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소개하는 글을 쓸 때면, 항상 설렙니다. 어제의 나와 다른 오늘의 나를 기록하는 건 값진 일이지요. 제목에서 저를 살짝 비추었듯이, 저는 저 자신을 연극 작품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장을 넘기기 전에, '이예린'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몇 자 남기는 것은 제가 과거를 사랑하는 이유와 같은 연유로 중요합니다. 여러분께 내일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릴지도 모르는 저의 흔적을 보여드릴 수 있음에,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 가보고자 합니다.
"연극 작품에서 만난 모든 이들을 가벼이 여길 순 없어요."
'우리는 모두 영화의 주인공이다'는 말을 어느 강연이나 글귀에서 많이 발견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나'라는 영화의 주인공이자 주연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사랑하자'는 맥락으로 저 자신을 연극 작품이라 생각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저의 과거, 지금, 내일이 모두 정해진 각본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연극 작품이 정해진 대사로 진행되고 끝나는 것처럼 말이죠. 이렇게 표현하면, 아마 수동적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운명은 나 스스로 선택하고 개척할 수 있다는 말, 참으로 달곰하고 힘이 되죠. 그렇지만 저는 그런 힘보다는 인연과 운명의 힘에 기대어 삽니다.
2025년 4월 4일에 살고 있는 저는, 인연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 이 또한 내일은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습니다. - 모든 인연이 얽히고설켜 저를 만들어 갑니다. 처음으로 자아를 인식할 때도, 나 자신을 직접 보지 못하고 거울에 비친 타자의 형상을 통해 나를 알아보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우리는 타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말인즉슨, 온전히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나의 힘으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인생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나의 선택도, 생각도 모두 타자와 이 세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연기'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모든 존재와의 상호 의존 관계로 생성되고 살아가며 소멸합니다. 다시 말해, 나라는 연극에 '나'는 주인공이 맞지만, 결코 나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저를 세상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기에 인연에 관해 이야기를 잠시 해보았습니다.
나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저는 이 세상 모든 존재에 존재 이유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일어날 일은 모두 이유를 가지고 일어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저 하늘을 가르며 나는 새들, 오늘 탄 버스 옆자리에 앉은 사람, 도서관에서 눈이 마주쳤던 이들 모두 헛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인연과 이유를 머금고 있고, 그렇기에 그들을 그저 지나가는 한 존재로 치부할 순 없습니다.
특히 얕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일지라도 저는 그들을 가벼이 여길 수 없습니다. 그저 안부를 묻는 사이여도, 연락이 뜸한 사이여도 그들은 수많은 인연으로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70억 인구 중 대한민국에서, 그리고 이 시대에, 이 시간대에 만난 인연은 스치는 인연일지라도 엄청난 운명을 품고 있습니다.
또 불교의 이야기지만, 인연을 이야기할 때 '겁'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겁'에 대한 의미는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사전에 의하면 이 세상이 개벽한 때부터 다음 개벽을 할 때까지의 동안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이 창조되고 멸망할 때까지의 시간을 이야기하죠. 힌두교에서는 1겁을 43억 2천만 년이라 보았습니다. 스치는 인연은 5백 겁의 시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찰나의 순간에서 5백 겁이라는 엄청난 시간을 품은 당신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오늘 저의 모습입니다.
"해야할 대사는 꼭 해야하니까."
그리고 저는 후회가 많은 사람입니다. 생각과 후회는 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이죠. 생각이 멈춘다면, 저는 죽은 존재와 마찬가지입니다. 생각과 후회는 두 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그때 그러지 말걸'과 '이렇게 할 걸'입니다. 과거에 한 말을 후회하고,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몇천 겁의 인연으로 엮어진 우리가 오늘까지도 이어지진 않았을까 후회하던 찰나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해야 할 대사는 꼭 해야 하니까." 그 말은 꼭 했어야 하는 대사였습니다. 정해진 대사를 하지 않으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그 대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걸'이라는 생각은 자꾸 맴도는 말을 내뱉도록 합니다. 머릿속에 맴도는 말은 밖으로 구태여 뱉어내야 멈출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정해진 대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요.
많은 인연과 후회를 반복하여 형성된 오늘의 저는, 저 자신을 연극 작품이라 생각하며 다독입니다. 후회로 잠 못 이루는 밤, 꿈속에서도 후회를 반복하며 잠을 청할 때 그 후회는 필연적이었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의 후회도 어쩌면 꼭 있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후회가 있어야지만, 오늘 내가 성장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후회는 내 마음에 생채기를 냄에도 불구하고, 그 상처 위로 새살을 돋게 하여 더 단단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저는 후회를 반복하는 '연극 작품'입니다. 연극 작품에서 만난 모든 존재를, 그것이 설령 지나가는 새이더라도 소중하게 여기며 저와 세상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후회로 밤사이 몸을 뒤척이는 당신에게, 당신도 해야 할 후회를 하며 성장하는 연극 작품이라며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고 싶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