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궁금한 것은 ‘그럼에도 계속해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스스로 택한 길을 뚜벅뚜벅 걷는 사람. 이미 종착지에 도착한 사람이 아닌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그곳을 향해 걷고 있는 사람.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만났는지, 무엇이 기쁘고 무엇이 슬픈지, 왜 계속 걷는지가 궁금하다. 그런 마음으로 배지우 작가를 만났다. 배 작가는 초등학교 때 미술을 시작해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그림을 그려왔고, 그림을 그리고 있고 그래서 계속 그리고 싶은 사람입니다.
자기소개가 인상적인데요.
나를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까 생각을 많이 했는데요. 직업보다는 그냥 저와 그림의 관계로 소개하고 싶었어요.
어떤 그림을 그리시는지 궁금해지는 답변이네요.
시시각각 변하는 것 같긴 한데 지금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요. 학창 시절에는 입시를 위한 그림을 그렸고, 대학교 때도 약간 혼돈이 있었거든요. 이제서야 저만의 주제를 찾은 것 같아요.
그 주제를 어떻게 찾게 되셨어요?
대학교에 들어와서 일기를 쓰듯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삶에서 얻는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며 일기처럼 그림을 그리다 보니 그 부정적인 마음이 닿는 지점이 여기더라고요. 그래서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답답하고 불쾌하고 이해가 안 가는 상황에서 시작한 그림들이 많아요. 제 그림을 통해 뭘 바꿀 수 있는지는 아직 찾아가고 있지만, 우선 문제를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이잖아요. 현재 제 그림은 ‘뭔가 잘못됐다’고 인식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어요.
덩어리 연구 _ Oil on canvas_ 35*35cm_ 2023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 보통 빨간색이나 파란색 하나의 색만 사용해서 그리시더라고요. 이 방식도 주제와 연결이 되는 건가요?
맞아요. 저는 보통 빨간색을 사용하는데요. 빨간색은 피의 색이며 생명의 색이고, 동시에 죽음의 색이에요. 따뜻하고 뜨거운 색이기도 하며 희생의 색이자 폭력의 색이기도 하죠. 또는 위험을 알리는 경고의 색이며 열정적인 사랑의 색, 마지막으로는 여성의 색이라고 생각해요. 빨간색이 담고 있는 그 의미가 제가 그리고자 했던 그림과 닿아있더라고요.
파란색은 그 반대의 색이잖아요. 대부분 여자화장실 표시는 빨간색, 남자화장실은 파란색인 것처럼요. 근데 빨간색과 파란색은 흑백 처리를 하면 딱히 구분이 안 가요. 조도가 똑같거든요. 그래서 의미부여하기도 좋았어요.(웃음)
색을 하나만 쓰다 보면 어쨌든 표현에 제한이 있을텐데. 색을 덜어낸 대신 그림에 뭘 더 더하시는지 궁금해요.
미세한 얼굴 근육이나 표정을 더 예민하게 표현하려고 해요. 특히 제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눈빛인데 속눈썹 한 가닥이나 눈의 작은 라인만으로 전달되는 감정이 너무 달라지더라고요.
할많하않 _Acrylic on Fabric _180*180cm_2024
개인적으로 작가님 작품 중에 제일 인상 깊은 눈빛이 <할많하않> 시리즈예요. 빨간색만 사용한 게 안 느껴질 정도로 표정이 강렬하더라고요. 공감이 많이 되기도 했고요.(웃음) 이 작품에 붉은색만 사용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할많하않> 작업 노트 中
‘여자 나이 25살이면 꺾였다.’ ‘얼른 결혼해서 애를 낳아야 한다.’ ‘너무 강해 보이게 꾸미지 말아라 남자들이 싫어한다.’ 할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와 꿈틀거리는 혀를 어금니로 꽉 깨물고 겨우 막았지만 차마 그 말들은 삼켜지지 못하고 눈빛으로 흘러나온 그런 얼굴을 한다. 말을 걸어오는 상대방에게 일말의 기대감도 들지 않는 대화의 불통을 의례 짐작하여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태도이다. 단호한 체념이 묻어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할많하않>은 할 말이 많기까지 하는데 참는 거잖아요. 혀를 꽉 깨물면서 피가 나는 듯한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빨간색 중에서도 피 같은 색을 썼어요. 사실 빨간색이 아니면 부족할 거라 생각했어요. 다른 선택지는 떠오르지 않았어요.
<할많하않> 속 표정을 안 지어본 여자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런 표정은 거울을 보고 그리시는 건가요?
제가 눈빛 수집가예요. 예능을 보다가도 출연자의 눈빛이 마음에 들면 캡쳐해둬요. 원하는 이미지가 없으면 셀카를 찍어서 활용할 때도 있고요. 중요한 건 보고 따라 그릴 이미지가 필요한 게 아니고 그 ‘빛’이 필요한 거예요. (주로 어떤 눈빛을 수집하세요?) 다양하지만 보통 슬픈 듯한데 독기 어린, 미묘한 눈빛을 보면 좋은 자료가 되겠다 싶더라고요.
인생을 잘사는 세가지 방법_ Gouache on paper_36*36cm_2023
<할많하않>과 반대로 푸른색으로 그린 <인생을 잘 사는 세 가지 방법>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겠는 표정이 인상적이에요.
그건 <포제션>이라는 영화의 이미지를 포착해서 썼어요. 여자 주인공이 우는 것 같기도 하고 희열에 찬 것 같기도 한 표정을 지으며 감정적으로 치닫는 장면이에요. 제가 평소에 ‘웃을 일이 있으면 슬플 일도 있다’는 말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복합적인 감정이긴 하지만 마냥 행복한 건 아니니까 우울한 이미지를 가진 파란색으로 그렸죠.
설명을 들으니 더 궁금해지는데, 그래서 ‘인생을 잘 사는 세 가지 방법’이 뭔가요?(웃음)
이건 제 목표, 그러니까 제 인생 가치관이기도 한데요, 많이 울고, 많이 웃고, 많이 만드는 거예요. 많이 경험하는 것. 많이 털어내는 것. 실패도 많이 하고 실수도 많이 하고 웃기도 많이 웃고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많이 만드는 것도 저 같은 경우에는 그림을 만드는 게 되겠지만 뭐 추억을 많이 만들 수도 있고 관계를 많이 만들 수도 있는 거고요. 그런 식으로 뭔가를 많이 만든다는 행위 자체가 인생을 더 풍부하게 하는 것 같아요.
제목은 ‘세 가지 방법’이지만 결국 ‘많이’라는 단어로 귀결되네요.
맞아요.(웃음) 한 번 태어난 인생 죽기 전에 뭔갈 많이 해보는 게 적게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요. 후회를 해도 되는데 ‘많이’ 경험해서 후회도 많이 하는 게 어쨌든 더 잘 사는 게 아닌가 싶어요. 실수도 많이 하는 게 낫다!
얼마 전 SNS에 그림을 올리시면서 ‘많은 쓰레기를 만드는 와중에 살아남은 것 하나‘라는 표현을 하셨어요. 그러고 보니 여러 그림 중 세상에 내보일 작품을 선택하는 작업도 쉽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작가님께는 어떤 그림이 살아남는 그림인가요?
음… 저는 ‘척하지 않은 상태’의 그림을 살리는 것 같아요. 뭘 잘 해내려고, 좋아 보이려고 노력한 그림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매력적인 그림이 있거든요. 비슷하게 생긴 타로카드 중에서도 눈에 띄는 카드를 뽑는 것처럼 유독 눈이 가는 그림이 있어요.
그런 걸 알아보려면 결국 많이 그려 봐야 겠군요.
맞아요. 저는 그려야겠다 싶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일단 작은 이미지로 시작해서 여러 번 그리면서 확대해 나가는 과정을 거치거든요. 그 과정에서 탈락하는 그림이 되게 많아요. 미묘한 차이 속에서 그 느낌을 잡으려고 여러 번 그리는 것 같아요. 처음 그릴 때는 척하기 마련이거든요. 한 서너 번 똑같은 이미지를 그리게 되면 네 번째 마주하는 빈 페이지는 ‘해보겠어!’하는 비장함보다도 마음을 내려놓고 그냥 “아휴…” 하면서 그리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나오는 것 같아요.
家事 _ pencill on paper_30*21cm_2021
<인생을 잘 사는 세 가지 방법>과 연결되네요. 많이 그리는 만큼 기쁨도 많고 슬픔도 많을 것 같은데. 작가님께 작업의 기쁨과 슬픔은 각각 무엇인가요?
일단 나만의 작은 공간에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좋아요. 종이가 사각거리는 느낌을 느낀다든지 물감을 개면서 느끼는 감각들이 소소하게는 기쁜 것 같고요. 저는 그림이 말이나 글과 다르게 테두리가 없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재능으로 가진 사람이어서 정말 기쁘기도 해요.
슬픔은 그 반대되는 것들. 그러니까 창작 활동으로 수익을 내면 너무 좋겠지만 아직은 그게 아니기 때문에 이 모든 시간들을 자꾸 그 돈으로 환산하게 되는 경우가 생겨요. 그럼 그때 좀 슬픈 것 같아요. 점점 나이를 들어갈수록 좀 슬픔을 느낄 일이 좀 더 많아지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리는 것을 택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작가님을 계속 그리게 하는 원동력은 뭔가요?
제가 맨날 그림을 ‘일생일대의 지독한 짝사랑’이라고 표현하거든요. 절대 안 이루어져요.(웃음) 절대 안 이루어지고 심지어 맨날 까여요. 근데 펑펑 울다가도 다시 결국 그 자리로 돌아가는 거죠. 이뤄지고 싶으니까. 그게 원동력이지 않나 싶어요.
그럼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건 언제라고 생각하세요?
어렵네요. (개인 전시회를 열면?) 근데 그건 다른 사람들 기준에서 괜찮아 보이는 거니까 근본적으로 짝사랑을 이뤘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것 같고요. 처음 자기소개 한 것처럼 그냥 계속 그림을 그리면 결국에는 이뤄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물론 저도 어렸을 때는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었고, 작품이 비싸게 팔리고 하면 멋있어 보였어요. 근데 그림이랑 엎치락뒤치락하다보니까 그냥 그림 그리는 행위를 계속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바뀌었어요.
앞으로의 목표가 궁금해요.
지금 제가 가장 원하는 삶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니까 제 그림으로 돈을 벌며 살고 싶어요. 그치만 그게 아니어도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상태에 머무르는 게 더 정확한 목표인 것 같아요. 물론 제 그림으로 돈을 벌고 살아가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얘를 포기하진 않고 싶어요.
계속 그림을 그리게 되실 것 같아요.
저도 제가 계속 그릴 것 같아요!(웃음)