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자기소개는 정말 꼬꼬마 시절부터 시작된다. 어른들을 만나면 “자기소개 한번 해봐라!” 하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를 설명하는 수식어들도 함께 바뀌게 된다. 어느 유치원의 동물 이름 반으로 시작해, 학년이란 게 내 앞에 생기는 순간 그 동물 이름은 자연스레 졸업하게 된다. 대학에 가면 ‘신입생’, ‘학생회’, ‘졸업반’이라 말하게 되고, 사회로 나오면 이제 자기소개 앞에 붙는 말은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어느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나’를 설명하라는 것만큼 신경 쓰이는 일도 드물다.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걸 말하자니 괜히 잘난 척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약한 부분을 꺼내면 단점을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망설여진다.
그래서 어떻게 나를 설명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내 플레이리스트에 늘 존재하는 노래들을 꺼내어 보여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설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알아두어야 할 건 MP3가 생긴 이후로 대부분의 음악 용량은 밴드 음악이 차지했다는 점이다. 누군가 보기에는 취향이 확고하다고 말할 수 있고, 아니면 들쭉날쭉한 스타일의 노래라 말할 수 있지만, ‘이 사람은 이런 음악을 좋아하는구나!’ 정도의 느낌으로 너그럽게 봐주길 바란다.
서태지 - Take Five
서태지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하면 친구들은 입을 모아 묻는다. “몇 년도에 태어난 거야?” 내 친구들이 아는 서태지는 대부분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가 솔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의 앨범들을 찬찬히 들어보면, ‘이런 음악을 그 시절에 만들었다니!’ 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서태지의 앨범 중 가장 좋아하는 앨범을 묻는다면 고민 없이 8집이라고 말하겠지만, 단 한 곡을 꼽으라면 1998년 5집 앨범의 Take Five를 가장 좋아한다.
이 곡은 그저 혼자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아니라, 나의 삶을 소중하게 만들어 주는 이들이 있으며,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해준다. 우리는 가끔 나 혼자 모든 것을 해냈다거나,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혼자가 아니였기에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서태지는 이 사실을 Take Five를 통해 얘기하고 있다.
내겐 좋은 사람이 많다고 생각해.
쉽지 않은건 같은 자리에 있었어
맘속 가득한 진실을 느끼고
더욱 강하게
네안에서 난 믿음을 찾았어
난 꿈의 소중함을 알았어
할 수 있는 마음 변치않은 모습
그렇게도 난 큰 빛을 얻었어
절망할순 없는 구속받지 않을
삶이라는 것 행복한 너의 모습
빛이라는 건 일어서는 것 가까이 있게
내가 너를 만난건 행운이었어.
이젠 너를 통해서 내가 살아가고 있어.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도입부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즐겨 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가사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듣게되었고 나아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 하고싶은 말들이 이 노래에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난 이 노래를 애정하는 사람들에게 꼭 들어보라며 추천하곤 한다.
요네즈 켄시 - 지구본 (地球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의 OST인 지구본(地球儀)은, 요네즈 켄시가 무려 4년 동안 미야자키와 대화를 나누며 만든 곡이다. 이 노래는 영화 러닝타임 내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다가,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런 구성이 이 곡을 더 특별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영화 제목 그대로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마지막에 남은 여운을 지구본이라는 노래가 조용히 감싸안는다. 어쩌면 그건,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마음을 음악이 대신 전해주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이 노래를 가만히 눈을 감고 들으면, 정말 '어른'이라 생각되는 존재가 내가 걸어가는 길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는지 질문을 건네어주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도 과거가 되고 있다는 아주 당연한 얘기를 차근차근 하나씩 알려주는 얘기가 이 노래에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내게 어떤 삶을 살고싶은지 끊임 없이 질문을 건네주는 것 같은 노래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더 나은 삶을 살고싶어진다.
페퍼톤스 - 21세기의 어떤 날
밴드 음악을 꾸준히 좋아하게 만든 원동력 중 하나는 단연코 페퍼톤스다.
그들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를 다 말하자면 끝이 없지만, 딱 한 가지를 꼽자면 ‘청춘의 위로’ 같다는 점이다. 21세기의 어떤 날은 그런 위로의 결정체 같은 곡이다. 어느 계절, 어떤 장소에서 들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말랑한 무언가가 피어오른다. 삶이 무거울 때, 그 무게를 조금 가볍게 만들어주는 힘. 그게 이 노래의 역할이다.
오늘 지금 바로 여기 멋진 우주 한복판에서
너를 만나 정말 기뻤다
눈을 감고 소리치며
21세기를 함께 느꼈던
우리 기억되길
물리학적인 사실 위에 감성을 더하면 이런 문장이 탄생한다. ‘나와 너의 만남’이 단순한 우연의 연속이 쌓여 만들어졌다는 것. 이 노래를 들으면 겹겹이 쌓인 순간들 속에서 살고있다는 걸 실감한다. 아주 멀리서부터 이어져 온 시간 속에서 우리가 지금 같은 시기를 살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완전한 기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 똑같을 수 없는 순간을 그들답게 표현해냈다.
공연장에서 애정하는 마음이 담아 다 함께 저 가사를 부르는 순간 내 마음속 카메라가 쉴새 없이 셔터를 누른다. 평범한 하루를 기억에 남는 하루로 만들고 싶다면 21세기의 어떤 날을 추천한다.
이승윤 - 들키고 싶은 마음에게
이실직고하자면 이 노래는, 이번 2025 The Glow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라이브로 들은 곡이다. 그래서 오랜 기간 플레이리스트에 있던 노래는 아니지만, 시간이 흘러도 늘 함께할 것 같아서 골랐다.
보통 페스티벌이나 공연의 엔딩곡이라 하면 누구나 아는, 굉장히 유명하고 신나는 노래로 하기 마련인데, 이번 이승윤의 공연은 달랐다. 아주 잔잔한 통기타로 노래가 시작되었고, 그가 마음을 다해 하나씩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들을 수록 내가 아주 꼭꼭 숨기고 싶었던 마음을 마주했다. 사실은 그 마음이 누군가 알아차려 줬으면 했던 것이였다.
숨겨야 할 마음들이 너무도 많아서 가끔 우린 스스로도 속잖아 울음을 차고 나와 난 너에게 갈 거야 먹구름을 타고 날아 소나기를 뿌릴 거야 (중략) 전시되지 않을 거론도 되지 않을 호명조차 되지 않을 마음아, 이 노랜 너희 거야
내가 가장 숨기고 싶었던 감정에 말없이 손을 내미는 방식. 들키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인간적인지, 그 진심을 이승윤은 노래로 전해준다. 이 곡은 내 안의 말 못 할 마음들을 조용히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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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노래들을 직접 들을 수 있는 무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공연장에서, 귀로 듣고 온몸으로 느끼는 음악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새삼스레 알아차리는 경험을 사랑한다.
비로소 나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믿게 되는 순간들. 그래서 그 자리가, 그 시간이, 그렇게 소중하다.
그렇다면 이제, 이 노래들을 함께 느껴본 당신에게 묻고 싶다. 이런 노래들을 좋아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 것 같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