릭터를 만들 때
모순적인 요소를 의도적으로 넣으려고 많이 고민했거든요.
예를 들어, 홍유는 겨우 10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지만, 굉장히 철학적이고 애늙은이 같은 면이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아이이고,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어서 그 사랑을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어요. 무라는 캐릭터도 마찬가지예요. 로봇이기 때문에 인간이 정해놓은 삶을 따라가야 하지만, 예상외로
허술한 면이 많고,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 의지라는 것이 생기죠. 그런데
저는 이것이 홍유와 함께 지내면서 감화된 결과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런 부분에서 조금 더 색다른 포인트들을 넣고 싶었어요. 단순히 SF에서 자주 보이는 희망적이고 총명한 소년 캐릭터를 만들기보다는, 이
이야기 속에서 진짜로 살아 숨 쉬는 듯한 캐릭터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 애니메이션 중 가장 소개하고 싶은 장면이 있다면.
주마등 장면을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12분의 애니메이션 중 1분이 조금 넘는 분량의 장면이에요. 처음에는 컷을 따로 그렸다가
제가 원하는 감정이 전달되지 않아 3D 배경을 활용해 롱테이크로 전부 다시 그렸던 장면이죠 저의 작품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짧은 단편 애니메이션에 담아야 하다 보니 초반 호흡이 굉장히 빨라요. 그래서 이 장면만큼은 홍유와 무의 감정을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 정말 공을 들인 장면입니다.
사실 처음 이 작품을 보신다면 ‘이 애니메이션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일까, 무슨 내용일까’ 의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주마등 장면을 통해 애니메이션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죠. 애니메이션을 봐주신 많은 분들께서도 해당 장면을 정말 인상 깊게 보았다고 많이 후기를 남겨주셨어요.
저도 공을 많이 들였고, 이 작품의 정수와도 같은 장면이다 보니
애착이 많이 가면서도 가장 전달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어요. ‘이 장면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주실까?’에 대한 작가로서의 궁금증과 기대감도 갖고 있고요.
- 저는 해당 애니메이션의 배경에도 시선이 많이 가요.
제가 이 작품을 제작하면 염두에 두었던 또 다른 메시지가 바로 ‘모방은
실재를 대체할 수 없다’였는데, 그런 메시지를 더 효과적을 표현하기 위해 저는 수작업으로 모든 작품의
배경을 그렸어요. 그려놓은 배경들을 하나씩 벽에 붙여서 작업에 임했는데, 그때 이 작품의 배경을 한눈에 보면서 저의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았어요. 저도 종종 유용하게 디지털 작업을 하기도 하지만, 디지털로 저장하고
나면 작업한 이후 그 작품이 잊히는 경향이 있거든요. 사실 2년
반 동안 한 가지 톤을 맞출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벽에 많은 그림들을 띄워 놓고 작업을
하니까 톤을 맞추는 게 훨씬 수월하더라고요. 실물로 남는 그림을 벽에 붙여놓고 작업하니까 다양한 스타일과
톤을 조절하고 일체감을 줄 수 있도록 작업할 수 있었어요.
- 저는 배경은 아포칼립스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아포칼립스 풍경에 비해 [유영의 끝]은 무척이나
따뜻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는 것이 인상 깊었어요.
저는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가지고 살았어요. 지구는 이미 몇 번의 빙하기를 겪었고, 많은 생물들이 멸종했잖아요. 그 사실이 무섭긴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저 지구를 지나쳐 가는 작은 방문객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크게 두렵지는 않았어요. 그래서인지 저는 인류가 멸망한 세계가 아파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림에서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 세계가 너무
어둡고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도록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저는 쓸쓸한 아포칼립스를 봐도 위안을 느낄 때가 있어요. 요즘
유행하는 리미널 스페이스라는 개념처럼, 사람이 없는 공간이 주는 그 고요하고 묘한 느낌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그런 공간들이 사람들에게 좋은 감정을 주는 이유는, 어쩌면
그 고독과 고요함 속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사실, 저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자연으로 뒤덮인 도시나 세계를 봤을
때, 그 속에서 위로받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제가 과학 책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런 거시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고요. 우리가 느끼는 사소한 문제들이 그 큰 그림 속에서는 얼마나 작은 일인지를 깨닫게 되고, 겸허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좋았거든요. 그래서 그런 관점에서 따뜻한 아포칼립스를 다룬 작품들을 보고 싶었어요. 멸망한 지구를 봐도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고 편안함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 작품도 결국엔 슬프지만은 않아요. 비록 모든 인류가 사라지고, 문명이 쓸모없게 되어도 그 속에서 슬픔보다는 평온함을 느낄 수 있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 느낌을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배경에도 녹아들게 되었습니다.
- 그림은 하나의 대화라고 해주셨어요. [유영의 끝]에서도 실제로 대화가 통했다거나, 대화가 나눠진다는 느낌을 받으신 적이 있을까요?
최근에 [유영의 끝] 개인전을 했었어요. 그때 GV(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는데, 그 자리에 다른 그림 작가님도 와주셨어요.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희가 첫 GV이라서 방문객이 많지 않을까 걱정도 하고, 질문이 잘 안 나올까 봐 미리 질문도 준비했었거든요. 그런데 그 작가님께서 12분짜리 영상을 보시고 저희가 미리 준비해 온 질문들까지 다 해주시더라고요. 그게 정말 좋았어요. 저도 답변을 드리면, 그분은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주셔서 다시 답변해 주시는 등 서로 정말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어요.
이 작품을 만들면서 고민도 많았고, 반대도 있었어요. 졸업 작품으로 하기엔 조금 난해한 면이 있는 애니메이션이고, 분량도 다른 졸업 작품에 비해 많았거든요. 그런데 같은 학생분이 제 졸업 전시를 보고, 밤새 울면서 이 작품에 대해 얘기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나도 이런 작품을 하고 싶어서 이 학교에 왔었는데"라고 말이에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제가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날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때 그 학생부께서 제 손을 부여잡으며 저에게 평생 애니메이션을 계속해달라고 하실 때 울컥하며 감정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어요.
앞서 제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은 마라톤과 같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 작품도 완성되기까지 마라톤처럼 긴 시간이 걸렸고, 그 과정에서 이 작품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었어요. 그런데 [유영의 끝]이라는 작품을 공개하고, 앞서 말씀드렸던 [유영의 끝]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을 뵙게 되며 제가 전달하고 싶었던 말보다 더 큰 위로를 받게 되었어요. 정말 제가 얻은 것이 너무나도 많죠. 그래서 ‘예술을 통해 대화할 수 있구나, 나는 예술로 소통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어요.
마무리 지으며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겠어요?
제가 이 작품을 만들면서 다 못다 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서, 올해 [유영의 끝]을 바탕으로 만화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더 많은 분들이 홍유와 무에 대해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 작가님께서는 어떤 작가가 되고 싶나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요.
예전에 본 단편 만화에서 두 고등학생이 영화를 찍고, 그 영화에
대해 받은 피드백 때문에 상처를 받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그런데 그때 영화 속에서 아버지가 그 두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너희가 이 영화를 만들면서 세상에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도 그에 맞춰 상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이 저는 너무 인상 깊었어요.
그래서 저는 작품을 만들 때 분명 어떤 이야기든 그 작품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지만, 그 상처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는 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요. 최소한의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많이 배우고 싶어요. 제가
어떤 작가가 될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보다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보다는
위로와 위안을 주는 작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 작가로서의 꿈이 있다면?
그냥 죽을 때까지 작품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사실 작품의 성공이나 흥행은 제가 조절할 수 없는 부분이잖아요. 하지만 그림을 그리든, 다른 장르의 예술을 하든, 꾸준히 제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과정에서 지치지 않고 꾸준히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인사 부탁드립니다.
사실 저는 제 말이나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는 걸 굉장히 두려워하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제 생각이 언제 또 바뀔지 모르고, 내가 가진 의견이 나중에는 다른 사람에게 안
좋은 인상으로 비칠 수도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인터뷰에서는 제가 지금 품고 있는 솔직한
마음을 많이 담으려고 노력했어요. 혹시 제 인터뷰가 힘드셨던 분들이 계시다면, 크게 상처받지 마시고 "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고, 이런 생각을 그림으로 담는
사람이 있구나" 정도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이건 조금 사적인 이야기지만,
하하, 저는 아직까지 세상에 작품으로 낸 적은 없지만, 저희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많이 썼어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그 사실을 알고 저에게 해주신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엄마가 악역으로 나올지라도 네가 그 작품을 하면서 치유되고 행복했으면 됐어."라고 해주셨거든요.
저는 그것이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직접
하는 이야기조차도 무섭게 느껴지는데, 타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건 더욱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정말 어머니께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이렇게 저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저를 키워주신 어머니의 솔직함 덕분이에요. 항상 저의 뮤즈가 되는 어머니께 이번 기회를 빌려 감사 인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